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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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칼 (유랑인 웃는 소리) 잘들 지내셨지요. 갈바람의 흔적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바람에서 사람들의 한숨보다 더 무거워진 바람만이 사람의 옷깃을 여미게 만들고 있는 요즈음입니다만 다들 지체평강하시고 만수무강하시고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사람농사 잘 짖고 계시리라고 유랑인은 믿습니다만 혹여나 노파심으로다가 인사를 대신해서 말입니다. 몇 마디 해봅니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그다지 제 시선을 끌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 부제를 살펴보면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라고 되어 있고 말입니다. 『시학』이라는 것을 접목하여 영화와 이야기한다고 했더란 말입니다. 『시학』이 저의 시선을 잡아 끈 겁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아직도 읽어보지 못한 『장미의 이름』에서 금서의 제목이 『시학』이었다는 스포일러 비슷한 풍문을 들었던 기억과 대학을 다녔을 적에 교양 수업으로다가 『시학』을 한 학기 들었던 기억이 겹칩니다. 그 중에서도 학교에서 배웠던 『시학』이 기억이 나긴하는데 몇 안되는 낱말의 편린들만이 둥둥 떠다닙니다. 한 번 뜬구룸 잡듯 잡아보지요. 카타르시스 , 비극 , 희극 플폿 정도가 기억에 납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고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발췌된 문장들을 보니 이런 문장이 있었나하는 의구심까지 들기 시작했거든요.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뭐 간단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아저씨가 쓰신 몇 줄 안되고 얄팍한 『시학』에 다 들어있고 그 시학에서 비롯되었고 약간의 변형이 되었지만 현대의 영화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힘을 알게 모르게 발휘한다는 이야깁니다. 자 그럼 여기서 뭐 스토리텔리이 뭐냐구요 그건 네이버 군이나 네이버 언니에게 물어보시면 되고요. 대충 시나리와라고 생각하시면 된다는 거지요 뭘 즉 글이지만 눈에 보여지기 위해서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최소한 여기 이 책에서는 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학 강의실에서 함께 읽던 『시학』이 생각났던 이유는 말입니다. 이 책이 딱 대학교재의 느낌과도 같았거든요 마이클 아저씨가 학생을 가르치나봐요. 수업시간에 강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말투입니다. 친근감도 있는데 조심해야 되죠 독자는 친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내가 너랑 친했었나라고 물어오는 경우가 간혹 있으니까 말이에요.

 

시학과 영화니까 말이에요 고전 영화를 제시하고 그 속에서 시학이 죽어버린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 살아있는지를 설명을 해주는데요. 이럴 때 유랑인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유랑인이 사는 곳 영화들을 예로 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하지만 뭐 저자 마이클 아저씨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까요. 마이클 보고 한국어 공부 하라고 할 순 없지 않겠어요. 어서 빨리 마이클 아저씨처럼 설명할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장하고우리 영화롤 이야기하는 날이 오길 바래보는데요. 사실은 유랑인이 본 영화라고는 세 편 밖에 없어서요. 좀 알아듣기가 살작 귀가 먹어지는 느낌이었지요.이럴 때 느껴지는 괴리감과 간극은 아흐 견딜 수가 없어요.

 

시학을 통달을 한다고 해서 시나리오 잘 써질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요 그 때 마이클 아저씨가 이런 말을 합니다. '시학은 영원불멸의 시나리오 쓰기에 관한 비경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말입니다. 맞아요 기본이에요 기본 발전은 뭐 스토리텔러를 꿈꾸는 자의 몫이에요 그리고 이 말도 하시는에요 '당신의 영호능로 글을 써라' 맞아요 올인하는 겁니다.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는거에요 노력하지도 않고 좋은 결과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에요

 

근데 말입니디. 영화의 스토리텔러들의 글들이 말이에요 시학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닐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마이클 아저씨 시나리오가 잘 된 것들에서 시학의 모티브를 끌어와서 포장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냐구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유전되는 거니까요. 항상 알게 모르게 말입니다 . 후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긴합니다.  여러분들은 읽어보고 판단해보세요 닭이 먼저 일까요? 달걀이 먼저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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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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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에 대한 풍문을 참 많이도 들었습니다. 독서가



들 사이에 필독서이기도 하면서 금독서이가도 하다던 책이었습니다. 저 또한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가 항상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역시 꺼려한다는 책을 읽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입니다.


