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 개혁 신학의 젊은 기수 마이클 호튼 시리즈 3
마이클 호튼 지음, 윤석인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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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렌즈를통해서보는삶의목적과의미 #마이클호튼 #부흥과개혁사

 

신학교 다니던 시절 저자의 이름을 처음 들었고, 여러 책의 출간과 함께 작가에 대한 평이 나쁘지 않아서 한 번쯤은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10년쯤 지났는데, 이후로도 저자는 책을 정말 많이 써냈고, 내가 속한 교단이나 교회들 사이에서는 개혁주의의 젊은 기수라는 평을 들으며 점점 유명해졌다. 한 번쯤은 읽어봐야지 했는데, 이제야 그의 책을 처음으로 봤다. 그런데 보니까 1993년도에 쓴 책이니까....저자가 벌써 25년 전에 쓴 책이었다. 아마도 학위를 마치고 책을 쓰기 시작한 때쯤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이 쓰인 시기를 말하는 이유가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용에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오는 청년의 씩씩함? 담대함?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물론 이러한 느낌은 지금의 일반적인 대한민국 청년의 분위기와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저자는 십계명을 풀어가면서 현대(미국) 세계가 얼마나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맞서 십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한다고 역설한다. 율법의 사회적, 신학적, 도덕적 용법에 대해 설명으로 시작하여 열 가지 계명을 차례대로 해설하고, 마지막 챕터에서 율법을 위반한 자에 대한 희소식-칭의와 성화를 다룬다. (당시) 최근의 기사, 문학, 사회 평론 등을 자유롭게 인용하며 현대 사회와 복음주의 교회들이 각 계명들을 어떻게 어기는지를 살피고, 그에 대응하여 나름 무난한 성경 해석과 교리 문답, 특히 루터의 대교리문답과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크 문답을 자주 인용하며 십계명에 순종하자 강력하게 권면한다.

 

책 전반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점들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좀 많이. 책 편집이 오래 전이라 그런지 가독성이 조금 떨어지고, 저자가 교리 문답을 인용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저자의 해석이 그저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현대 문화와 교회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에 대하여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들의 세상에서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했는지를 소개하며 그 둘을 연결 짓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냥 연결만 한 느낌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각 계명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편적인 경우가 많았고, 당위적인 차원에서 요구하고 끝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낙태에 대한 저자의 태도이다. 미국 사회가 지나치게 낙태문제에만 골몰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기도 그 문제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노동에 대해서 그저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태도에 대해 상당히 적대적인데,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러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계명을 적용하는 내내 그러한 태도를 보인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욕구를 강박증처럼 느끼는 이 세대에 권리추구보다 우리의 의무를 신실하게 행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일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사람들을 유혹하기도 하지만 억압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밥벌이라도 하면 다행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같았다. 똑같은 권면을 해도 이러한 이해나 공감을 통과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주변에서 개혁주의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를 듣는데, 사실 많이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계속 그러한 분위기 속에 살았기 때문이겠지만....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그런 답답함을 느꼈다. 저자가 막 30이 되었을 때 쓴 책이니 이럴 수도 있겠다. 앞에서 읽은 김용규의 <데칼로그>나 숀 글래딩의 <TEN 10>이 워낙 좋은 책이어서 그런지 그 책들과 저절로 비교가 됐다. 보통 평을 쓰면 무슨 추천사처럼 긍정적인 것만 쓰는 경우가 많은데, 오랜만에 마음에 들지 않은 책을 만났다.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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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 김용규의 십계명 강의
김용규 지음 / 포이에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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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김용규 #포이에마

 

청년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쳐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작년부터 교리문답들과 십계명 관련 책들을 살폈다. 그중에서도 김용규의 <데칼로그>는 단연 압권이었다. 이 책은 폴란드의 천재 감독이라 불리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데칼로그>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때 저자는 키에슬로프스키가 십계명을 해석하는 원리를 존재론적 해석이라 명명한다. 존재론적 해석이란 서양철학사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정립이 되어 온 존재론과, 교부신학 혹은 정통신학을 따라 십계명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탐욕에 종이 된 사람이 존재의 명령에 순종할 때 참된 자유와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원리로 각 계명을 해석한 것이다.

