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포기 키작은 풀로서서 – 계수님께, 1983.2.7>
P289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이곳(교도소)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면 그만인 곳으로 여기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고달픈 처지에 심신이 부대끼느라 이곳에 자라고 있는 무성한 풀들을 보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름도 없는 풀들이 모이고 모여 밭을 이루고 밟힌 잡초들이 서로 몸 비비며 살아가는 그 조용한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초상지풍초필언 수지풍중초부립 草尙之風草必偃 誰知風中草復立 (偃 쓰러질 언, 誰 누구 수, 復 돌아올 부)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잎마다 발 밑에 한 줌씩의 따뜻한 땅의 체온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무성한 잡초속에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몸 기대며 어깨를 짜며 꾸준히 박토를 배우고, 나의 언어를 얻고 나의 방황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