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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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 평범함을 돌파하는 길이 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냉철하게 따져보고, 자기
혼자 모든 일을 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 그 길이 열린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권해야 할지 권하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일이 세가지 있다. 첫째가 결혼, 둘째가 전쟁, 그리고 셋째는 성지순례다.
- 본문 중에서-

 

 

  십자군 이야기 1권에 이어 2권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프로젝트 지원하느라 야근에 시달리는 나에게 재미를 주었다. 소설도 아니면서 더 흥미롭고 나를 책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십자군 원정이 처음에는 성지 예루 살렘을 회복하였지만 점차 타락되어 갔고 원래의 취지를 잃었다고 배웠다. 그 이상은 알 필요도 없었다. 십자군과 이슬람군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 공격하는 십자가를 초생달이 어떻게 반격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사치였으니 말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힘의 균형은 항상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느꼈다. 간혹 영웅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한쪽이 너무 강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십자군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나보다. 1차 원정때에는 애송이라고 불리던 인물들까지도 빼어난 기량을 발휘했기에 쉽사리 예수살렘을 해방시키고 십자군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지만 1권에 나왔던 인물들이 사라져갈 무렵 이슬람 세계 쪽으로 힘의 균형이 서서히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누레딘과 살라딘이라는 영웅이 등장하였음에도 지도를 원상태로 돌리지는 못했다. 오리엔트 세계의 특징이었는지 아니면 겉으로 보기에는 이슬람교라는 같은 종교이지만 수니파와 시아파로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이슬람과 그리스도의 전쟁만은 아니었다.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유대교도 따지고 보면 그 뿌리는 하나이지 않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모신다는 것. 하지만 그 해석에 있어 각기 다르기에 서로 이교도로고 부르고 있는 것이니...우리 인류도 원래 조상은 하나인데 여러 인종과 민족으로 나뉜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인물들도 사라지고 Home을 떠나 Away에서 만성적인 병력 부족으로 수세에 몰렸음에도 꿋꿋이 버틴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 아무리 중무장한 기병을 보유하였다고 하지만 인해전술로 밀어 붙이는 이슬람을 소수 정예로 잘 막아낸 것을 보면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나보다. 중학교 영어 시간에 배웠던 마라톤의 기원에서도 대규모로 몰려오는 페르시아군을 소수의 그리스 군이 막아내었고  알렉산더 대왕도 많지 않은 병력으로 오리엔트를 정복하지 않았던가? 로마를 쑥대 밭으로 만들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나 후세의 나폴레옹의 경우 처럼 전쟁을 밥 먹듯이 해와서인지 그런 전략 전술에 강한가 보다. 그와 달리 오리엔트 세계는 주로 집안 싸움이나 반역등에 강했기에 근대에 들어와서는 서양에 밀려 식민통치를 받는 신세로 전략하였던 것일까?

 

