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속의 이성과 감정 – 형수님께, 1983.3.5>
P291 갇혀있는 새가 성말라 야위듯이 두루미 속의 술이 삭아서 식초가 되듯이 교도소의 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날카롭게 벼리어 놓습니다. 징역을 오래 산 사람치고 감정이 날카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P292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 합니다.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역시 감정이라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뜻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할 일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이성의 계발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감정에 기초하고, 감정에 의존하여 발전하는 것이기 대문에 이러한 노력은 속박과 한정과 단절로부터 감정을 해방하는 과제와 직결됩니다.
이성과 감정은 크기가 같아야 하는 수레의 두 바퀴라고 하고, 높은 단계의 이성에 높은 단계의 감정이 관계된다고 한다. 높은 단계의 감정에 높은 단계의 이성이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의 감정에 쌓여 있지 않기 위해서는 높은 단계의 감정이 필요하고, 감정이 높아지기 (?) 위해서는 이성의 계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학이불사 즉망, 사이불학 즉태의 개념을 새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감정이 상한 아이에게 이성적으로 잘못을 지적하고, 해결방안을 얘기하는 것보다 그 감정에 공감이 되어서 그 공감이 아이에게 온전히 전해진 후에야 아이가 마음을 추스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P293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몰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바다가 하늘을 비추어 그 푸름을 얻고 세류를 마다하지 않아 그 넓음을 이룬 이치가 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감옥이라는 벽속에 갇혀있지만 생각과 감정은 그 벽속에 갇혀있지 않고, 또한 감옥밖에서 몸이 자유로운 이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세상을 꿰뚫고 있는 것 같다. 풍부한 이웃은 감옥 속의 죄수복도 포함되어 있고, 감옥벽을 바라보지만 벽을 허물고 있습니다. 바다가 하늘에 비추어 푸름을 얻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을 비추어 나를 보고, 가까이 하는 사람을 통해 내가 보여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또, 가장 낮은 곳에 있음으로 바다의 넓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 이해가 됩니다.
<꿈에 뵈는 어머님 – 어머님께, 1983.3.16>
P295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어머님께도 기다림이 집념이 되어 어머님의 정신과 건강을 강하게 지탱해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어떤 기다림이 있는가? 기다림이 없는 삶이 아니었나 싶다. 신영복 선생의 기다림, 그리고 선생의 어머님의 기다림과 같은 간절함을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