 

『인간실격』이라는 소설에 대해서 듣기만 들었을 뿐 아니죠 정확하게 이야기해보면 소설에 대해서 들은 것이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가 결국엔 자살을 했다는 것과 연관되어 회자된 이야기를 들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소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무서워서 읽지 못했다는 지인과 읽으면서 자살 충동을 느꼈다는 지인들의 다양한 반응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요조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지요. 스스로 쓴 수기의 형태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그리고 한 소설가의 윤색이 더해지죠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구효서의 『비밀의 문』이라는 책을 읽어보셨나요 구성이 매우 흡사합니다. 소설가의 소설 속에 다른 소설이 들어있는  - 여기서는 다른 일기입니다만 - 형식이었습니다.  어린시절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되어있었습니다.

 

대화체를 사용하니까 말입니다. 독자와 이야기꾼의 거리가 살뽀보를 하는 연인만큼이나 가깝습니다. 하지원의 황진이를 기억하십니까 장근석이었던가요 하지원이었던가요 '오즉여 여즉오"를 읊조리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읽다가 보면 말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 읽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기묘한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요조에게 다가가지 마세요 죽고싶음을 앓고 있는 인물이니까요. 파멸되어가는 인물이니까요. 스스로 처해진 파멸의 종지부를 향해 달려가야하니까요 요조르를 보내세요 독자들은 점잖은 양반인척 느긋하게 한 발 물러서서 걷는 겁니다. 요조의 길을 말입니다.

 

인간에게도 실격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 좀 우습기는 합니다만 그 우스움의 문제는 아마도 누가 실격을 판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지 싶습니다. 하느님이요 하느님 바쁘십니다. 수많은 유정들의 실격을 판정하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겠습니까 해도 제 시간에 걸어두어야 하고 달도 제시간에 띄워야 하고 지구도 24시간 돌려주셔야 되고 계절도 바꿔주셔야되고 말입니다. 피고낳게 만들면 좋을게 없어요 하느님 파업하시면 가끔 쓰나미에 기상이변 일어납니다. 아주 그냥 죽여줘요 그러니 인간 실격을 판정할 만한 존재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인간 실격을 판정할 수는 없다고해도 자아 실격을 판정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지요. 스스로 처해진 앓음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겁니다. 실격이라고 생각되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응당 실격된 제품은 쓰지 못하지 않스닏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요조는 그 스스로 앓아온 문제에 대해서 작 풀어나가고 있어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것인데요 저기 프랑스의 프랑스와즈 사강이었던가요? 법정에서 한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었지요  - 시간이 흘러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제목으로 김영하 씨가 이야기를 출간하시기도 한 그 대목이기도 합니다. - 스스로 점점 아래로 향해가는 요조의 모습을 보면 딱 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죽었단 말이에요 요조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는데 말씀이에요 아참 다자이 오사무는 요조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에요. 다시 한 번 오즉여 여즉오를 외쳐야 할 모양이에요. 연인과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군요. 요조도 기어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완성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지금은 요조 이야기를 하자는게 아니라 다자이 오사무 작가를 이야기하려고 하는중이니까 말이에요. 작가들 중에 자살한 사람들 생각보다 많다고 하지만 제가 아는 사람은 한 사람 정도 입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를 쓴 로맹가리 뿐이지요. 책을 읽어봤더니 죽을만 하더구뇽 기발한 이야기들을 생각해내고 써내려면 그 댓가로 죽음을 선물 받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는데 다자이 오사무하고는 또 다른 경우라고 생각해요 뭐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잊을 뻔 했군요 『인간실격』이라는 책 안에는 『인간 실격』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소』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아주 짧은 소설인데 말입니다. 꼭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유다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유다의 심리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찬 심리가 아주 잘 표현되어있어요 아주 잘 된 소설인 것 같은데 당시에는 한 소리 들었을 것 같은데요 왜 유다는 영원한 배신자의 대명사 스승을 팔아먹은 놈이리는 이미지로 전해져 내려오니까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종교신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는군요.

