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꿈 - 오정희 우화소설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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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돼지꿈』이 출간된 지 한 해가 지났다. 오정희의 글은 대한민국에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거쳐야 하는 작가라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오문과 비문이 없는 작가로 유명하다고 내가 만난 지인들은 말했고 그 중에는 오정희의 문장을 경외하는 이가 제법 있었다. 경외 받는 이의 문장을 읽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두렵다. 등허리에 식은 땀이 흐른다. 오정희의 글을 외면하면서 삼백 예순 날에 가까운 시간을 근근히 버티다. 며칠 동안 처참하게 무너졌다.

『돼지꿈』은 우화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이솝우화’에서 ‘우화’에는 동물이 등장한다. 동물에 빗대어 인간사를 이야기하는 것이 ‘우화’라고 배웠다. 오정희의 우화소설에는 동물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야기이고 사람이 사는 이야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동물의 한 종류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야기도 우화이긴 했다.

오정희가 쓴 것은 사람이 사는 이야기다. 특별한 이야기 혹은 과하게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주변까지 돌아보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이야기다. 평범한 이야기는 담담하다. 담담하게 흐르는 것은 고요함을 지나 침묵으로 접어든다. 거대한 침묵은 수 많ㅇ느 의미를 내포한다. 어떤 의미를 읽을지는 독자의 몫이다. 소설읽기의 잡스러움이다.

『돼지꿈』은 삶의 편린 혹은 그 기록이다. ‘몹쓸 사랑의 노래’ ‘마흔에 다시 쓰는 일기’ ‘이 웬수 같은 나의 가족’ ‘세상이라는 놀이터에서; 4개의 작은 꿰미 안에 소소한 이야기들로 채워진다. 가각의 편린에서 평범한 일상이 삶이라는 것이 아닐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오정희는 47년 생이다. 60년 이상을 살았다. 인생은 60부터라는 풍문을 들었는데 그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오정희는 인생을 한 바퀴 돈 것이다. 새로울 것이 없다. 오정희가 풀어낸 꿰미의 이야기에서 인생사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다른 것들이 등장하더라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정교한 변주된 이야기들이다. 변주된이야기들이 세상사이고 소설이고 이야기다. 이러한 것들은 겪으며 살아보면 알게 된다. 젊은 것들은 아직 내공이 조금 모자란다. 다 살고 나서 생각해볼 일이다.

23

『돼지꿈』밑 줄 긋기

●아이들은 우리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오. 또 아이들은 우리의 실패를 보상받기 위해 주어진 두 번째 기회가 아니오 자식들에게 일등을 하라고 몰아대는 우리 자신의 숨은 동기에 대해서 분석하고 반성하는 일도 필요하오 (69)

●‘주색잡기 를 한데 묶어서 한 단어로 쓰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안다. 진짜 술꾼이라면 결코 ’주‘와 ’색잡기‘를 병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술꾼 마누라 십여 년에 얻어낸 결론이다.(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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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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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김영하 , 문학동네 , 2007)

김영하 씨의 『퀴즈쇼』를 읽고 혹시나 해설가들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금단의 열매인 - 나는 해설을 잘 읽지 않는다. 글맛만 버린다는 편견을 서른 세 해째 정성스럽게 기르고 있다. - 해설을 읽어보았다. ‘퀴즈쇼’가 성장소설이라고? 알 수 없는 말들이 가득하고 생경한 이름과 이론에서 불려나온 낱말들이 불려나와 사역(使役)했다. 던적스러운 일이다.

사실 김영하 씨의 말대로 컴퓨터 세대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만하긴 했다. 컴퓨터 피씨 통신 , 인터넷 카페 채팅을 한 번이라도 해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퀴즈쇼』를 읽을 때 모한한 동질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김영하 식의 시니컬한 송가(頌歌)다. 2007년에 출간되었던 『퀴즈쇼』는 2년이 지난 이후에도 유효하다. 유효하다 못해 발효되어 청국장처럼 진하고 강렬하기까지 하다.

