사과의 맛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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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들려주거나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을 한 가지 이상씩은 듣으며 이야기의 한 덩어리로 꿈을 꾸거나 그 이야기들이 주는 개개의 양분을 빨아먹으면서 성장한다. 원래의 이야기는 그대로 있지만 시간을 걸으면서 이야기의 등장 인물의 이름이 바뀌고 직업이 바뀌는 것을 솔찬히 보아오는데 우리들의 삶이 어쩌면 소설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어린이들이나 읽는다는 동화 속에 그 똬리를 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 만나는 것들에게서 의도하지 않은 치명적인 강렬함을 확인할 때가 있다. 『사과의 맛』이라는 소설집은 그저 한국 작가였고 , 동화적 상상력이라는 키워드에 우연히 집어든 책이다. 단순한 점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처럼 동화라는 것이 단순해보이는 이야기의 얼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한 두번 들었던 동화는 잘 잊혀지지 않고 한 사람의 평생 뇌리를 유영한다. 평생을 유영하는 우연의 필연성이라니! 반가운 일이다.

 

언젠가 ㅂ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ㅂ 작가외에는 한국 작가 책은 읽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는데 요즘 깊이에서는 ㅂ작가를 따라갈지는 모르지만 제법 읽고 생각할 만한 일군의 작가들이 한국문단을 떠받칠 새로운 대들보로 단련되어가고 있는 점을 확인하면서 한국 문학이 천리를 한 번에 비행하는 붕새의 도약을 하리라는 기대감에 흡족해지기도 한다.

 

오현종 작가의 『사과의 맛』은 중단편 소설집이다. 동화를 원질료로 삼아서 이야기를 뽑아낸다. <상추 , 라푼젤> , <헨젤과 그레텔의 집> < 연금술의 밤> <수족관 속에는 인어가> <연못 속에는 인어가> <열역학 제2법칙> <창백한 푸른점> <곡예사의 첫사랑> <달과 달걀> 9 편의 이야기 속에 때로는 드러나게 때로는 은밀하게 동화의 원형은 감추어져-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수족관 속에는 인어가> , < 열역학 제 2법칙> <창백한 푸른점>은 챙겨 읽어봐도 좋을 것같다 -  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신데렐라>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참혹한 이야기가 원전이라는 소리르 들었던 기억이 있다. 동화는 아이들이 읽으니까 아름다우어야 한다는 무의식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선언이었는데오현종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동화의 몽환적이고 판타스틱한 환상성을 이야기를 풀어내는 도구로 들고 왔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의 건정선은 들고 오지 않고 어른들을 위해서 건정성을 버리고 잔혹함 혹은 현실성이라는 대체품을 들고 돌아왔다. 어른들에게 동화가 완전히 살아 숨쉬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더이상 어른들은 동화의 나라에 입장이 불가한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어른됨의 숙명과 천형이므로 그리 슬퍼할 일이 못되지만 옛 동화의 나라를 기억하는 아직 어른이 덜된 얼는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아픔이 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어른들만의 폐허된 동화의 나라가 존재하고 그 동화의 나라에서는 희망은 이미 거세된지 오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세이렌은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생명을 앗아가고  한나라 군사는 초나라 군사에게 초나라의 노래를 불러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전의를 떨어트린다 어느이가 붙인 수식어인지는 모르겠으나 포스트모던 셰에리자드 오현종은 노래가 아닌 이야기로 술탄을 유혹하듯 천야일화의 이야기로 독자들을 유혹한다. 유혹을 조심하셔야한다. 백설공주가 먹은 사과는 강제로 먹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먹고 죽어버린 것이니까? 여러분 오현종이라는 셰에리자드의 맛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은가? 따 먹으라 사과는 먹기 위해서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 오현종이라는 작가는 읽히기 위해서 독자에게 존재하는 것이니 독이든 사과든 꿀이 든 사과든 먹어서 맛을 봐야하지 않겠는가? 곧 죽어도 한 번 깨물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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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처럼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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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그저 영화관련 프로그램에서 정보획득을 하는 것으로 영화감상을 그치고는 하는데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광들은 영화를 보면서 감독은 누구고  연기자들은 누가 출연했고 어떤 장면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술술 이야기한다. 구간반복이 설정된 기계깥아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닌데 영화가 아니라 책에 대한 이야기라면 나도 영화광들처럼 책에 대해서 읊어내는 사람들을 여럿 지인으로 알고 지내려고 하고 있거니와 나 또한 그들과 같이지낸 탓에 풍월을 읊기도 하니 동종감응이랄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책도 그렇지만 영화도 사람의 기억 속에서 불멸의 생을 부여받는 것 같기도 하는 모양이다. 책에는 이 한 권의 책이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영화에는 이 한 편의 영화가 꼭 존재하기 마련이어서 추억이라는 혹은 기억이라는 이름의 포장을 둘러싸고 사람들 마음 속에 남는다. 여러분들도 생각해보라? 이제까지 보아온 영화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을 텐데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기억과 함께 존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가네시로 가즈키의 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이 이야기는 영화 한 편과 관련된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모여있다. 처음에 한 편을 읽고 두 편을 읽을 때까지는 이야기들이 단편으로 떨어진 이야긴지 아니면 이어지는 이야긴지 감을 잡기가 좀 애매모호하긴 하다.모두가 각개로 존재하지만 각각 교집합이 되는 부분이 있기는 해서 모든 이야기는 『로마의 휴일』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말해도 좋겠다.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기도 하고 전체적인 이야기가 모여서 전체 사건의 윤곽을 드러내주기도 하는 것이어서 가네시로 가즈키의 글은 다분히 피투피(P2P)적이다. 흔히 하는 비유로 퍼즐을 조립하는 것 같다는 말로 바꾸어도 좋겠다.

