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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포기 키작은 풀로서서 – 계수님께, 1983.2.7>

P289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이곳(교도소)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면 그만인 곳으로 여기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고달픈 처지에 심신이 부대끼느라 이곳에 자라고 있는 무성한 풀들을 보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름도 없는 풀들이 모이고 모여 밭을 이루고 밟힌 잡초들이 서로 몸 비비며 살아가는 그 조용한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초상지풍초필언 수지풍중초부립 草尙之風草必偃 誰知風中草復立 (偃 쓰러질 언, 誰 누구 수, 復 돌아올 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잎마다 발 밑에 한 줌씩의 따뜻한 땅의 체온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무성한 잡초속에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몸 기대며 어깨를 짜며 꾸준히 박토를 배우고, 나의 언어를 얻고 나의 방황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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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제3판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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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김질 – 계수님께 – 1982.8.11

군자성인지미 君子成人之美, 군자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며, 상선약수 上善若水, 최고의 선은 순조롭기가 흡사 물과 같다는 까닭도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자기의 주장을 편의상 ‘그것’ 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것’과의 반대물을 대비하고,
전체속에서의 ‘그것’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그것의 객관적 의의를 규정하며,
과거,현재,미래에 걸친 시계열상의 변화,발전의 형태를 제시하는 등의 방법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다른 것들과의 관계와 상호연관 속에서 ‘그것’을 동태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비슷한 얼굴 – 계수님께, 1982.10.9>

P264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담장을 높이더라도 사람들은 결국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함께 햇빛을 나누며,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아버님의 저서 ‘사명당실기’를 읽고 – 아버님께, 1980.10.28>

P269 책 읽다 말고 문득문득 책의 무게를 가늠해보며 아버님의 수고를 상상해봅니다. 부단히 발전하고 계시는 아버님의 삶의 자세는 걸핏 징역을 핑계삼는 저희들의 게으름을 엄하게 꾸짖습니다.

<아내와 어머니 – 어머님께, 1982.12.23>

P277 징역 간 남편에 대한 신뢰와 향념의 정도에도 그 마음이
좌우됨을 봅니다. 이 신뢰와 향념은 비록 죄지은 사람이기는 하나 그 사람됨에 대한 아내 나름의 평가이며 삶을 더욱이 힘든 삶은 마주 들어봄으로써만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적실한 이해이며 인간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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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제3판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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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아픔에 눈뜨고자 – 형수님께, 1982,2.9>

P233 철야의 어둠이 평단의 새 빛에 물러서는 이 짧은 시간에, 저는 별이 태양 앞에 빛을 잃고 간 밤의 어지럽던 꿈이 찬물가득한 아침 세숫대야에 씻겨나듯이, 작은 고통들에 마음 아파하는 부끄러운 자신을 청산하고 더 큰 아픔에 눈뜨고자 생각에 잠겨봅니다.

<따순 등불로 켜지는 어머님의 사랑 – 어머님께, 1982,4.30>

P243 돌과 돌이 부딪쳐 불꽃이 튀듯이 나(我)라는 생각은 ‘나’와’처지’가 부딪쳤을 때 공중에 떠오르는 생각이요. 한점 붙티에 지나지 않는 것, 그 불꽃이 어찌 돌의 것이겠는가, 어찌 돌속에 불이 들어었다 하겠는가고 싯다르타는 가르칩니다.

‘나’라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에 억눌려 무척 작아졌을 때 일어나는 불티같은 순간의 생각이며 물에 이는 거품 같은 것, 찰나이며 허공인 나를 버림으로써 대신 무한히 큰 나를 얻고, 더 큰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작은 아픔들을 벗는 진지(眞智)와 해탈은 불꽃을 돌에 돌려주고 거품을 물에 돌려주고 빈비사라 왕의 마음을 백성들의 불행에 돌려주려는 싯다르타의 뜻과 한 뿌리의 열매입니다.

<바다에서 파도로 만나듯 – 아버님께, 1982.5.25>

P246 새의 울음소리가 그 이전의 정적없이는 들리지는 않는 것처럼 저는 이 범상히 넘길 수 없는 소외의 시절을, 오거서의 지식이나, 이미 문제에서 화제의 차원으로 떨어진 철 늦은 경험들의 취집에 머물지 않고, 이러한 것들을 싸안고 훌쩍 뛰어넘는 이른바 ‘전인적 체득’과 ‘양묵’에 마음바치고 싶습니다.

<환동 – 아버님께, 1982,6.5>

P248 아버님의 자상하신 옥바라지에 비해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제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이 때로는 다음의 정진을 위한 한 알의 작은 씨앗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자위하려 합니다.

그것은 (정향 선생님의 행초서의 경지, ‘환동’) 물이 차서 자연히 넘듯 더디게 더디게 이루어지는 천연함이며, 속이 무르익은 다음에야 겨우 뺨에 빛이 내비치는 실과 같아서 오랜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세월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유원함인지도 모릅니다.

<저마다의 진실 – 계수님께, 19827.13>

P256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의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 형수님께>

P259 열 다섯해는 아무리 큰 상처라도 아물기에 충분한 세월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을 시종 자신의 상처 하나 다스리기에 급급하였다면, 그것은 과거 쪽에 너무 많은 것을 할애함으로써 야기된 거대한 상실임이 분명합니다.

세월은 다만 물처럼 애증을 묽게 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옛 동산의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 것’ 또한 세월의 소이 (所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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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제3판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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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빼앗긴 국화 – 형수님께, 1981.10.17>

P225 국화장의 비닐 온실에 밤새 불을 켜놓기에 아마 계사에 다른 전등불이나 한 가지려니만 여겼더니만 이것은 꽃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꽃을 누르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국하는 장야성 長夜性 식물이기 때문에 밤이 길어야 꽃이 피는 법인데 시장의 꽃값이 비쌀때 내기 위하여 개화 開花를 억제해 둔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껍질 – 어머님께, 1981.10.21>

P226 문자를 구하는 지혜가 올바른 것이 못됨은, 學止於行 모든 배움은 행위 속에서 자기를 실현함으로써 비로소 산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와 고, 巧와 固 – 아버님께, 1981.11.14>
(공교로울 교, 굳을 고)

P227 글씨에 변화를 주려는 강한 충동 때문에 붓을 잡기가 두려워집니다. 무리하게 변화를 시도하면 자칫 교 巧로 흘러 아류가 되기 쉽고, 반대로 방만한 반복은 자칫 고 固가 되어 답보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교 巧는 그 속에 인생이 담기지 않은 껍데기이며, 고 固는 제가 저를 기준 삼는 아집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윤집궐중’ 역시 그 중 中을 잡음이 요체라 하겠습니다만, 서체란 어느덧 그 사람은 성정이나 사상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은 그 ‘사람’과 함께 변화, 발전해감이 틀림없음을 알겠습니다.

"우차 牛車가 나아가지 않으면 소를 때리겠느냐 바퀴를 때리겠느냐?"는 우문이 때로는 우리를 깨우치는 귀중한 물음이 되듯이, 본말을 전도하고 선후를 그르치는 것은 거개가 졸속한 육심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윤집궐중 允執厥中 ( 진실로 윤, 잡을 집, 그 궐, 가운데 중)

堯(요) 임금이 舜(순) 임금에게 禪讓(선양)하며 "하늘의 운수가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中(중: 지나침도 없고 모자라지도 않는 핵심)을 잡아라. 천하가 困窮(곤궁)해지면 하늘이 임금에게 내리시는 녹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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