민수는 외할머니인 최여사가 죽으면서 가정이라는 최소의 울타리에서도 내쳐진다. - 나는 사실 민수는 초등학교 입학식 날 외할머니가 어민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가족이라는 기본 단위에서 내쳐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 유일한 보금자리마저 곰보빵 아저씨에게 최여사의 빛으로 넘겨버리고 기거할 곳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이 대목에서 내가 떠 올리는 것은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의 주인공이다. 책으로 침대를 만들어 생활하다가 책이 생활비의 대용으로 사용되는 장면을 기억하는데 , 『퀴즈쇼』에서는 최여사의 책들을 팔아 고시원 비를 마련한다.

현실에서 유기당하고 스스로 유폐되면서 , 현실이 아닌 현실 혹은 가상의 세계에서 ‘벽장 속의 요정’과 만나고 가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도 연인의 관계로 발전 된다. 벽장 속의 요정이 벽장을 나오면서 서지원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롱맨과 벽장 속의 요정이 아니라 민수와 지원이 되는 순간이다. 하루하루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순간에 환상과도 같은 퀴즈 회사에 취직을 하고 그곳에서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 퀴즈를 풀면서 돈을 번다. 내쳐진 세계 속에서 비루하고 남루하고 남세스러운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다. 자기의 능력만 되면 돈을 벌 수 있는 세계다. 어떻게 보면 유토피아적 세계처럼 인식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단절되었다. 또한 퀴즈가 퀴즈 본연의 것이 아닌 도박으로 변질된 것을 알 수 있다 가상은 명멸한다. 명멸하다가 적막으로 떨어진다. 회사와 소석된 사람들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꿈같은 일이 벌어진다. 컴퓨터를 매개로 해서 알게 된 것들은 적막 속으로 사라져 갔다. 겨우 남은 것이라고는 지원 하나 뿐이다. 지원과의 관계도 영원할 것인지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다.

“잘 될 거야 모두 잘 될 거야”라는 지원의 말로 소설은 닫힌다. 대책 없는 긍정의 말이다. 무책인한 언사는 허공으로 심연으로 흩어진다. 젊은이들은 알 수 없는 오늘을 알며 불확실한 내일에 기대어 꿈꾼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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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레바이 - 십자가를 만든 어느 목수의 고백
E.K. 베일리 지음, 선경애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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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도 모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목수 레바이』, (E.K 베일리 , 성경애 옮김 , 가치창조 , 2008)에 대해서 말하기




1000년의 시간이  두 번 되풀이되기 전에 - 태왕사신기의 패러디다 - 유대인의 땅 어디선가 나사렛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한 것 같다. 하여간 그곳에서 한 인간이 태어났다. 인간이 생명을 얻고 죽음을 얻어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 이 아이가 다르다면 다른 것이 있다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졌고 동방 박사의 예방을 받았다고 하는데 들리는 풍문에 동방박사는 묵가의 제자들이라는 풍문도 있기는 하다.




그는 서른 세 해를 살다가 죽음을 당했다. 선택된 죽음이 아니라 강요된 죽음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이어도 슬프고 인간이 아니어도 슬프다. 생각해보라 인가의 수피(獸皮)를 입고 인간으로 살다가 인성을 벗고 신성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으로 영원을 이루어내는 성취는 어떤 의미에서는 허무하다. 허무함을 위하여 서른 세 해를 산 젊은이는 원망과 저주를 풀어내지 않고 저들의 죄를 사하여달라고 죽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까지도 대속(代贖)하며 죽었다.




예수는 십자가형을 당했다. 열사의 땅에서 십자가형이란 얼마나 무지막지한가? 십자가에 고정하기 위해서 쳐진 못은 살과 뼈를 뚫었고 관통한 것에서는 어김없이 피가 흐른다. 천천히 흐른다. 피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만큼 빠져나간다. 목마름과 갈증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을 십자가는 지탱하고 있다. 뜨거운 열기도 흐르는 것을 막지도 못하도록 지지하는 것이 십자가다. 그렇다. 십자가에 예수라는 인간이 매달려 죽지 않았다면 후세에 교회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쓰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밤을 밝히는 붉은 십자가는 그날의 멈추지 않는 피와 아직까지 죄를 짓는 사람들에 대한 대속(代贖)의 핏방울일지도 모르겠다.