 

『로마의 휴일』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 기껏해야 진실의 입 장면만 기억하고 봤을 뿐이다. - 설핏 생각해보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잊지 못할 기억 아름다운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영화처럼 각각의 이야기는 각각의 주인공에게 잊혀지지 않을 가장 아련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라고 우겨봄직도 하다. 

 

어쩌면 이 『영화처럼』이라는 이야기는 영화가 되어 우리 곁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해보게 되는데 한 사람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다음 혹은 다다음 사람들이 잠시 잠깐 까메오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옴니버스 영화라고 해야하나 서로는 거미줄처럼 연관되어 있다. 거미줄에 걸린 먹이는 어쩌면 날 잡아잡수라고 거미가 나타날 순간을 향해 치닫을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큰 줄기나 작은 줄기에 대해서 수다스럽게 이야기하길 즐기는 편이 아닌데 왜 머라고 그래야 할까 ? 다 큰 낭자의 치맛저고리를 아이스께기해버리는 기분이라고 말해둬야 하겠지만 왜 못 볼 걸 봤다는 그 민망함이 앞선다. 관능적이거나 섹시하거나 말이다. 거 다 보여주는 것보다 적당히 가리는 것이 좀 더 섹시하거나 관능적이ㅏ고들 한다는데 가려져 있을 때 벗겨내고 싶다는 욕망이 쌓이기는 해서 말이다. 그렇다. 적당히 가려두었으니 저 치마자락의 안이 궁금하신 분 , 혹은 저 바짓저고리 안이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그 치맛자락을 뒤집어 보면 될 것이고 바짓저고리를 벗겨보면 될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대나무 숲이 필요하기는 한 모양인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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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두 번 떠난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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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말이다. 여자가 떠나는 것은 연애라는 그 전초 작업이랄까가 필요한 것인데 한번도 연애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는 유랑인으로서는 저 밑도 끝도 없는 나라카같은 - 나라카는 나락이라고도 하는데 무간지옥이라고도 불려지는 것으로 안다 - 헤어짐이 당황스러울 뿐이기는 하다. 저 생뚱맞은 헤어짐은 찰나의 순간이라는 것을 말해두고 시작해 보자 먼지와 같은 열 한가지의 이별 혹은 떠나보냄에 대한 이야기란다.