 

저자는 각 계명들마다 먼저 영화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그 내용을 해석한다. 그렇게 내용을 전개할 때, 플라톤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철학자들로부터 현대철학자들에 이르는 철학자들의 인간 이해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십계명 해석을 소개하고, 그러한 논의들을 결합한다. 놀라운 점은 저자가 이러한 해석을 시도하면서 깊이를 더할 뿐 아니라 쉽게 설명하고 흥미까지 더했다는 것이다. 책이 워낙 재미있어서 이 책의 원작(?)이 될 수 있는 영화(10....영화가 오래 돼서 그런지 싸다.)까지 사서 볼 정도였다.

 

모든 챕터마다 저자가 성실하게 연구했고,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참 많이 수고를 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처음에 제시한 존재론적 해석을 기반으로 각 계명들을 일관되게 해석한다. 각 챕터마다 인간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져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특히 저자는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얼마나 탐욕스럽게 살아가는지, 돈의 유혹과 억압에 얼마나 많이 노출이 되어있는지에 대해서도 피부에 와 닿게 이야기한다. 거의 모든 계명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문제와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의 약하고 악한 모습들을 다루는데, 그중에서도 마지막 계명에서 저자는 부채인간이 되기까지 탐욕에 의해 휘둘리는 인간을 적나라케 보여주며 10계명이 우리를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각 챕터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주장을 요약해서 정리해 놓았고, 150페이지에 걸쳐 저자가 인용한 인물과 전문 용어들에 대한 해설까지 친절하게 더해주었다. 책을 좀 더 기억해보고, 다음에 활용해보려고 책 전체를 요약해보았는데, 사실 아래의 결론만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그렇게 하지 말걸....하는 생각도 든다.

 

십계명은 결국 단 하나의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때 다른 신이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각종 우상에 불과하고, 나머지 아홉 계명은 단지 1계명에 대한 순차적이고 구체적인 부연 설명에 불과하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구약 성경을 꿰뚫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구원, 곧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죄란 신에게서 돌아선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각종 탐욕에 의한 우상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서는 한결같이 신을 사랑하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쳤고, 십계명은 이러한 신의 의지가 구체화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자유에 대한 위대한 선언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러한 신적 자유를 부여하기 위하여 계약을 허락한 것이다.”

 

십계명의 해석 뿐 아니라 그것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도 있게, 그리고 재미있게 소개한 이 책,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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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공동생활 디트리히 본회퍼 대표작 1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정현숙 옮김 / 복있는사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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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성도의 공동생활. 본회퍼. 복있는사람

 

본회퍼의 책들이 새롭게 번역이 되어 나왔다고 해서 온라인 서점을 통해 한 번 훑어보았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책의 디자인! 이렇게 책이 예쁘게 나올 수도 있나 싶었다.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좀 찾아보다 1960년대 문익환 목사님께서 번역했던 신도의 공동생활서문을 볼 수 있었다. 너무나 강력하고 매력적인 소개가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처음에는 이다식의 문장으로 옮겨 보았다. 그런데 차츰 그 내용이 너무나 간곡한 권면이라고 느끼게 되면서, 나는 이것을 편지체로 옮기고 싶어졌다.... 사실 이 책은 핑겐발데에 있는 지하 신학교의 학생들과의 공동생활의 결실이요,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 교회를 향하여 주는 극히 구체적이고도 간곡한 권면의 말씀이다믿을 만한 분이 이 정도까지 멋진 소개를 하는데, 하루 빨리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익환 목사님의 말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간절한 권면이기에 요약도 경어체로 해보았다.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제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교제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반드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모인 공동체라면 서로의 약하고 악한 모습에 실망할지라도 공동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든든하게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를 통해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는 가운데 공동체에 주어진 약속을 붙들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약속을 붙들며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공동체 안에 있는 지체들을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합니다. 모두가 전체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어떠한 차별의 논리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가능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모든 공동생활의 존폐가 달려 있습니다.