예수가 죽을 때 , 비웃었던 사람 못을 쳤던 사람 창으로 옆구리를 지른 사람 십자가를 만든 사람 등등  자신들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한 사람들도 어찌 보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를 짓는 것이 된다. 『목수 레바이』는 로마군에게 십자가를 만들어 판 자이다. 죄 없는 젊은이 예수가 죽을 때 자기가 만든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보고 회계한 사람이다. 그 사람의 고백이며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짧은 고백과 독백은 아픈 삽화들과 곁들여져 울림은 예리하며 둔중하다.




서른 세 해를 살았던 예수는 물화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며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부활했다고 그들의 경전에 전한다. 그의 등에는 이제 십자가가 없다. 인간은 죄의 대속을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아직도 인간들은 천국을 갈구하며 지옥을 경계한다. 현대의 인간들은 물화된 십자가를 지지는 않는다.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물화되지 않은 극대이면서도 극소인 십자가를 마음속에서 키운다.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스스로는 처절하게 느끼거나 애써 외면하는 십자가다. 나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다. 너와 나는 죄인이다. 우리는 죄인이다. 죄의 속박을 벗을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다. 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니 덧정 없다. 그만두기로 하자 .




 




091229 유랑인 쓰다







목수 레바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




하나 언젠가 예수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을 소재로 한 소설 ‘롱기누스의 창’(황매 출판사)이라는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또 예수의 유전자를 살려낸다는 설정의 ‘신의 유전자'라는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고 , 다빈치 코드에서는 예수의 혈족이 현대에도 살아있다는 설정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안다.




둘 박상륭의 소설 『칠조어론』의 어는 주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골고다 언덕의 비의를 골고다 언덕을 여성의 성기로 십자가를 남성의 성기로 상징화하고 골고다 언덕을 죽음과 생명이 같이 공존하는 곳으로 해석한 것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적확한 것인지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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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의 눈을 달랜다 - 제28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60
김경주 지음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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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의 눈을 달랜다』(김경주 , 민음사 , 2009)에 대해서 말하기


『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 대한 기억이 좋았던 터라 선택하게 된 『시차의 눈을 달랜다』. 詩는 사실 개별이며 개별의 사유 속에서 완전하므로 개인의 시가 타인의 시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없다지지만 선택할 때 알 수 없는 것들이 작용하기는 한다.


젊은 시인의 시세계를 엿보는 것 , 절시(竊視) - (훔쳐보는 것 - 독자들은 어쩔 수 없는 도둑이고 사기꾼이다) -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오독(誤讀)이다. 오독은 피할 수 없는 독자의 선택이며 권리이다. 시세계에 대한 이해는 전문 해설꾼들에게 맡겨두자 - 그들도 밥은 빌어먹고 살아야하지 않는가! - 나는 그저 읽은 느낌이나 말하자. 시인의 내면을 관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쓴다. (뭇매를 피해가는 핑계다. 때리면 맞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미 체득하고 있으니 맘대로 해라) 시인이 짜놓은 정교한 시틀에는 어떻게 훔쳐보는 눈 하나 박아두기.― 내 내면에 죽어서 시들어가고 있던 유랑인 잡설투‘의 감당할 수 없는 혼백이라도 세를 내어 내 것으로 부리기 전에는 힘들지 싶다.― 쉽지 않다


김경주의 시는 ‘새 , 눈 ,나비, 문 , 피’등의 시어들이 지배하는 세계처럼 읽힌다. 물론 그의 시에서 ‘시차’를 빼두면 훔쳐보기가 힘들어질 듯도 하다. 나는 시인의 시가 새와 나비의 날개에서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새와 나비 혹은 날개 가진 것에게서 전해지는 시어들이 시인의 눈을 통해서 다양한 문으로 피에 전해진다. 피와 교접(交接)교접하는 것은 새와 나비다.


‘귀 먹은 새가 와서 돕는다’로 끝나고 시작하는 시 편들 ( 질감 , 질감 2) ‘내가 책장 사이에 접어놓은 나비는 모두 돌림병을 앓다가 물 묻은 색종이가 된 것’ 같지만 ‘그건 자다가 깨어나 입술 속에서 흘러나오는 나비 한 마리 살며시 집에서 침대 밑으로 몰래 다시 날려 주던 그 밤의 백기(白旗)’이며 ‘나비의 폐에선 시 냄새가 난다’고 쓴다.