 

『여자는 두 번 떠난다』는 저기 섬나라 요시다 슈이치 씨가 쓴 글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말은 이미 『퍼레이드』라던지 『동경만경』이라던지 『악인』을 통해서 유랑인이 사는 지방에도 전해지기는 했다. 그의 말이 그저 번드르한 햄버거-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는가? 크기는 큰 것 가은데 공복감을달래줄 만큼은 아니다. - 같지는 않았고 값싼 비유로 말해보자면 쓰시같았던 문장들과 의미들을 풀어내어 놓았다고 생각하고 또 그리 풍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니 책이라는 것을 꾸며 세상에 나왔을 때는 책이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요시다 슈이치가 썼기 때문에 팔리는 기이한 현상을 이끌어내는데 혹자들은 이런 것들을 말하는 자의 브렌드 네임 효과라고 한다고 들었다.

 

이야기가 열 한개가 되니 천일야화가 아니라 십일야화가 될 것 같아보이지는 않아보이지만 이야기를 꾸며 나왔으니 이야기해보는 것도 심심한데 시간을 보내는 심심파적은 될터라 떡본김에 제사 지내려고 한다고들 하는데 유랑인도 따라 해볼 생각이다.

 

열 한 명의 떠남에 대한 기록이라고 보아지는데 말이다. 연애 혹은 남녀간의 사랑 혹은 원나잇스텐드 - 우리고장 말로 역해본다면 하룻밤 살뽀뽀쯤 되려나 모를 일이다. -의 기간을 거친 연인이었던 이들이 헤어지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초등학교 때 분광기 - 뭐 어떤 이들은 스펙트럼이라고들 한다고 하는데 - 에 햇살 한 가닥 통과 시켜보면 한 가닥이라고 알려져 왔던 것이 자외선 적외선 가시광선으로 다시 가시광선의 몇 가지 색으로 분리된다. 그러니 하나인 것이었는데 그 하나는 여럿을 한 몸에 사려 넣어 두고 있다는 말이란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이별은 이별이되 다른 이별이라는 이야기다. 매번 옷을 바꿔 입는 마네킨이는 비유를 써먹어도 되는 자리라면 좋겠다.

 

이 헤어짐 혹은 이별의 순간에 이상한 것은 남자가 떠나는 일은 없다는 것인데 모두 여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라진다. 사라짐은 곧 헤어짐으로 치닫는다. 예의 저 두번 떠난다는 말을 탐색할 이유가 생기는데 『여자는 두 번 떠난다』 가만히 풀어 보면 여자는 두 번 남자에게서 떠나야 완전히 잊혀진다는 말이 되는 것도 같은데 한 번은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고 또 한 번은 마음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고쳐보기로 한다면 <남자는 여자를 두 번 떠나보낸다>정도로 고쳐 볼 수 있을게다. 지독한 종자가 아닌가 남정네들이란 말이다. 두 번의 상징적 죽음에 이르러서야 별것 아닌 이별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 말은 꼭 해두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또 뭣이더라 저기 섬나라 작가들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에 맛들여진 사람드리라면 말이지 이야기가 재미는 있을 듯한데 이제까지의 요시다 슈이치를 생각한 사람들은 심한 배신감을 불러일으켜 '한 입에 넣어 부셔버리거야' 라고 심은하의 그 대사를 남발할 것도 가아보여 걱정이 되기는 한다.또 덧붙여 말하지면 너무 많은 상황을 설정하고 짧게 짧게 쓰느라고 요시다 슈이치가 장편에서 보여주었던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들을 다 드러내지 못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요시다 슈이치는 단문의 작가가 아니라 장문의 작가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인데 , 사실 이미 읽어본 바대로라면 한 번은 실수요 두 번은 사실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다음 작품이 어떤 형태로 나올지 기대 반 우려 반이기는하다. 모른다. 이러다간 요시다 슈이치가 확보했던 단골도 두번 떠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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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우리시대의 논리 11
손낙구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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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를 알게 된 것 『법률사무소 김 앤 장』이라는 책 때문이었는데 , 그 책이 출간될 때 한창 삼성문제가 시끄러웠고 삼성 뒤에 버티고 있는 법기술자집단이 회자 되었었다. 그 전에도 암암리에 알고는 있었지만 법이 없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제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고 법이 정의를 지키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돈을 버는 자본주의 논리와 함께 할 때의 비참함을 맛보기에 적당했다.