 

함께 있는 날 우리는 하루의 아침을 공동(가족) 기도회로 모일 수 있습니다. 특히 시편을 통해 기도하면서 말씀으로 기도하는 법,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지, 어떻게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는 지에 대해서 익힐 수 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함께 성경을 읽습니다. 이때 해당 본문을 성경의 전체라는 맥락 아래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무한한 내적 관계들 속에서 예수님의 증거가 좀 더 명료해지기 때문이고, 그렇게 전체로서의 성경을 연속해서 읽어 나갈 때, 우리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 속으로 옮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읽기에 이어 공동 찬송과 공동의 기도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함께 찬송하고 공동의 간구를 반복하면서 개인주의적인 기도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공동의 기도회가 끝나면 우리는 식탁교제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축제와도 같은데, 안식일을 회상하도록 돕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식탁 교제가 나만의 양식이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라도 떡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 중 누구도 굶주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루는 기도와 노동이라는 이중적인 일로 특징지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 각각이 별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의 고유한 권리를 확보하는 곳에서 기도와 노동이 서로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하루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하루의 모든 생활에 질서와 규율이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저녁 기도의 자리는 공동의 중보기도를 위한 자리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모든 불의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홀로 있는 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정신 요양소가 아닙니다. 자기 도피를 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은 공동체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왜곡시킵니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공동체를 주의해야 하고, 반대로 성도의 교제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홀로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있으며 침묵을 배울 수 있는데, 이때의 침묵은 전적으로 말씀을 기다리는 행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침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기도, 특히 중보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원수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은혜받은 죄인의 얼굴로 변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주의할 것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특히 목사라면) 적지 않은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섬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곳마다 불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부터 그에 대항하여 진지를 구축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강자와 약자가 생긴다는 것인데, 이러한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악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혀를 훈련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 비할 나위 없이 소중한 형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제의 소중함을 발견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토록 다양하다는 사실도 발견합니다. 어느 지체라도 소중하지 않은 지체가 없기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체가 생겨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구체적인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어야 하고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고, 타인의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섬김이 어렵지만, 약자는 교만을, 강자는 무관심을 경계하며 구체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섬길 때에만 우리의 모든 말들이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 고백과 성찬 경건한 자로서 교제만 하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으로서 교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완전히 고독한 외톨이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우리의 죄를 서로에게 고백할 때, 성도의 교제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지고, 십자가로 가는 돌파를 이룰 수 있고, 새 생명으로 가는 돌파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상대에게 나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죄고백은 아주 좋은 성찬의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형제들과 화해하고, 은혜를 영접하고, 용서와 새 생명을 누립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기쁨은 완전해집니다. 말씀 아래 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은 성례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무게감이 느껴진다. 또한 천재 신학자로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태도로 말하기 보다는 성도들과 함께 경험했을 구체적이면서도 따뜻한 조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참된 교회, 공동체를 추구하며 그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본회퍼였기에 특별하지 않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어느 하나 버릴 문장이 없었다.

 

요약에서도 나타나지만, 그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으로 모인 모임으로서 서로를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는 것이 아닌, 오직 섬기는 공동체다. 특히 본회퍼는 서로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함께 생활할 때 알게 되는 소소한 일들을 돕는 것을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권면들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공동체를 섬겼고, 그리스도를 섬겨왔기에 짧은 말들에도 힘이 느껴졌다. 특히 공동체성을 아름답게 가꾸고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죄 고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부분은 퍽 인상적이었다. 죄 고백 역시 철저하게 개인의 경건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용서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며, 끊임없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모임이라 주장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시간들이다.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부끄러운 교회들 가운데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사유했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구기 위하여 분투했던 본회퍼의 책이다. 목숨을 바쳐가며 불의에 항거했던 본회퍼, 그의 진짜 관심이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명저이다. 이런 차원에서 <성도의 공동생활>은 강영안 교수님의 소개처럼, 한국의 교회들이 부끄러운 모습들을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면 진지하게, 천천히 곱씹어 보면서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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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교회 - 현존하는 최고의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의 교회에 대한 확신
존 R. 스토트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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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교회 #존스토트 #IVP

 