김경주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차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차이이며 사이인 시간이다. 사실 나는 김경주 시를 읽으면서 그 사이에 전혀 다른 시들을 생각호고 읽었다. 시들의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시들의 세계다


김경주의 시에는 가늠할 수 없는 균열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시인에 의해서 호명당하고 새롭게 규정되어지는 의미는 세계와 이질적이다. 이질적이지만 김경주라는 개인 혹은 좁기도 하지만 거대한 우주에서는 완전하다. 완전한 세계의 이질적 만남은 균열을 야기한다. 균열은 차이이고 사이이고 시차(時差)이며 시차(視差)다. 김경주는 시로 만든 세상에서 사유하는 시어의 성주다. 성주는 모든 시어 위에서 시어들의 조공을 받아 부족함이 없는 문장을 꾸리지만 견고해서 외부와 스스로 단절되어가는 쓸쓸한 성의 성주다. 어떤 것을 부리는 자들은 천형(天刑)처럼 외로움 고독함을 쌍생처럼 달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성주에게 조공을 바치는 시어들은 ‘오한에 걸려 누워 있을 대마다 머리맡에 놓인 숲 , 한 사람이 죽으면 태어날 것 같던 구름’이기도 하고 ‘구름은 어느 쪽이건 죽은 자의 머리칼 냄새가 난다’(연두의 시제)고 쓴다. ‘어떤 단층을 보면 나비의 상여가 된 바람이 있다’(바늘의 무렵)는 것을 알고 ‘아침에 죽은 나비의 폐에선 시 냄새가 난’(나쁜 피)다고 쓴다. ‘한번도 자신의 무덤을 가져보지 못한 모래들이 무수한 무덤을 만들어 내는 노래는 무섭고 서글픈 동요에 가깝’고 ‘인간을 닮은 문장은 수의를 여러 번 바꾸었지만 모래를 닮은 문장은 모든 것들에게 수의를 입힌다’(모래의 순장)고 쓴다. ‘이 꽃말을 잊어버릴 때 꽃에서 벗어난 꽃말은 수증기가 되리라’고 선언하고 ‘손가락과 황혼이 가장 닮은 시간에 구부러질 때 노트의 가운데에 꽃의 비문을 시작했다. 그가 오늘 자신의 시에게 보낸 꽃의 조사는 이러했다’고 썼다.(꽃의 현기증)


『시차의 눈을 달랜다』는 말을 되뇌어 본다.‘시차’를 인식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밀려오는 낱말은 외로움 , 쓸쓸함 , 고독함이라는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형용사에서 파생한 명사들뿐이다. 의미의 경계가 모호해지려는 찰나 ‘~ㅁ’은 의미를 한정한다. 시어를 부리는 성주인 김경주는 쓸쓸하고 외롭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차를 인식한 시인은 천형처럼 그것을 견딘다. 말하지 못하고 ‘그 때 기별은 , 점집 무녀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 보는 거’(개명(改名))다. 그저 달랜다. 달랠 뿐이다.