 

이후 두 번 째로 후마니타스 표 책을 만나는데 손낙구 씨의 『부동산 계급사회』이다. 『법률사무소  김 앤 장』의 저자들도 생소했지만 손낙구 씨 역시 생소하기는 마찬가진데 심상정이라는 국회위원 보좌관을 했었고 , 노동운동가라고 설명되어있는 프로필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계급'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그리 좋지 않다.  우리나라는 외관상 계급주의가 타파된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계급은 태생적으로 획득되는 것만 없어졌다. 암암리에 사람들의 인식 속에 계급이 생성되는데 눈에 보이는 벽은 부셔버리기라도 하지만 인식 속에 자생한 벽은 무너지지 않는다.

 

부동산이란 무엇인가? 사전을 찾아보면 토지 및 정착물이다. 다른 말로 하면 땅과 건물이 부동산이다. 이것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계급이 달라진다. 슬픈 현실이다. 사람됨으로 인해서 사람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과 그 환산가치로 나눠진다. 인성이 사라지고 수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아가는 인간은 슬프다.

 

『부동산 계급사회』에서는 문제를 확인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부동산이 무엇이 문제이고 , 부동산이 경제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부동산 소유가 인간의 삶의 질을 어떻게 흔들어 놓는가와 부동산이 빈곤의 문제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 나라의 땅은 누가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 꼼꼼하게 살핀고 그 대안을 제시한다.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문제 제시와 상황을 살피는데 많이 이용된 것이 통계수치이다. 이 책은 어쩌면 통계 자료의 보고이며 부동산에 대한 보고서이다.

 

각 장마다 해당되는 문제를 통계와 자료를 통해서 입증하고 수치화해서 읽는 사람의 머리 속에서 추상적으로 떠돌던 것들을 잡아서 고착화 시키고 실물화 시킨다. 어마어마한 숫자들이 책 속에 내려앉아서 그 첨예한 비극성을 적나라하게 살핀다.

 

부동산은 한국 경제의 기괴함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먹고 살아야했던 시절 건설 경기만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낼 수 있었던 시절 국가적 건설사업의 붐으로 부동산 시세의 급등이 일어난다. 사실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부동산 시세는 완전한 하락이란 말을 자신들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부동산은 한정되어있어 그 값이 오른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소유하고 자본의 증식도구로 사용되고 부동산을 이윤 사업의 가장 큰 틀로 보는 재벌들의 획책이 그 뒤에 있다.

 

부동산은 당연히 소유의 문제가 되고 소유는 빈곤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빈곤의 차이를 나태는 줄 수 있는 지표가 부동산의 소유이고 이런 부동산의 소유는 당대에도 유효하지만 후대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그 지위는 세습된다. 이제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이제 용은 거대한 강에서나 거대한 바다에서나 승천한다. 용나는 곳에서 용은 난다. 어쩌면 이러한 것은 신계급 사회를 확정짓는다. 유동성이 사라진 사회는 암울하다.