 

유다 유다라 그렇습니다. 어디선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직소』가 예수가 잡혀가기 전의 유다의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이라면 유다가 예수를 은 서른냥에 넘기고 난 이후의 심리 상태를 형상화한 소설이 있었더랬어요 박상륭이 쓴 『아겔다마』가 그것인데요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좋았는데 사실 다른 분들의 반응까지는 예상할 수 없어요. 개인의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말을 요즘 제 생활의 근간으로 삼고 생활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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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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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 문득 주말에 예정된 모임에서 다룰 작가가 김연수라는 말이 기억나서 김연수의 책이 있는 코너로 가서 많은 책들 중에서 한 권을 골랐다. 책이 얇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 사실 김연수 글의 또 다른 경향을 살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했다.
 

     작가의 말에 보면 제주도로 가는 배 안에서 마지막 여행의 열정을 불사르던 아줌마 아저씨들을 보면서 구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구상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다. 뭐 굳이 말하자면 팬서비스 한정판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연수 일련의 작품을 상기해보자 <꾸ㄷ바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확연히 그의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던가 < 7번 국도> < 스무살>과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김연수가 그린 사랑이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면 <사랑이라니 , 선영아>를 읽어보면 되는데  , 그냥 이야기를 살짝 해보자면 광수와 선영이와 진우의 이야기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은 없다. 광수와 결혼하는 선영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진우정도의 이야기다. 세 사람 사이에서 미세한 균열의 기류가 보이기도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광수인데 사실 이야기의 중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선영이 같아 보인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선영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라고 묻는 사람이 광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것은 김연수의 낱말의 감식안이다.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일반인에게는 생경한 말들이 지뢰의 파편쳐럼 산재해 있어서 조심조심 읽어나가다가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국어 사전 아니 우리말 사전이라도 꾸역꾸역 씹어잡수셨나하는 생각도 가지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말의 많은 어휘를 익히고 있더라도 문장과 문단 사이 필요한 곳에 꽂아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능수능란하다. 사전을 옆에 두고 읽고 싶었지만 맥이 끊어지니까 그저 읽어넘겼다. 낱말의 의미는 그 문장 안에서 족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 째 재미있었던 것은 일반 대중들에게 익숙한 대중성을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자체가 '사랑한다. 선영아'의 패러디이기도 하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얄미운 사람' 또한 다분히 대중적이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조차도 우리는 낮설지 않다. 대중적인 것을 끌어들여 시니컬하게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대중성을 끌허들여 개밸적인 이야기 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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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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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언제나 금요일일  수는 없는거다.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보면 그건 일주일 한 바퀴만 돌아보면 안다. 말못하는 아가들도 안다. 그걸 보여주겠다고 호어스트 에버스씨가 나섰다. 안단다. 유랑인은 알고 있단다. 세상이 다 금요일이면 재미없지 않을까나 호어스트 씨?

 

아저씨의 태생은 저기 독일이다. 독일에서 글을 쓰고 청중들 앞에서 낭독해 온 글들을 모았단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이 글들의 모임이 뭔지 잘 모르겠단 말이다. 요즘 흘러넘치다 못해 구질구질한 자기계발서들인지 소설인지 잘 알 수 없단 말이다. 읽는 내내 고민되는게 장르 문제였다. 창작물이니까 낭독되었으니 문학작품이라고 봐야한다면 문학작품으로 볼 수 밖에 , 장르상 소설이란다.

 