교회의 실재가 현존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있다.”(로완 윌리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되면서도 살아 있는 교회의 성격을 항구적으로 규정해 줄 분명하고도 본질적인 표지들은 계속 있어왔다. 이 책의 목적은 살아있는 교회라고 부를 교회의 여러 특성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나의 희망은 명백하게 성격적인 이러한 특성들이 어떻게든 보존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

 

1) 살아 있는 교회의 본질적인 표지들을 고찰하기에 앞서 필요한 세 가지 가정

우리는 모두 교회에 헌신한다. 신약 성경은 교회 없는 그리스도인을 알지 못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선교에 헌신한다. 그분의 선교는 언제나 성육신을 의미한다. 안전하게 면역된 천국에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개혁과 갱신에 헌신한다. 교회는 부패 상태에 있다.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계속해서 개혁되고 갱신되는 것을 보게 되기를 갈망한다.

 

2) 자신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교회는 배우는 교회다. 성령 충만은 반지성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특히 사도들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살아 있는 교회는 돌보는 교회다. 관대함은 언제나 하나님 백성의 특성이었다. 우리 모두가 전적인 가난으로 부름을 받진 않았지만, 모두가 검소한 생활방식을 실천하며 우리의 것을 공유하고 나누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예배하는 교회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공식적이면서도 비공식적이었고, 기쁨이 넘치면서도 진중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이러한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살아있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예수님 자신이 일상으로 혹은 날마다 전도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전도를 이따금씩 하는 행위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2. 예배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함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이며, 우리의 존재 전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시편 1053절을 따라 여호와의 성호를 자랑하는 것이 예배라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 진정한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 성경의 계시에 대한 반응이다.

진정한 예배는 회중 예배. 교회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교제권을 넓히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영적 예배.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읽고 선포해야 하고, 성찬을 두려움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집행해야 하고, 간절한 찬양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진정한 초월을 경험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진정한 예배는 도덕적 예배. 우리의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3. 전도 지역교회를 통한 선교

지역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먼저 네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지역교회는 교회 자신을 이해하고(교회의 신학), 교회를 조직화하고(교회의 구조), 교회를 표현하고(교회의 메시지), 교회 자신이 되어야(교회의 삶) 한다.

 

1) 교회는 그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교회의 신학

최소한 교회에 대한 그릇된 상 두 개가 있다.

- 첫 번째는 종교 클럽 혹은 내향적인 기독교이다.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교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비회원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협동 사회다.”라고 말했다.

- 두 번째는 세속적인 선교 혹은 종교 없는 기독교다. 이기적인 종교에 대한 그들의 혐오는 정당하지만 종교 없는 기독교란 개념은 균형을 상실한 반작용이다.

- 교회를 이해하는 세 번째 방식이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 그릇된 속에 있는 진리를 결합함으로써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세상을 섬기는 책임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이중 정체성 혹은 성육신적 기독교이다.

 

2) 교회는 그 자신을 조직화해야 한다: 교회의 구조

우리의 정적이고 경직되고 자기중심적인 구조는 이단적이다. 분주하고 교회 중심적인 프로그램은 가정생활에 해악을 끼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교회는 5-10년 마다 자신을 평가하고, 교회의 구조가 그 정체성을 얼마나 제대로 반영하는지 알기 위한 조사를 행해야 한다.

특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하므로 지역 사회 조사가 필요하다.

지역 교회에 대한 면밀한 질문들이 필요하다.(교회 건물, 예배 의식, 교회 구성원, 교회 프로그램 등)

 

3) 교회는 그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교회의 메시지

점점 더 다원주의적으로 되어 가는데, 우리는 이러한 복음을 세계 속에서 어떻게 공식화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절대 부동성.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표현(이신칭의, 하나님의 나라, 해방, 중생 등등)이 사용되지 않는다면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이들은 신약성경 자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복음의 형식에 풍부한 다양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절대 유동성. 신약 성경에는 모든 다양성을 지배하고 초월하는 뿌리 깊은 통일성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는 경향도 피해야 한다.

우리는 고대의 말씀과 현대 세계 사이, 이미 주어진 것과 열린 상태로 남겨진 것 사이, 내용과 상황 사이, 성경과 문화 사이, 계시와 상황화 사이의 변증법을 두고 씨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성경에 대한 충성과 사람에 대한 민감성이 둘 다 필요하다.