 

『부동산 계급 사회』에서는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간단한 퀴즈를 제시하고 그 답을 알려준다. 각장의 마지막에는 그 장의 주요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결국 이 책을 확 줄이려면 A4  두 장 정도에 간추릴 수 있다. 각 장의 내용은 간추린 문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자료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독법이지만 거꾸로 읽기를 제안해보는데 간추린 문장을 먼저 읽고 거기에 상응하는 논리적 수치 제시된 문장들을 읽으면 정리에 도움이 더 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 한국의 부동산은 또 한번 꿈틀거리고 있다. 그 꿈틀거림은 서민층을 파괴하고 빈곤층을 양산한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러한 것을 개인이 바꿀 수는 없다. 개인의 각성이 모이고 모여서 단체가 되고 단체가 대표성을가지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이 집단화되고 생명력을 얻으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이런한 것은 국가 조직이 개입을 해서 안정되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 같은데 요즘 들리는 뉴스로는 억제하고 안정된 삶을 이끌어야 할 국가가 부동산의 가격을 상승시키는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는 듯하다. 슬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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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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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제법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은 열꽃피어 목숨이 할딱거리는 것처럼 한 가지를 바라게 되기는 하는 모양인데 그 병증은 아무래도 소설하기 혹은 소설쓰기의 염원을 세워 몇날 며칠을 소설을 써보겠다고 강호의 무림고수가 폐관하여 수련하듯이 머리 싸매고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인데 , 열에 하나나 겨우 깨우쳐 글이라는 것을 써내기는 하지마는 열에 아홉은 생각을 글이 못따라가 주저 앉고 마는데 강호 무림인들은 주화입마라고들 하지만 세인들의 눈에는 그저 작파해버리고 떨쳐 책상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밖에 보이지 않아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한 초식이라도 창안해내거나 모사해내어 본 자라면 알긴 하던데 , 화려하든 무난하든 자기만의 초식을 바라봐주는 사람만 있으면 한 초식뿐이더라도 계속 뽐내게 되기 마련이거든 마약과도 같은 것이란 말이지 거 보란 말이다. 남사당패나 광대들을 보란  말이다. 알아봐주고 호응해주면 없던 용기라던가 그런 것이 생겨 평소에는 하지도 못하던 것들을 해내고서는 말이다. 그 값으로 박수를 받아 마신다는 풍문이 들리는 바와 같다. 그렇게 해서 재주는 늘어 발전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는 것쯤은 부연하지 않아도 귀 있는 자 알아 들었을 터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기는 하려니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기억해보면 , 독문초식은 사실은 이전에 있어 왔던 초식들의 한데 모아 돼지국밥처럼 술렁술렁 끓이면서 잡내와 느끼함을 걸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인데 한 초식을 떼어 놓고 보면 각 명문정파의 한 부분씩이지만 붙여 놓고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것이 되어 - 혹자는 전성이라고 하고 혹자는 전이라고도 한다. - 버리기는 하지만 몹쓸 것이라도 될 것 같지만 희안하게도 이세상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자기만의 독문초식이 되어 있어서 아무도 흉내내지 못할 뿐더러 흉내낸다 하더라도 기의 운영이 뒤틀어져 주화입마에 들게 되니 조심해야한다. 독문초식 뒤에 외호라도 붙여둔 이름이 있으면 오롯하게 후세에도 전해지는 거대한 초식이 된다는 것은 귀 간지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에 완전무결한 무공 - 무공이란 것은 잡스러운 내가 알기로는 초식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들었다. -이 떠오르더라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른다는 방언을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는데 , 머릿속의 무결한 무공으로는 아무리 범의 목덜미를 물어봐야 하룻강아지의 이빨 부러지는 소리 - 하루 강아지는 참고로 어른 강아지가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이빨 한 쌍도 구비되어 있지 않음을 기억하시라  - 도 들을 수가 없다. 그렇단 말이다. 강아지가 범을 물려면 발톱이라거나 이빨을 벼려야하는 것인데 하룻강아지 주위에는 안타깝게도 어른 강아지라던가 어미강아지가 없어 어떻게 이빨을 벼리는지의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볼 문제는 적을 알면 절대 지지 않는다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퇴'라는 말이다. 적에게서 이빨과 발톱을 벼르는 법을 배우면 되는데 칼을 갈아본 적이 있는 자는 알 것이로되 숫돌질 한 번에 날이 서는 법은 세상천지에도 없게 마련이지 않느냐? 갈고 또 갈아야 칼 날이 서듯이 발톱도 이빨도 갈고 또 갈아야 범의 목덜미라도 잡아챌 것이거든. 저기 호서의 미켈란젤로란 환쟁이가 말하기를 조각하는 바위 안에 이미 조각되어질 상이 들어있다고 하지 않느냐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다듬어서 그 상을 꺼내는 것이다. 입이 아프지만 완전무결한 무공을 생각에서 끄집어 내어 화현시키는 것은 그렇단 말이다. 알지 않느냐 칼갈이나 이갈이 발톱갈이는 연습의 다른 이름이란 말이거든 (아 설명하기의 잡스러움)

