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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 -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부터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3월
평점 :

그리스에서 인간이 신 못지않게 뛰어난 존재라거나, 인간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라거나, 인간이 스스로 법과
규칙을 만들어 사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인식은 소수의 지식인들만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넓은 우주에
잠시 빛나는 섬광 같은 것으로 대다수 그리스 인이 공유했던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p.160)
메소포타미아 문명, 고대그리스, 그리고
로마제국. 우리가 흔히 들으며 성장하고 배워왔으나 우리에게 이 단어들은 그리 가까운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책에서 고대 그리스의 문명은 이야기하지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문명은 매우 가볍게
훑고 지나가기에 우리가 알아온 서양고대사는 처음부터 반쪽짜리였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람세스”라는 두꺼운 소설에 심취했던 것도 전혀 몰랐던 세계의 이야기라는
접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그 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이집트 문명에 대해 여전히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그런데 서양고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다 보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내가
위에 가져온 문단처럼 고대는 신성이 강했기에 인간이 매우 약한 존재였는데, 왜 그들의 사상이 이토록
오랫동안 세계인들에게 학습되고, 전해진 것일까. 오래도록
가지고 살아온 이 의문에 다소 해답을 준 책이 있어 소개하려 한다. 일단 책의 제목부터 당돌하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서양고대사”라니. 그런데 그 당찬 제목이 읽다 보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게, 내용면에서
참으로 치밀하게 구성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고대로마와 고대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문명과 사상, 종교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히 기록되었고, 각주도 매우 꼼꼼히 달려있어 마치 잘 정리된 서양교대사 수업을 들은 기분이었다. 학생들이 세계사 수업을 듣기 전에 이 책을 읽어 둔다면, 그 수업의
전반적인 부분을 선행할 수 있고, 나처럼 어른이 되어 읽는다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배웠던 것들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동태복수는 같은 신분에만 적용되고, 신분이 다르면 돈으로 보상할 수 있다. 이는 가난한 평민이 가해자에게
복수함으로써 사태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보상받아 생계를 유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p.45)
고대 서양을 모르는 이들도 흔히 아는 함무라이 법전. 바빌로니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법전이라고 배우고 휙 – 지나온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이 법전이 어떤 사상을 담고 있고, 어떤 문화에 기인했음을 알았다. 사실 그동안은 동태복수를 하게 하는 합리적이지만 또 비합리적인 사상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이것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 나니, 우리의 배움이
얼마나 짧은지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사실 이쯤에서 이미 이 책 값은 하고 시작했다.)
또 그동안은 자세히 알지 못했던 바빌론, 페르시아, 이집트 등에 대해 매우 상세히, 그리고 재미있게 기록된 덕분에 초반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반을 뚝딱 읽었다. 이쯤 읽었을 때 나는 독서단톡방에 “제목보고 겁먹었는데 너무 재밌어요”라는 말을 기록하기도 했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견은 결코 우연이거나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p.126)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3권 가지고 있다. 한때 그 섬세한 묘사에 빠져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그쳤고, 슐리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 묘사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찾아 일리아스 안의 도시들을 찾아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역사로 바뀌는 순간을 만들었다. 이 책의 저자에게 이야기꾼이라는
별명이 결코 넘치지 않음을 여기에서 공감했다. 알고 있던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표현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끝내는 게 아니라 연결지어 많은 것을 학습하게 한다. 사실
아주 먼 나라의 고대라고 생각한다면 한없이 먼 일이다. 그러나 나는 책을 사랑하고,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동안 내가 읽어온 많은 책에서
미처 모르고 지나왔던 세상을 “자, 자네가 읽어온 이야기가
이거지? 거기에 이런 부분을 더해주면 그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나 상식이 된 다네. 이렇게 쉽게 역사한 숟가락 퍼먹었네” 라고 말해주는 느낌이다. 입담이 좋은 세계사 선생님을 모시고 과외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민중이 국정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분별력을 갖추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들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p.222)
민주주의. 당연히 맞고, 당연히
찬성하면서도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 게 맞는지를 고민해보기도 했던 대목이다. 저자가 옮겨준 민주주의
옹호론의 대목을 읽으며 말이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러한 고민인들 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독서의 순기능은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책이야 말로 이 기능을 모두 하고 있는 것 아닐까. 늘 꾸준히
독서를 하는 편이나 어떤 책은 덮고 나면 생각도 나지 않는 책이 있고, 덮음과 동시에 연결독서를 하고
싶어 지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내게 후자다. 아마 나는
머지않아 메소포타미아의 유적 등과 관련된 책을 읽을 것 같고, 로마제국 멸망에 대한 책을 찾아 읽게
되리라 싶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방대한 지식을 그저 지식으로서 풀어 두었다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지식 위에 풍부한 이야기를 얹어 마치 맛있는 커피같다. 묵직한
바디 위에 얹어진 매력적인 향기 같은 느낌이랄까.
서양고대사. 우리나라의 고대사도 잘 모르는 판에 뭘 굳이 서양고대사까지
알아야 할까라고 생각한다면 그저 가볍게 지나가셔라. 하지만 한번이라도 서양고대사에 대해 궁금해지고, 그 영향을 받은 뒤의 모든 이야기들이 궁금하다면, 일단 이 책을
펼치시길. 그 다음은 알아서 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