 

4) 교회는 그 자신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삶

하나님의 비가시성은 신앙에서 하나의 큰 문제다. 구약 성경의 유대인들이 직면했던 것처럼 오늘날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토대 위에서 자라난 사람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비가시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오셨는가?

그분이 만드신 세상 속에서 자신을 가시적으로 계시해 오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자신을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보여주신다.

 

4. 사역: 열둘과 일곱

일곱 집사를 세운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원리 하나가 새겨져 있다. 모든 사람 각자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이 원리를 세 가지 긍정적인 진술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을 사역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서로 다른 사역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은 말씀 사역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리 업무로 산만해지지 않고 그들의 소명에 집중하기를 기대하신다.

 

이 원리에 동의하면서 목사직에 정관사를 붙인 사역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것은 어제나 교회에 커다란 해를 끼치게 한다. 지역 교회의 리더십은 목양적이면서 동시에 복수적이어야 한다. 다음은 바울이 제시한 목양의 은유들이다.

 

1) 사도들의 모범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된 메시지 어느 한 부분도 생략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 공동체의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도시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다.

 

2) 거짓 교사들의 침입 양무리를 맡은 목자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부여되었다. 첫째는 양무리를 먹이는 일이고, 둘째는 이리들을 내쫓는 일이다.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오류와 싸워야 한다.

 

3) 백성들의 가치(양무리) - 양무리들이 있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다. 교회는 독생자의 피로 사신 교회다. 감독을 임명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도록 동기 부여해 준다.

 

5. 교제: 코이노니아의 의미

신약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의 핵심에는 공동의라는 뜻의 형용사 코이노스가 있다.

공동의 유산. 우리는 나라와 문화와 교회가 다르고 기질과 은사와 관심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위로자 되시는 성령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신다.

공동의 봉사. 코이노니아는 물질뿐 아니라 복음에 대한 지식, 은사도 함께 나누라 도전한다.

상호책임. 어느 누구도 전적인 수혜자 혹은 전적인 기부자가 아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일에서 협력 관계에 있다.

 

6. 설교: 다섯 가지 역설

1) 진정한 기독교 설교는 성경적이고 동시대적이다. 성경과 동시대에 다리를 놓기 위해서는 깊은 협곡의 양면을 연구해야 한다. 익숙해질 때까지 성경을 연구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연구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이중적 경청이라 부른다.

 

2) 기독교 설교는 권위적이면서 동시에 잠정적이다. 설교자들은 교리와 불가지론의 요소를 겸비해야 한다. 분명하게 계시된 것들에 대해서는 교리적이어야 하고, 비밀한 것들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성경으로 인도해서 그들이 성경에서 스스로 풀을 찾아 먹도록 권해야 한다.

 

3) 기독교 설교는 예언적인 동시에 목양적이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계시하신 교리적 진리와 윤리적 기준을 증거한다는 의미에서 예언적이고, 성경적 진리를 더디 믿는 사람들과 성경적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다룬다는 의미에서 목양적이다.

 

4) 설교는 은사인 동시에 공부하는 설교자를 통해 만들어진다. 칼빈은 먼저 학자가 되지 않고서는 영영 훌륭한 말씀 사역자가 될 수 없다고 했고, 스펄전 역시 공부에 더 이상 씨를 뿌리지 않는 사람은 설교단에서 더 이상 거두지 못할 것이라 했고, 빌리 그레이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은 사역을 다시 시작한다면 자신이 했던 것보다 세 배는 더 공부하고, 더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5) 다섯 번째 역설은 설교는 깊은 사고와 열정으로서, 지성과 감정이 연동하고, 명쾌한 사고와 깊은 정서가 겸비된다.

 

7. 연보: 열 가지 원리

1) 기독교의 연보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다.

2) 카리스마, 즉 성령의 은사일 수 있다.

3) 연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고무된다.

4) 기독교의 연보는 비례적인 연보이다.

