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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용도 (양장)
니콜라 부비에 지음, 티에리 베르네 그림,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6년 7월
평점 :
맨 첫 장을 펴보니
"가서 살든지, 아니면 머무르다가 죽든지 하련다."-세익스피어
가 보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여행의 낭만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떠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눈에 확 들어오는 그런 문구아닐까 싶은데요.
화가인 티에리와 작가인 니콜라 부비에, 즉 이 책의 저자인 나에게는 9주일을 살 수 있을만큼의 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시간만은
넘쳐났다는데요. 그래서 그들은 여행에서 다른 일체의 사치를 거부하고 오직 느림이라는 가장 소중한 사치만을 누리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계획없는 느림이 주는 멋과 청년의 패기, 언제든 달릴 준비가 된 낡은 자동차와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의 재능만 가지고 하는 짧은
돈벌이로 다시 떠날 준비 완료 라는 여행의 참 맛 그대로를 상상하게 하는데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낯선 장소로 계속 떠나는 낭만적 여행이 아니라, 낯선 마을 사이에 파고드는 삶속으로의 여행을
택합니다. 그리고 경치도 말해주긴 하지만 자신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그 곳의 사람들은 어떤지 더 자세히 바라보구요. 1953년 6월
제네바를 시작으로 1954년 12월 카이바르 고개까지의(물론 카불에서 둘이 헤어지긴 합니다만...) 이야기는 먼지와 사람, 고생이 함께하는
여행이 어떤것인지, 자신을 내던진 위험과 외로움을 견뎌야하는 시간이 사람을 어떻게 변하게 만드는지 상상하게 하며 그 당시 사람들과 나라끼리의
애증 관계, 뭐든지 허술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라고 생각되는 시대를 보여줍니다. 남의 일에 상관않고, 또 신분이 정확해야
다른 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지금이라면 그들이 여행을 마치지 못했을거라는 생각이 당장 드는데요
"그리고 내가 지금 이 순간 이 세상에 있다는 게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또 뭐가 만족스럽지? 하지만 이 정도로 피곤할 때는 아무 이유없이 낙관론자가 되는
법이다."-158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 시간까지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내가 선택한 느림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주어진 느림이라면 속터지지 않을까란 생각과 달리
그들은 가끔 찾아오는 새벽 시간에의 한가로움과 아름다움에, 예상밖으로 갑자기 해결되는 일에도 만족이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아무리 읽어봐도
울고만 싶을거 같은 순간인데도 말입니다. 자신들의 우편물을 우편국장이 직접 주고싶다하니 그가 올때까지 날을 바꿔가며 기다리는 게
당연하고, 고생해 써놓은 원고가 사라지는 일도 가끔 있는 일이니 그리 속상해 할 필요가 없는 일이고, 자신들의 낡은 자동차까지 실어주겠다는
호의에 얼른 타게 된 트럭이 사실 자신들의 차보다 더 위험한 차였다는 걸 알게 되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존재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가족도 아니고, 일도
아니고,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생각도 아니다. 사랑보다 더 평온한 초월적 힘에 의해 고양될 때의 순간이 내 삶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삶은 그같은 순간을 인색하게 나누어준다.-187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겪으면서 변해가는 자신이 만족스러웠는지 니콜라 부비에는 그 후로도 많은 여행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여행으로 세상일은 자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과 남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위기도 잘 넘긴다는 걸 알게되지 않았을까 싶고,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일상도 새로운 여행의 시간이 되지않을까 싶긴 합니다. 매번 힘들고 아프고, 그럼에도 다른 곳으로
떠나길 선택하는 그들의 열세 가지 사실적인 이야기는 그런 여행을 한번이라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런 험지에서의 며칠을 상상하고도 갈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 나에게 물어보게 하는데요.
빗자루를 타고서라도 다시 이 곳에 오고싶다는 걸 보니 사람은 아름다운 곳도 오래 기억하지만, 고생한 곳 역시 잘 기억하는거 아닐까 하게
됩니다. 그래도 살면서 꺼낼 추억이 많다는 게 부러워,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지만 어디 한 군데에서라도 진한 추억의 시간을
만들고싶다는 여행의 진짜 동기가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