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엔 소복 소복 눈이 내렸다.

눈발이 날리는데도 축구하는 날이라며 아침일찍 주섬주섬 축구화를 챙기는 녀석을 따라 우산을 챙겨들고 현관문을 나서니 탄천주변이 온통 눈발속에 숨죽인채 웅크리고 있었다.

어쩌다 한점두점씩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 사방을 하얗게 메워가며 순식간에 내리는 눈을 보니 아찔하게 현기증이 몰려왔다.

어른이야 어지럽거나 말거나 건우녀석은 첫겨울나는 강아지마냥 운동장을 겅중겅중 뛰었다.

 

나: 건우야, 그눈 다맞으면 젖어서 체육관에 가도 축구하기 어려울텐데, 엄마 우산밑으로 들어오지...

건우: 괜찮아요.  털면 돼요. 그런데 엄마, 운동장에 발자욱이 다 제꺼예요. 꼭 영화같아요.

 

녀석의 말을 들으니 문득 어렸을적에 단체관람을 갔던 영화의 한장면이 떠 올랐다.

눈오는날 부자가 닭한마리를 들고 명절앞두고 고개를 넘어가는 장면이 아스라하고 갑자기 쏟아지는 눈발속에서 길을 잃으며 아버지가 아들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려고 옷가지를 벗어 감싸주며 애절하게 눈감던...

사실, 너무 어릴적에 봤던거라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고 떠오르는 거라곤 엄청 퍼붓던 눈발과, 눈발에 덮이던 부자뿐인 영화가 미친듯 눈이 퍼부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곤 하는건 무엇때문일까?

그 기억 뒤로 줄을 이어 달려오는 눈발은, 어릴적 동네어귀에 반쯤 떨어져 펄럭거리던 선거벽보와 그 밑을 뛰던 주인도 분명치 않던 강아지등위로 내리자마자 녹으며 날리던 눈발이다.

유난히 잔병을 달고 살아 겨울철이면 문밖을 나서지 못하게 하는 엄마의 단속탓에 어릴적 눈은 내게 한번도 놀잇감이었던적이 없었다. 그저 유리창이나 담장 너머로 바라보이는 추운 겨울이었을뿐..

 

점점이 굵기도 한 눈발들이 쉬 녹지 않을것처럼 금새 쌓이는 모습을 보며 하나 둘 모여든 건우네 축구클럽아이들은 누구랄것도 없이 금새 눈을 뭉쳐 들었다.

그늘이라곤 찾아볼수가 없는 아이들이 눈뭉치를 들고 만화영화속의 아이들처럼 끼득대며 던지고 굴리곤 하였다.

살아온 시대가 달라서일까, 건우와 아이들에게선 눈에 대한 애틋함이나 눈뒤의 누군가에 대한 아련함따윈 없이 마냥 설레고 신나는 놀이만이 있는 것은...

눈에 대한 아련한 기억따윈 없어도 좋으니 그저 즐거운 추억만이길, 현기증속에 꽃처럼 내리는 눈을 맞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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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0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많이 왔군요^^ 건우도 나중에는 그것이 아련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요^^;;;

전호인 2007-01-09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에 대한 추억은 동네 언덕위에서 비료포대 바닥에 깔고 미끄럼 타던 추억이 새롭긴 합니다. 그리고 나무 주워다가 모닥불펴서 시린 손과 발을 말렸지요. 양말이 나일론이다보니 두켤레 정도를 껴 신었고, 너무 시린 발이었기에 양말에 빵구 나는 줄 모르고 있다가 집에가서 부모님께 양말 태워먹었다고 혼나던 기억! ㅎㅎ

Mephistopheles 2007-01-09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눈이 내린 고갯길에서 미끄러져 1미터정도 붕 떠버렸던
기억이 갑자기 나는군요..^^ 나이가 드니까 눈이 싫어지더라구요..^^

춤추는인생. 2007-01-0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우와 연우님. 맞어요 엄마마음은 다 그런것 같아요..^^

치유 2007-01-09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날..정말 눈이 꽃처럼 이쁘게 내렸었지요..저도 소라랑 그 눈을 운동장에서 맞았었는데 ...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듯 정겹네요.


로드무비 2007-01-0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틋함이나 아련함의 정서를 알기엔 우리 아이들이 아직 어리지요.
그 천진함이 부럽기도 하고 슬그머니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반쯤 떨어져 펄럭거리던 선거 벽보와 강아지 등위로 내리자마자 녹던 눈발,
이라는 표현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씩씩하니 2007-01-16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여린 감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네요..
저도 때로 추억이 있어서 나한테는 다른 눈, 비, 바람 때문에 혼자 센치해질 때가 있답니다...
건우가 눈 위에서 뛰노는 모습,,,그것도 언젠가 추억이 되겠지요?

건우와 연우 2007-01-16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정신 못차리게 바쁜 연초네요.
인사도 제대로 못드렸는데 찾아주신 물만두님 전호인님 메피스토님 춤추는 인생님 배꽃님 로드무비님 씩씩하니님, 정말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정신좀 차리면 자주 인사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