  현재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영토이지만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왔다.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모두에게 중요한 곳인데 로마인 이야기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유일신을 믿는 이 세 종파는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기에 대립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는 여러 신들이 등장하는데 유일신을 믿지 않고 신화처럼 다신교를 믿었더라면 이런 전쟁이 발발하였을까 상상도 해보았다. 그런데 아마 어떤 형태로도 전쟁은 일어났을 것 같다. 인간이란 원래 욕심이 많아 하나라도 더 갖고 싶고 그래서 남을 것을 빼앗지 않은가? 그것도 하늘의 뜻이라거나 신이 바라시다라는 것으로 그럴싸하게 포장을 잘해서 말이다. 많은 사료들을 참고하고 박식한 저자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서슴없이 풀어나가는데 어떤 대목에서는 분명히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도 하고 작가의 상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독자들도 소설과 같은 흥미를 느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역사적 사실 뿐 아니라 인간의 심리까지 정확하게 묘사하였기에 2권을 덮음과 동시에 3권을 다시 펼칠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십자군 시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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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간적인 인간
브라이언 크리스찬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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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차이점은 무엇인가?' 여러가지 대답들이 나왔다. 동물들과 달리 도구를 사용한다. 감정을 표현할 줄 안다. 언어로서 의사소통을 한다. 생각를 하며 산다. 등등...진화론을 배웠고 생태학을 공부하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대답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팬지들도 간단한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분노, 두려움, 기쁨 등을 표현할 줄 안다. 또한 다양한 언어가 아니지만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생각? 근데 생각은 어떨까? 요즘 유행하는 말중 하나가 '생각 생각 생각 좀 하고 말해'인데 과연 이 생각이란게 뭘까? 이 생각이란 것으로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할 수 있을까?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줄도 모르고 생각없이 말하는 부류들이 있게 마련인데 그렇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컴퓨터가 발달하여 수많은 경우의 수를 기록하고 있다가 필요에 의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사람과 대결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것도 생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얼마전에 아이폰에 새로운 앱을 장착하였는데 말그대로 인공지능이다. 사람이 뭐라고 말을 하면 적절한 대답을 하는 것이다. 혁신이라고 우리는 부르는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이제 기계에 까지 심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렇게 기계들에게 많은 기억들을 심어준다고 해서 영화에서 처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날이 올까? 어짜피 기계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기계에 기록을 심어주는 것도 인간의 역할이니 우리가 악당이라 부르는 인간들이 기계를 조작해서 인류를 파멸시키려고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생각한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사실을 자신만의 기억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기계들은 이를 기억이라 부르지 않고 기록이라 불리는 정보로 저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과 가장 큰 차이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인공지능과 가장 차별화되는 점이 아니겠는가? 지금 밖에는 104년만의 최악의 가뭄을 해결하려는 단비가 일기예보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내리고 있다. 슈퍼컴퓨터를 이용하여 계산을 하여 일기 예보도 예전보다 정확히 해주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계산을 빠르게 해주는 것이지 정확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가? 오랜 경험에 의해 달무리나 별의 빛나는 정도를 알고 혹은 허리가 쑤시는 것을 보고 날씨를 예보한다. 오히려 정확할 때도 많다. 그렇다면 인간도 결코 기계에 뒤지지 않는 계산 능력을 가진 것이다.

 

  가끔씩 나는 헷갈릴 때가 많다. 가장 인간적인 사람과 가장 완벽한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가? 혹은 우리가 바라는 이상형인가하고 말이다. 인간적이라 함은 보통 정에 이끌려서 매몰차게 하지 못하는 감성에 치우친 반면 완벽한 사람이라 함은 아무래도 이성적인 면에 더 치중할 것이다. 어느쪽이 더 인간에 가까운 것인지는 사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라 함은 인가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생각도 할 줄 알고 감정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사고를 한다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남을 배려한다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그래서 가장 인간적인 필요는 없어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인간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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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 북미 최후의 인디언이 천 년을 넘어 전한 마지막 지혜
위베르 망시옹.스테파니 벨랑제 지음, 권지현 옮김 / 흐름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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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친구들은 모두 돈만 밝히는 속물로 보였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남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자연과 어울려 살고 싶었는데 이런 나를 보고 친구와 선배들은 '너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고 핀찬을 주었다. 그런 나도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가진 후에는 똑같이 돈을 밝히는 속물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물질 만능인 사회에 살고 있으며 돈만 있으면 핵전쟁이 일어나가나 운석 충돌 등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한이 있어도 살아 남으리라 생각한다. 지하 깊은 곳에 벙커를 만들고 극지방에 거대한 창고를 만들어 씨앗을 보관했다가 나중에 활용하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과 어울려 살기보다 어떻게는 돈으로 살아남으려는 것인데 혼자서 살아 남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

 

