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이야기 - 일제시대의 대중스타 살림지식총서 294
신현규 지음 / 살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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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텔레비전을 켰다. 아주 오래된 습관인데 혼자 밥 먹을 때는 항상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요즘 <해운대>로 흥행몰이를 하고 있는 하지원이 출연한 '황진이'의 한 장면이 지나간다. 행수 기생 백무가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고 , 황진이가 백무가 가는 길에 정제된 춤사위를 보이는 장면이다.  눈물이 났다.
 

  기생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양반들 옆에 앉아서 술 따르고 웃음을 파는 이미지가 아마 대부분일 것이다.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기생은 부정적 이미지가 정형화되어 나타난 형태다. 물론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팔았지만 , 그녀들이 기생의 전부가 아니라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시조창을 하는 기생들도 있었다. 기생이라는 이름은 술을 따르고 웃음을 파는 부류에게 돌아가야 할 이름이 아니라 전통문화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전승에 관련된 1 패와 2패에게 돌아가야할 칭호다.

 

  <기생 이야기>는 여러 시대의 기생들 중 봉건 사회와 근대 사회의 변혁기에 있었던 조선 기생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통 문화의 계승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대중 문화의 선두자로 살아야 했던 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통문화에서 대중 문화로 내려서면서 기생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대중 스타만이 그 자리를 매웠다. 일제 시대에 명맥을 유지하던 권번과 기생들은 광복 이후 자취를 감추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것 같다. 권번은 연예 기획사가 되었고 , 기생은 연예인이 되었고 그들은 대중들을 상대로 이미지를 팔아 연명한다.

 

  기생은 조선 후기에 생겨나 근대 초기에 사라진 집단이 아니다. 기생의 연원에 대해서는 이능화 선생의 <조선해어화사>를 살펴보면 된다. <조선 해어화사>는 통시적으로 본 기생의 연대기라고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기생에 대해 잘돗된 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 말하는 꽃 , 기생>이다. 이 책은 한국의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이 일본인의 문화 시선에서 기생을 풀이한 것이어서 비판되어질 점들이 많다.. 또 기생에 대해서 한국인들의 잘못된 시선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보려면 <노름마치> 1권을 보면 알 수 있다. 쇄락한 해방후의 기생의 말로를 보고 싶다면 <신기생뎐>을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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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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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콩코드 마을에 있는 호수 이름이다. <시민 불복종>으로 알려진 소로우가 월든이라는 호수가에서 집을 짓고 산 기록이다. 표면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다.  1년 동안의 일들을 여러가지 주제로 나누어 서술했다.
 

  <월든>을 읽으면서 소로우라는 사람이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잘나갈 수 있는 학벌이었지만 그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육체적 노동을 신성시하며 평생을 살았고 , 월든 호수에서 통나무집을 지어 살면서 스스로 선택한 유폐 혹은 유배의 삶을 시험- 여생을 월든 통나무 집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약 2년 정도 기거했다. - 하기도 했다. 스스로 유폐한 삶 속에서 외면이 아니라 내면으로 깊게 빠져들어간 삶을 살았다. 그의 이런 삶은 서양 철학이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철학이 근간이 되었다. <월든>을 읽어보면 소로우 선생이 서양인인지 동양인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인도와 중국 고전에 해박했다.

 

  소로우 선생이 쓴 글은 일종의 체험기다. 월든 호숫가에서 삶을 기록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연에 대한 소로우 선생의 기술이다. 뛰어난 문체로 자연을 묘사했다. 한 장면 한 장면 아름다운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자연에 대해서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소로우 선생이 언급한 많은 나무들과 새 , 동물들은 어쩌면 지금 현재 그 땅에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소로우 선생은 자연에서 가장 최소한의 것을 취하고자 했다. 많은 것을 가져야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것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설파한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오래된 미래에서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들려주었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소로우 선생이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19세기의 삶을 살았단 소로우 선생의 혜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시대를 앞 선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데 소로우 선생의 저작도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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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 - 영화광 가네시로 가즈키의 열혈 액션 드라마
가네시로 카즈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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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끝나고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 , 타인들은 잠에서 깨어날 무렵 나는 잠들지 못했다. 가만히 누워서 잠을 청해야하지만 몸을 움직일 기력도 없어서 그저 틀어놓은 텔레비전을 리모컨을 덜리는 리모컨 놀이를 했었던 적이 있었다. 설핏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 중에 경호원이 흔히 하는 장면인 귀에 이어폰을 끼고 서로 교신하며 주위를 살피는 장면을 보았다.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엇는데 < SP >의 한 장면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여서 - 난 몸을 움직이는 액션물이 좋다. 드라마나 로맨스는 손발이 오그라들고 심장이 뛰어서 잘 못 본다. 아니 보지 않으려고 한다. 죽을 것 같아서 - 좀 볼까 했더니 금새 끝나버린다. 테러 용의자를 먼저 제압하는 경호원들이었다. 의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테러를 일으키지 않은 용의자를 제압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설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흥미로워졌지만 20여분 만에 끝나버렸고 새벽을 지세우면서 기다릴 효용성을 따졌을 때 별로 효용성이 없어 기억 속에서 지워져갔다.