5) 균등에 기여한다. 이때의 균등은 획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육 기회의 균등, 극단적인 사회적 불균형을 차단에 기여할 수 있다.

6) 면밀한 감독이 필요하다.

7) 우호적인 경쟁이 가능하다.

8) 기독교의 연보는 추수와 닮았다.

9) 기독교적 연보는 연보의 목적에 따라 각각의 상징적(신학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

10) 진정한 연보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증진한다.

 

8. 영향력: 소금과 빛

예수님께서는 소금과 빛이라는 모델을 통하여 공동체적으로는 자신의 교회에 대한, 개인적으로는 제자들에 대한 네 가지 진리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한다.

 

1) 소금과 빛의 진리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배적인 문화와 다르게 될 것!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 사회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비기독교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다. 바꿀 수 있는 무기로는 기도 / 복음 전도 / 모범 / 논쟁 / 행동 / (믿음으로 생기는) 고난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기독교적 독특성을 유지해야 한다. 기독교적 독특성이란 더 큰 의, 더 넓은 사랑, 더 고상한 야망으로 부르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특별히 우리는 비관주의에 회개할 필요가 있다. 신앙과 비관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9. 21세기의 디모데를 찾아서

디모데는 그 주변의 지배적인 문화로부터 구별되라고 부름 받았다.

 

1) 윤리적 호소. 우리는 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거룩에 이르는 과정엔 수동성이란 없다.

2) 교리적 호소.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가 지켜 낸 교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3) 경험적 호소. 영생은 새 시대의 삶이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러한 삼중적인 호소는 우리 시대에 극도로 적실하고, 균형이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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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 10 - 자유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십계명 탐구
숀 글래딩 지음, 임고은 옮김 / 죠이선교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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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에 대한 책들을 살피다가 ‘TEN 10’ 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책을 들고 훑어보니 열 명의 등장인물이 나와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형식이었다. 대개 십계명을 다룬 책들은 계명이 쓰인 배경, 각 계명의 의미, 적용 이러한 식으로 나누어 조금은 딱딱한 편인데, 이 책은 제목도, 형식도 부담스럽지 않아 집어 읽었는데, 400페이지가 조금 못되는 적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내용도 흥미로워서 오래 걸리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이 사회가 공동체로서 길을 잃었다는 것을 모두가 깊이 공감한다면서 십계명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각 계명에 대해서 다루는데 1계명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열 번째 계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역순으로 첫 번째 계명까지를 다룬다. 아마도 작가가 의도한 것 같은데, ‘에 대하여 언급하며 가르치려는 태도보다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 안타까운 상황들을 공감하려 했던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개인의 연약함이나 사악함을 차근차근 다루며 결국에는 하나님으로 이끌고 간다.

 

저자는 열 가지 계명을 모두 다루면서 다른 십계명 책들이 담고 있는 기본적인 해석들도 알차게 담아낸다. 물론 그 해석이 특별히 다양하거나, 아주 독특하진 않다. 오히려 톡톡 튀는 형식 안에 생각보다 익숙하면서 보수적인 내용들, 십계명이 인간의 자유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 계명을 인간들이 지킬 수 없다는 현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주로 오셔서 그 모든 계명들을 지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복음, 이 복음을 믿고 기도하며 계명을 지키자는 권면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사실 형식이 조금 특별할 뿐이지만. 저자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전통적인 교리 해설서들의 내용뿐 아니라 십계명을 풀어내는 순서까지도 충실하게 따른다.

 

어찌 보면 형식은 참신하지만 해석이 크게 새로울 것이 없어서 사람에 따라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등장인물 열 명을 통해 제시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 특히 천박한 자본주의로 인한 비인간화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각 개인이 직면하는 일상의 어려움과 내면의 고민들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다시 말해서 적용이 참 뛰어나다. 아마도 20년 넘게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저자의 목회 이력이 여기에 도움이 된 것 같다.

 

십계명을 연구하기 위해서 이 책 한 권만을 읽어서는 안 되겠지만, 십계명 설교나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들 혹은 십계명을 한 번도 공부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특히 그동안 너무 딱딱한 십계명 해설서만 접한 분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십계명도 이렇게 재미있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도움을 얻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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