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1 일례로 건위천괘의 상구효에 항룡유회 亢龍有悔 (亢 높을 항, 높이 오를 항, 목 항, 悔 뉘우칠 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하늘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입니다.
앞에서 주역은 변화의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자기가 구성하고 조직한 관계망의 상대성에 주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법이 로마이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을 잊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항룡유회: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이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다시 내려 올 수 밖에 없듯이, 부귀가 극에 이르면 몰락할 위험이 있음을 경계해 이르는 말
P142 노예제 사회에서는 학습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서 학습이 갖는 의미는 거의 없습니다. 학습에 대한 언급이 ‘논어’ 첫 구절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 변동기임을 짐작케 하는 것입니다.
P144 습 (習) 부리가 하얀(白) 어린새가 날개짓 (羽)을 하는 모양입니다. 복습의 의미가 아니라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배운 것, 자기가 옳다고 공감하는 것을 실천할 때 기쁜 것이지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說: 기뻐할 열, 말씀 설)
어쨌든 학이시습지 學而時習之 의 습習은 실천의 의미로 익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時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시는 often 이 아니라 timely 의 의미입니다.
P145 사회 변화 역시 그것의 핵심은 바로 인간관계의 변화입니다. 인간관계의 변화야말로 사회 변화의,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준거입니다. ‘논어’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읽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인간관계에 관한 담론입니다.
P146 계급관계는 생산관계이기 이전에 인간관계입니다. 자본제도의 핵심은 위계적인 노동 분업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지배체제가 자본제도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생산자에 대한 지배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에 의하여 행해지든, 사회주의 사회의 당관료에 의해 행해지든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지요. 제도의 핵심개념이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실이지요.
P147 영원히 지나가고 다시 오지 않는 과거는 없습니다. 우리는 까맣게 잊었던 과거의 아픔 때문에 다시 고통받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등불처럼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옛 친구를 10 년이 훨씬 지난 후에나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P149 ‘주역’ 지천태괘 地天泰卦의 효사 爻辭에서 무왕불복 無往不復 이란 구절을 읽었습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었지요.
온고이지신 溫故而知新 이란 구절은 어디까지나 진보적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통일체를 인식하고 온고 溫故함으로써 새로운 미래 (新) 를 지향(知) 할 수있다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P150 자신의 방법으로서의 온溫은 생환 生還 과 척결 剔抉 (바를 척, 도려낼 결)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50 君子不器 – 爲政 (위할 위, 정사 정) 그릇이란 각기 그 용도가 정해져서 서로 통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릇의 의미는 특정한 기능의 소유자란 뜻입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 안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P152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 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수레바퀴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예, 악,사(궁술), 어(마술), 서, 수를 모두 익혀야 했지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읇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 시서화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강조되고있는 전문성 담론이 바로 2 천년 전의 노예계급의 그것으로 회귀하는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P154 법가 강의 때 다시 설명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사회의 지배계층은 예로 다스리고 피지배계층은 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나라 이래의 사법 司法 (맡을 사) 원칙이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156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P159 미 美는 글자 그대로 양 羊자와 대 大자의 회의 會意 입니다. 양이 큰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양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생활의 물질적 총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과 가죽은 입고 신고, 그 기름은 연료로 사용하고, 그 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한 마디로 양은 물질적 토대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양이 무럭무럭 크는 것을 바라볼때의 심정이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 흐뭇한 마음, 안도의 마음이 바로 미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