 

  우연한 기회에 다시 <SP>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 이것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저작인 것을 알았다. 게다가 시나리오였다. 가네시로 가즈키는 우리나라에 김수현처럼 시나리오를 전문으로 쓰는 작가가 아니라 <GO> <레볼루션 너머 3> <프라이 데디 플라이> <스피드> 등으로 알려진 소설가다. 취미가 액션 영화보기인데 이번에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할 기회가 있어서 <SP>를 집필한 것으로 알려졌다.

 

  페이지 수가 많았지만 시나리오 특성상 쉽게 읽혔다. 지문과 대사들의 조합이었다. 보이는 것과 글은 어떤 보이지 않는 간극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글로 서술된 문장이 주는 무한한 상상력에 기반을 둔 이미지들은 보여지는 것이라는 시각적 한계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시각이라는 함계 범위 내에서 재탄생할 수 밖에 없다. 재탄생된 구현화된 이미지는 다시 원 이미지인 문장과 비교되면서 문장들은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비루한 문장이 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함에 처하게 된다.

 

  가네시로 가즈키는 스토리 텔링을 하면서 각주를 달아 놓았다. 깕끔하지 못한 각주 처러였다. 시나리오 진행과 제반적인 상황 혹은 관련 자료들에 대해서 서술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들을 서술해두었다. 읽다가 보니 가네시로 가즈키가 자신의 팬들에게 사적인 감정을 내보이는 팬미팅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들이 각주를 달고 있었다. 대한민국 김수현 선생이 가네시로 가즈키의 시나리오를 본다면 글쎄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시나리오와 소설은 같은 글로 이미질르 구현화하는 작업이지만 한 작가의 두 장르를 읽으면서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너무나도 보편적인 결론에 이른다. 가네시로 가즈키는 그냥 소설이나 썼으면 좋겠다. 소설은 장면을 묘사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동화하고 인물과 독자의 싱크로율을 높인는데 시나리오는 그렇지 못하다. 문장과 이미지들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연기라는 구체화된 시각화를 통해 대사와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니 시나리오와 소설은 천양지차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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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도 너무 길다 - 하이쿠 시 모음집
류시화 옮겨엮음 / 이레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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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전공 시간 <시가론> 시간에 선생님이 시를 이야기하시다가 일본의 하이쿠에 대해서 하이쿠만큼이나 짧게 설명을 하고 넘어가셨다. 그게 하이쿠라는 장르를 처음 접한 최초의 기억이다. 요즘 공고에 춤을 글로 배웠다는 광고가 있는데 , 문학 작품을 정말 글로만 배웠던 시기였다. 그 때는 관심도 없었으므로 다시 만나게 될지도 그렇지 않을지도 알 수 없었다.
 

  다시 내 기억의 저편에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정원사의 서평 때문이었는데 정원사의 서평을 읽다가 다시 하이쿠라는 단어를 마나게 되면서 대학 때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올해 초 가까운 곳에 교보가 있어서 들릴 일이 많아졌을 때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 한 줄도 너무 길다>를 발견했다. 하이쿠의 이론이 아니라 실재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었지만 , 교보에서 외부로 반출을 허한다는 도장을 찍고 붙여준 띠지를 봉인처럼 꽤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잇었따. 어제 읽힐지도 모르는 띠지도 떼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면서 시간은 직선으로만 하강했다.

 

  대학 때 시인론 수업을 할 때 였다. 권 선생님께서

 

"시는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쓰는 것이고 , 소설은 할 말이 적은 사람들이 쓰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잊혀지지 않는 한 문장이 되었는데 , 이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흘러나온 말이라고 하니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잠깐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소설을 읽고 느낀 것보다 잘 써진 시를 한 편 읽고 받은 느낌이 더 강렬하고 많은 것을 지배하기도 했다.