‘이 시를 보는 자는 현기증이 하나의 육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시를 만진 자는 그 육체를 갖게 된다’(꽃의 현기증)고 쓴다. 나는 보기만 해서 현기증만으로도 아찔하다. 아찔해서 어떤 것이 진상(眞想)이고 허상(虛想)인지 종잡을 수 없다. 언제 시의 육체를 가지게 될지 그저 아득하다. 아득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아찔하여 중언부언하기만 하니 그만 말하기를 그만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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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리지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3
이중환 지음, 허경진 옮김 / 서해문집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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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걷는다. 구획된 도로는 차들이 달린다. 차가 멈추면 사람이 길을 건너고 차가 지나면 사람은 멈추다. 큰 길 양 쪽으로는 고층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아파트에 사람들이 모여 산다. 마을을 이루고 살던 사람들이 아파트에 모여 산다. 아파트가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위락시설이 들어서고 살기 좋은 곳이 된다. 도시에서 수평인 마을은 없어지고 수직인 마을만이 존재한다. 언제 아래로 침강할지 두렵다. 함께 사는 마을은 없어지고 , 사람들을 짓누르는 마을만 있다. 사람이 편안히 한 평생 살만한 곳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택리지>를 읽었다. 이중환이 쓴 글이다. 사화 때문에 관직에서 멀어지고 전국을 유랑하고 쓴 <택리지>는 사대부가 살만한 곳을 찾아내기를 바라면서 쓴 글이다. 중환은 30대 이후에 전국을 떠돌다 60이 넘어서야 신원이 회복된다. 늙음 , 죽음 앞에서 신원이 회복되는 것은 늦은 감이 있다. 이중환이 품었던 풍운의 꿈들은 이미 식어 그 자취조차도 찾을 수 없다. 신원이 회복되고 3년이 지난 후에 이중환은 죽었다. 죽어서 <택리지>가 세상에 남았다.




  사대부가 살만한 곳이 없다는 이유로 조선 영조 시대를 살았던 < 택리지 >의 저자 이중환은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사람이 살만한 마을 ,사대부가 살만한 마을을 찾아 다녔다. 진정 사대부가 살만한 곳은 어디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택리지>는 채워져 있다. ‘팔도총론(八道總論)’편에서는 조선 팔도의 개략적인 지세와 물산을 기록했다.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 복거(卜居)의 기본 조건인 ‘지리(地理)’‘생리(生理)’ ‘인심(人心)’ ‘산수(山水)’에 대해서 기록했다.




‘필도총론(筆道總論)’에서 이중환의 서술은 군더더기가 없다. 산맥을 따라 내리 달리다가 들판을 만나면 평평하게 내달렸다. 때로는 치솟았다가 주저앉았다. ‘평안도’에서 ‘경기도’까지 내달리는 발걸음은 떠돌아다니는 자의 마음과 같이 무겁지도 않고 분분하지도 않게 보이는 것을 보고 보이는 것을 서술하였다. 한 가지 눈여겨 볼만한 것은 쌀의 생산뿐만 아니라 목화의 재배가 가능한 지역인지를 확인한다는 점이다.




  사람은 죽고 책만 남았다. 그의 언어는 산맥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고 산맥이 이어지고 끊어짐과 함께 했다. 문장은 길 위를 유랑해야하는 나그네의 봇짐처럼 단촐했다. 단촐해서 고졸했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읽으면서 나는 불현듯 난세를 배에 의지해 바다에서 보내야 했던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순신의 문체를 생각했다. ‘장독을 묻었다.’ ‘장수를 베었다’라고만 적어서 , 무미하고 건조한 문장 - 지금 내 곁에 <난중일기>가 없어 명징하게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깝다  내 방이 그립다..- 이지만 과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은 기술(記述)이었다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는 군더더기 없음을 버리고 자신의 생각을 문장 속에 풀어낸다. 문장이 조금 탁해졌다. 가장 치명적인 탁함은 ‘인심’을 설명하는 단락에서 총론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고 ‘인심’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넓게 생각해도 ‘사람의 마음’과 ‘당쟁’은 서로 연결될 수 없다




  이중환은 사대부가 살만한 곳을 찾아 나섰지만 사대부가 사는 곳치고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은 없다. 당파를 만들어 죄 없는 자를 거둬들이고 권세를 부려 평민을 침해한다. 자신의 행실도 단속하지 못하지만 , 남이 자기를 노하는 것은 미워하고 모두 한 지방의 패권 잡기를 좋아한다. (다른 당파와는)한 고장에 함께 살지 못하여 , 마을끼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헐뜯는다.고 쓴다. 팔도에 사대부가 살만한 장소는 몇몇 보이지만 , 사대부가 살면 인심이 고약해져서 , 사대붑 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살기 힘든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조선 팔도 어디에도 사대부가 살만한 곳은 없다. 사대부이고자 했던 이중환이 편히 정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이중환은 오랫동안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았다. 떠돌다가 63세에 죽었다. 그는 죽어서 택리지(擇里志)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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