 

섬나라에서 나름 독보적인 초식으로 이름을 알리는 무림 고수가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라는 무공독본을 내어놓기에 이르렀는데 무공의 초식은 강호 무림인에게 있어서는 목숨줄과도 같은것인데 말이다. 스무 단계의 외공과 내공을 합친 초식을 시연하기에 이르렀다. 허허실실의 태허를 찾아 헤메이는 것 같기는 하다만 극대의 것을 추구 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하지만 무공독본이라는 것이 자기만이 알 수 있는 표현들과 심득으로 채워진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인데 말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타인의 무공을 잘못 받아들여 체화하지 못하면 주화입마에 들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인과율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움직이는 그림을 통해서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것인데 그 무엇이냐 '등가 교환의 법칙'이 그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정당한 댓가를 치루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 되어버리는 지금이지만 무공은 그것을 아직까지도 지키고 있는 몇 안되는 장이기도 하다.

 

내 고향 선사께서도 무공에 대해서 언급한 이가 없는 것이 아니어서 찾아보기로 한다면 무림초자부터 시작해서 전설의 고수까지 무공에 대해서 이야기 한 바 있는데 수 만 종류의 무공 독본들 중에 읽어 본 것은 달랑 두 가지 밖에 되지 않는데 이태준의 『문장강화』와 이외수『글쓰기 공중부양』이 그것인데 이태준의 무공이 순정한 기본 초식이라면 이외수의 글은 순정한 초식이 아니라 변초라고 해야 할 것들이다. 이태준은 도()법가라면 이외수는 검()법가라는 식의 투미한 비유이긴 하다. 오독하기로는 이태준은 일격필살의 무공을 추구하고 이외수는 다량출혈로 필살하는 자이다. 초심자들에겐 섬나라 무림인이 쓴 비급보다도 이외수의 변초보다도 그저 순정한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기본으로 연마하라고 말해두고 싶긴한데 말이다. 늙은이의 말들은 옛것이고 귀찮고 고리타분하다고 해서 듣지 않는 것이 청년들이다 보니 말해두고도 입만 아프기는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지금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혹은 중심에 있는 『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라는 비급을 쓰신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무림인의 비급을 읽을 초심자들이 걱정이 되긴 해서 늙은이 - 새치가 성성하니 백발에 가까워오니 늙어가는 늙은이이긴 했다. 이세상에 늙어가는 늙은이가 아니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 - 노파심으로다가 아리아드네의 실마냥 몇마디 해본다면이야  '무릇 무공이란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초식을 만들어냄에 있어서 한 동작 한동작 명확하게 할  것이고 명확한 것은 유하게 이어져야 빈 틈이 생기지 않는데 그러하기 위해선 수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초식이라는 것이 모든 초식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니 이전의 것들을 버리고 새로 만들지 말 것이며 쓸 만한 것은 가져다 쓰되 만들어진 초식은 그 이전의 것이 아니라 오롯하게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또한 연습만한 것이 없고, 연습에 의해 만들어진 무공은 남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것이어야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그 무공의 원류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을 해두기는 하는데 귀 있는 자 들을 말이다.  ( 아 설명하기의 잡스러움 설명하다가 내가 죽을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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