호어스트의 사소한 일상들이 일주일 간의 기록으로 진행되는데 , 좌충우돌 희희낙락 우당탕탕 일주일 살기가 아닐까 한다. 삶이 무거울 필요는 없지만 삶이 가벼울 필요도 없다. 그런데 호어스트의 띵까띵까는 독일인들의 유머에는 통할까나 한국의 젊은이들 중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유랑인에게는 불편한 유머이고 이게 뭐야 웃음을 구걸하는 억지에 가깝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건 뭐냐 유랑인은 한국사람이고 호어스트는 독일 사람이라는거 아주 별거 아니지만 문화적 차이라는 말로 뒤집으면 거대한 장벽이 된다는 것을기억해야한다. 즐기시라 즐기시라 어떻게 즐기냐고 규칙을 알고 즐겨야지 서로 규칙이 다른데 어떻게 웃을 때 웃으면서 울 때 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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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에게 - 2.0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진실한 고백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1
강신주 외 지음 / 바이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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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대한민국 서울 시청광장은 촛불의 일렁거림을 보았습니다. 국가대항전 축구 판을 응원하기 위해 2002년에 촛불을 들고 모였던 때와는 같은 촛불이었지만 외치는 소리와 담은 염원은 달랐습니다. 촛불이 할 수 있는 일이 밤을 밝히는 것 뿐아니라 작은 불시가 거대한 불길의 한 점 시작이라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촛불은 흩어져 있으면 그냥 하나의 점이됩니다. 미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만 그 손길 하나 하나가 모여들면 세상을 밝힙니다. 미약하고 영글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마치 촛불같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2008년 촛불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는 언제나 어른들의 시대가 아니라 청소년의 시대였지만 어른들이 먼저 제단하고 그 틀 속에서 청소년들이 커가길 바랬습니다만 그렇게 길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다고 본 그러한 청소년들이 일을 낸 것입니다. 『대한민국 청소년에게』는 이러한 시점에 쓰여진 어른들의 고백이며 헌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부탁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청소년에게』는 편집자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너희가 미래다라고 선언합니다. 어른들이 만들고 재단하는 사회가 아니라 앞으로 올 시대는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의 것임을 천명하는 울림입니다. 이러한 청소년들을 위해 준비한 열 다섯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인문학과 생명과 평과 그리고 2.0 시대와 시대정신이라는 세 가지 큰 갈래 아래서 말입니다

 

불쏘시개가 시원치 않으면 불은 거대해졌다가 이내 사그라들어버립니다. 청소년들이 피운 불은 활활 타오르다 꺼질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하겠습니다. 한 번의 꿈틀거림이 존재에 대한 항변이라면 그 존재의 이유를 당당히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때 피룡한 것이 인문학이 아닐까 합니다. 인문학이 뭐 거창한 것이겠습니까? 거창하게 포장을 하고 으례 그러하다라고 선입견을 가져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여기서 또 말과 글의 무서움을 생각해보게  됩니다만 그 말과 글의 무서움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굴절되어 - 인터넷이 확장이라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올바르게 확장되는 것은 아니고 약간의 변형을 가하는 것 같습니다. 나쁘게 말하는 것도 거대하게 확산되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 거대한 행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촛불의 심지가 된 것이지요 

 

상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죽고 나살자가 아니라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살자는 말이겠지요 사실 상호보완적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서로 부족한 부분을 매워서 완전한 하나가 된다는 것인데요. 지금까지 어른들의 어른들의 사회는 상생의 도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동물적인 약육강식의 도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승자독식의 사회입니다.나만 아니면 되었고 나만이 최우선이었습니다. 이기주의적 시선에서 벗어나 나 아닌 것에 시선을 둘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세상을 짊어질 청소년의 몫입니다 

 

산업이 기계가 시대를 지배하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줄기차게 쉬지 않고 재화와 공산품을 숨쉬듯 찍어낸 시대입니다. 문명이라는 이름과 발전이라는 이름 앞에 모든 것이 줄을 섰습니다만 원래 있어왔던 것들에 대해서 무뎌지게 마련입니다. 좀 서툰 비유입니다만 기생들의 치마폭에서 노닐다보면 본처 생각이 잘 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이제껏 파고의 대상이었던 자연과 환경이라는 것을 돌아보아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파괴되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지키고 보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문명의 이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겠습니까? 앞으로의 시대는 물질의 시대가 아니라 환경의 시대입니다. 물질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 사는 것이 문제인 시대입니다. 앞으로 자라날 청소년의 시대는 환경의 시대입니다. 파괴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입니다. 상생의 대상입니다.

 

이론이 무장이 되면 이제는 실제투쟁에 뛰어들 차례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그 실제의 성과를 보았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거리에서 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직되고 선전되고 폭발하던 시대의 시위가 아니라 함께하는 놀이문화로서의 한 장면입니다만 권력자들의 눈에는 앞으로 치나 뒤로 치나 시위일 뿐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어른들은 걱정을 하세요 뭘요? 학교 수업 빼먹으려고 촛불집회에 나온다고, 아무 개념없이 집회에 나온다고 말입니다.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송합니다만 무개념이 지배하는 개또라이들입니까? 청소년 여러분 좀 억울하시지요.. 그렇다면 보여주는 겁니다. 그 개또라이들이 어떻게 세상과 사회를 바꾸는지를 말입니다. 아프올의 시대는 여러분의 것입니다. 상생의 도를 상대성을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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