  가끔씩 생각을 해본다. 투자를 잘하여 돈을 벌게된다면 그 다음에는 큰 집을 장만하고 또 그 다음에는 무엇이 기다리는가? 멋지게 은퇴하고 여유있게 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도 많은 돈은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충분히 행복하고 여유있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뒤는 생각지도 않고 현실에만 급급해서 나만 잘 살겠다는 것이 결국은 우리 모두 자멸하는 길인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인간들이 더 어리석은것 같다. 공장을 짓기 위해 마구잡이로 벌목을 하고 개간을 하지만 원자재가 있어야 생산을 하고 인간들도 농사를 지어 밥을 먹어야 살 수 있고 공기중에 산소가 20%는 되어야 제대로 호흡을 할 수 있는데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평범한 진리를 잊고 지내는 것 같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했다고 역사책에서 배웠지만 그 이전에 중국인들이 배를 타고 자유로게 왕래했다고는 하지만 훨씬 이전에 인디언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자연과 어울어져 함께 공존하고 있었는데 침입자들이 나타나서 인디언들을 한쪽 구석으로 내몰고 차지해버렸다. 자연과 어울어져 살았기에 백인들이 가지고 온 질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이방인들에게 옥수수와 같은 농작물 재배법을 가르치고 금과 같은 귀금속의 존재를 알려준 결과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버린 것이다. 지금에 와서 우리가 이런 인디언들을 보면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 갈 수 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자연과 어울려서 사는 지혜를 발휘했기에 질병이란 모르고 살았으며 소유니 정복이니 하는 것은 사전에도 없는 단어였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관여하지 않으면 스스로 회복을 하고 또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할 의향이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들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공존 대신 소유를 택한 결과 경쟁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어쩌면 가장 순진해보이는 인디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인디언들 뿐 아니라 우리 선조들도 그러햇을 것이다. 좁고 불편한 길을 넓히면 훨씬 편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짐을 운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공존해야 우리도 영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파괴하더라도 우리를 파멸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을. 다만 인류가 스스로 그 길을 택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알게 될까? 아마도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나 알 수 있지 않을까? 조금만 덜 욕심을 냈더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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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에 담아 온 중국 - 거친 세상으로 나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주는 특별한 선물
우샹후이 지음, 허유영 옮김 / 흐름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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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부터 중국이라는 나라를 동경해온 사람중 한명이다. 물론 6.25때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고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백두산에 태극기를 꽃으려는데 난데없이 중공군이 참전하는 바람에 다시 서울밑으로까지 밀렸다가 다시 서울을 수복하고 지금의 휴전선을 긋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기도 하였지만 오랜 기간 동안 우리나라른 사대주의라며 중국을 섬기지 않았던가.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침략을 받기도 한 과거를 지니고 있지만 청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대주의 사상에 금이 가지 시작하였을 것이다. 최고이자 최강이라 믿었던 청나라가 작은 섬나라 일본에 무참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실망을 금치 못하였을 수도 있겠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시절에 중국을 우리는 중공이라 불렀고 대만을 타이완 대신 자유중국이라 불렀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첨예한 대립 때문이었다. 미국이 있었기에 우리는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었고 이렇게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고 배웠기에 중공과 수교를 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인민폐에 등장하는 마우저뚱이라는 인물은 장제스를 작은 섬나라로 밀어내고 공산화시킨 장본인이었다. 한참 뒤에 안 사실이지만 농민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였고 뛰어난 전략가였고 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장제스가 영웅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불편한 진실들...

 

  그랬던 우리가 중국과의 수교를 위해 그동안 친밀하게 지냈던 대만과의 수교를 단 3일만에 단절을 한 것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대만과는 우리의 주력상품인 반도체와 가전 제품등이 서로 중복되기도 하여 경쟁체제에 놓일 수 밖에 없기도 하다. Made in China 덕분에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누려보지 못했던 혜택을 저렴하게 누려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갈길이 먼 고품질의 제품 생산. 그럼에도 많은 기업들이 중국으로 진출을 하려고 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북경대로 보내고 싶어한다. 상하이의 경제 규모는 엄청나며 나도 직접 경험하였지만 정말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워낙 많은 인구 탓에 아직 1인당GDP는 우리보다 한참 낮다. 그래도 중국에는 우리가 말하는 상위1%대 부자들의 숫자가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으며 지금 각 나라들과 영토분쟁중인 땅이 우리나라 면적보다 넒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와는 스케일이 다른 중국이기에 우리가 부러워하고 주재원으로 가고 싶어 줄을 서는 나라인 것이다.

 