 

  시라고 하면 최소 세 줄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 정서다. 아마도 한시의 정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현대를 거치면서 점점 길어져서 산문시의 형태를 만드릭도 했다. 길어져서 좋은 것도 있지만 역시 시는 짧은 문장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녹여내어야 제대로 된 시다. 괜히 운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세 줄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내기가 힘들 것 같은데 한 줄 달랑 한 줄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연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장르가 일본에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하이쿠다. 말장난이지만 하이쿠를 읽으면서 어이쿠하면서 무릎을 치게도리지도 모른다.

 

  하이쿠는 일본 히라가나를 기반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하이쿠가 의미의 전달만이 아니라 읽히는 맛이라고 할 수 있는 운율도 있었을 것 같은데 - 흔히 랩에서 말하는 라임이라고 하나 하여튼 운율 - 원문을 같이 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 문장을 실고도 많은 여백이 남아있었기에 그 여백에 잡념이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하시길 - 일종의 찬미이고 깨우침인 글들이 많았다. 자연에 대한 찬미이며 , 인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깨우침인 글들이었다. 길게 말하기는 쉬워도 짧게 말하기는 힘들다. 정확히 쭉정이를 빼고 알맹이만 가려내서 문장을 만드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이 재미없고 지치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 있으면 한 번 꺼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잊고 있었던 나 이외의 외부와 내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통찰이 한 문장 안에 드러나 있으니 다시 정체된 것들을 부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저기서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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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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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 유랑인입니다. 또 왔습니다.
 

  찔레꽃도 다 지고 입추도 다 지났건만 기온은 청량하지 못하고 부는 바람은 뜨겁기만 시간이 계속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여름이니 더위를 견뎌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겠습니다만 견디기 보다는 피해서 피서를 가고 휴가를 가는데 말입니다.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흥겨운 휴가도 있을테지만 좀 조용한 휴가를 보내도 좋다는 생각을 해보는 요즘입니다. 책을 읽는 자들에게 조용한 휴가라는 것이 책을 느긋하게 읽어보는 것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여름이니 시원한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을 읽으면서 수박 한 덩어리 잡수시면서 얼음물에 발 담구어 두면 제법 즐길만한 독서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잡고 읽게 되었습니다. 부제가 아마 도양 고전 독법인 것으로 압니다. 동양 고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갑갑함이 제법입니다. 오래된 글이고 게다가 동양 고전이니 한자라로 쓰여있고 한문을 기반으로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는데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피하려고 했으면 피해갔었겠지요 사실 그렇게 도망 다닌 시간이 반 년은 족히 되어 보입니다.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만 읽는 법을 다르게 하면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설핏 맛보아본 동양 고전은 - 맛본다고 한 것은 통독은 하지도 못하고 이름만 들어본 것도 있고 조금 읽다가 팽캐쳐버린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 텍스트는 고정되어 있으나 그 텍스트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는가에 따라 무궁한 의미로 파생되어 본질은 하나이나 쓰임은 여럿인 것으로 변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소개하는 동양 고전 독법은 인간 관계론입니다. 즉 시경 서경 초사를 시작으로 주역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는데 이런 고전을 관통하는 축이 바로 인간 관계론입니다. 인간 관계론에서 논의는 과거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 훈고학적 입장은 아니라는 말씀이겠습니다만 - 과거로 현재를 다시 반성하는 것이겠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를 고전에 빗대어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고전이 고전일 수 있는 명분을 얻는 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특히 사상을 언술한 고전들은 더 그러해야 합니다. 과거에 머물러 그 시공간에서 소용이 다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달통할 수 있는 것이 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전의 힘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영속성에서 확인되는 현재성입니다.

 

  제가 재미있게 본 장면은 시경 서경 부분과 주역 묵자와 한비자 정도입니다. 다른 것을 흥미 없이 봤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우매하여 다른 것들은 허명이라도 들어 보았으나 아직 접해보지 못한 것들입니다. 묵자의 경우 겸애와 반전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전국의 시대에 반전을 이약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아직 묵자를 만날 용기가 없습니다. 차일피일 미루게 될 바에야 미친척하고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만 집에 있는 다른 공자니 맹자니 주역 장자 도덕경부터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이 또 다른 책을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니요 참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자 옥편을 준비했습니다. 아마도 이제 점점 책 이야기하는 기간이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아침 - 잠을 못자서 밤을 꼴딱 세우고 지금 이시간 자보려고 자판을 두르리고 있습니다. - 주절거린 유랑인 이만 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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