  이런 중국에 대해 이해를 하고 시야를 넓히기 위해 작년에는 우리 가족들 모두 중국으로3박4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짧은 기간이지만 상해와 그일대를 여행하면서 중국이라는 나라의 스케일에 대해 다시한번 느꼈다. 하드웨어적인 인프라는 잘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지키는 국민의 의식이 뒷받침되지 못해 잘 갖춰진 신호등은 무용지물이 되기도한다.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섰지만 정작 그 혜택을 누리는 중국인들은 얼마나될까? 중국을 수차례 방문하였지만 이것으로 중국을 전부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책 한권 읽었다고 아는체 할 수도 없는 법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관련된 책 딱 한권 읽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떠들어대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역사책들도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하고 온라인 강자도 들어보았다. 그리고 [배낭에 담아 온 중국]과 같은 중국 관련 책들도 많이 읽었다. 그때마다 나의 중국에 대한 환상이 무참이 깨지기도 하지만 13억 인구를 거느린 중국에 대해 쉽게 단정지어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보다 넓은 땅덩어리와 많은 인구로 구성된 중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유럽 각 나라들의 특성을 모두 이해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넓은 대륙을 여행하다보면 대륙기질을 느낄 수가 있으며 보다 넒은 시야를 지닌게 된다는 사실. 그 시작은 우리가족이 중국 상해를 여행하면서 부터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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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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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세계사 기간에 중세유럽에 대해 배울때 십자군 전쟁 - 십자군 원정이라고도 배웠다 - 은 교과서의 몇 페이지를 장식하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전 신성로마 제국 황제가 눈밭에서 3일 밤낮으로 교황에게 빌어 파문을 면제 받는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에 대해서만 간략히 배웠다. 그토록 강성했던 교황의 권위가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추락하게 되고 다시 황제의 권위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이게 되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전쟁에 대해 황제,교황, 성직자,귀족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런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달달 외워야 했다. 객관식 시험 문제로 출제한다면 정답이 명확히 나눠지므로 채점자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무려 200년간 7차례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4시 선다형 객관식 문제 맞추기 위해 암기를 해야만 했던 나에게 십자군 이야기와 같은 작품을 접한다는 것은 사치였을지 아니면 내신에서 비중이 낮음에도 먼 미래를 바라보고 세계사에 빠져들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을지 그 시절로 [십자군 이야기]를 들고 돌아갈 수 없기에 상상에 맡겨야 할 것이다.

 

  사실 나는 무신론자이기에 죽어서 천당에 간다거나 혹은 환생이니 하는 말은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신의 가호를 바란다거나 기도를 한다는 것 조차 이해가 되지않는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기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물어본다면 반박할 말도 없지만 말이다. 이런 나에게 종교는 믿음이라기 보다 하나의 학문에 불과하다. 특정 종교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왜 사람들이 종교에 열광하는지 궁금하고 종교 전쟁이 발발하게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알고 싶고 인물들에 대해 연구를 하고 이미 고인이 되었더라도 현재의 나의 멘토로 삼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십자군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도 내가 닮고 싶고 또는 나의 성향과 비슷한 멘토들을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마 만나게 되었다. 이런 역사서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마치 내가 전장에서 함께 피를 흘리고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나 제후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에 빗대어 상상해 보건데 평범한 병사나 농사꾼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왜 그랬을까?'라는 아쉬움을 금치 못할때도 있다. 필자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과 살아 숨쉬는 듯한 문장이 나를 역사의 현장으로 데려다 놓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란 항상 승리한 자의 것이라고 하지만 패자라고 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승자의 입장에서는 좀 더 과장되고 통쾌하게 표현하고 싶어하고 패자는 피해에 대해서는 축소를 하고 상대방의 잔혹함에 대해서는 과장하고 싶어할 것이다. 1차 십자군 전쟁에서는 예루살렘 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Away에서 우승한 십자군들이 승자이고 Home이라는 유리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단결하지 못해 패전을 거듭했던 이슬람 세계가 패자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십자군의 승리 위주로 이슬람 세계의 집안 싸움에 대해 강조를 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있어 만약이란 절대 존재할 수 없지만 그래도 만약 하나의 지휘체계를 유지하지 못한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 세계가 하나로 똘똘 뭉쳤더라면 성지 예루살렘을 내어주고 많은 주민들이 이교도라는 이유로 살육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나보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든 정복에 대한 욕심이든 그 종류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욕심없는 인간은 없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어 전쟁을 일의켰다고는 하지만 지배와 소유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중세의 기사들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명예로는 죽음을 택하고 주교들은 순례자들을 신에게로 가는 길을 인도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가문을 위하고 종교를 위해 한몸 바치는 것이니 욕심이 개입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탐욕들이 바탕으로 200년에 걸쳐 십자가와 초생달의 대결이 이루어졌는데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므로 자신이 속한 종교가 아니고서는 모두 이교도들이니 개종을 강요하지 못할 바에는 후한을 없애기 위해 모두 살육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쩌면 장거리 원정길에 오르고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고통을 견디며 전쟁을 해야하였기에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있던 광기가 밖으로 분출되었을 수도 있겠다.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신의를 져버리거나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을 버리고 나몰라라 제후들, 자신의 주군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름없는 기사들과 병사들, 출신성분은 좋으나 우유부단한 성격에 교활함을 앞세워 스스로의 복을 차버리는 실수를 거듭하여 후세들로 죽어서까지혹평을 받는 황제들.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산출물일 것이다. 종교니 사상이니 하는 것들은 태고적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눠지면서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종교나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십자군 전쟁을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만들어낸 전쟁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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