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난 사람들 -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매튜 데스몬드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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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사람들-도시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메튜 데스몬드. 동녘. 2016.

날이 춥다. 누가 12월 아니랄까봐 체감 온도 영하 10도를 오르내리고 있다. 늦은 저녁 퇴근하면서 바로 집으로 간다. 요즘 같은 날씨엔 길에서 스마트폰을 보지도 않고 종종 걸음으로 집에 가기 바쁘다. 도착해서 문 앞에서면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뛰는 소리, 노래 부르는 소리, 싸우는 소리. 아내가 조용하라고 소리 지르는 소리 ㅋㅋ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세 살 막내가 ”아빠~“ 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온다. 아내는 ”수고했어요~“ 하면서 반겨주고, 이미 아빠에게는 관심 없는 첫째, 둘째 아이는 서로 정신없이 놀기에 바쁘다. 문을 닫고 신발을 벗을 때쯤이면 안경에 김이 서린다. 안경부터 테이블에 벗어 놓고 안아달라고 서있는 아이를 안아주고, 인사를 나눈 뒤 옷부터 갈아입는다. 그러고 보니 막내는 집에서 반팔에 기저귀만 입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지낸다. 바깥이 영하 10도가 되어도, 눈, 비가 내려도 상관없다. 조금 오래 된 아파트이긴 하지만 다섯 가족이 살기에 불편할 것이 없다. 나도 모르게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고, 긴장이 풀리며 세상에서 가장 편안 자세로 기대어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 집이 없으면 어쩌면 거의가 불가능한 일들이다.

<쫓겨난 사람들>은 제목부터 잔인하다. 책을 펴면 ”하늘에서 집세가 뚝 떨어졌으면 좋겠어“라는 시구가 등장한다. 이런 제목과 첫 페이지의 인용 구절만 봐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책의 부제처럼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고, 특별히 퇴거를 당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미국 밀워키의 한 빈민가에 들어가 현장 연구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가능한 보이는 대로 서술한다.(그렇게 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그가 2년 넘게 주목하며 지켜본 것은 집세 때문에 강제로 쫓겨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술과 약에 중독되어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동시에 이곳에서는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서로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물론 많은 경우 (흑인이면서 나이가 어린) 아빠들은 폭력이나 마약과 관련하여 투옥되는 경우가 일수였고, 남겨진 엄마들과 아이들은 정부의 지원금과 어쩌다 얻은 일자리를 통해 겨우겨우 집세를 내고, 먹을 것을 사고, 가끔은 무리를 해서 조촐한 파티를 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삶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지원금과 급여는 오랜 시간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그에 비해 집세는 어마어마하게 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들이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많은 집세를 낼 수가 없어서 쫓겨나고, 또 쫓겨났다. 이렇게 퇴거를 당하면 없는 형편에 급하게 집을 찾아야 하고, 그것이 또 기록에 남아 이전보다 좋은 환경으로 이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점점 더 열악한 곳으로, 집이라 부르기 어려운 곳으로 옮겨가고, 또 옮겨가는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 ‘쫓겨난 사람들’과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상호작용하는 집주인들이다. 외부자 입장에서는 집주인들도 그들 나름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쫓아내고, 집세를 올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분명하게 임대업을 통해 가난한 세입자들의 돈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 사람들을 두고 강력하게 비난한다. ‘벼룩의 간을 빼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라고.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임대업을 자신의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전문적으로 집을 사 모으면서 월세를 받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조금 오래 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2차 세계 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집주인이 너무 많은 집세를 요구한다는 느낌이 들면 주변의 세입자들과 함께 저항하곤 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것이 불가능해졌다. 터무니없는 집세를 요구하면 그냥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많아지고 전문화 되고 조직화 된 집주인들은 수많은 빈민들이 몰려 사는 슬럼가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귀신 같이 알고 있다. 그렇게 질 나쁜 집을 빌려주면서도 (특별히 유색인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있다는 것을 이용해 다른 괜찮은 동네의 괜찮은 집들의 집세와 크게 차이 나지 않을 정도의 집세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대업을 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합법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택 시장 내에서의 착취는 정부 지원 덕에 가능하다....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주고...보조금을 주고...집행관을 보내...강제로 내쫓는 것도...퇴거를 기록하고...공개하는 것도 모두 정부다“(415) 미국이라는 나라는 과거의 몇 번의 기회를 통해서 얼마든지 지금의 모습과 다를 수 있었다. 강제로 퇴거 조치를 당하는 사람들이 한 해에 수백만 명에 이르는 지금과 같이 끔찍한 상황에 처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와 관련하여 힘을 주어 말한다. “연방의 직접적인 주택 원조 지출은 총 402억 달러에 미치지 못했지만, 주택 소유주 세금 혜택은 1710억 달러가 넘었다. 우리는 보편적인 주택바우처를 시행할 수 있는 돈의 세 배를 주택 담보대출 이자 감면과 자본 이익 배체 같은 방식으로 주택 소유주의 이익을 위해 지출하고 있다....만일 우리가 대부분의 공공자금을 이미 부유한 이들에게 지출하고자 한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을 솔직하게 털어놔야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도 더 이상은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는 정치인들의 헛소리를 앵무새처럼 따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에서 가난이 지속된다면 그건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닌 것이다....어떤 도덕률이나 윤리적 원칙, 성서의 어떤 말씀이나 성스러운 가르침을 소환해도 이 나라가 처하게 된 지금의 상황을 변명하지는 못한다.”(422)

이 책이 비록 저 멀리 떨어진 미국의 한 중간 규모의 슬럼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서술이었지만 그리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아마도 책의 대부분이 가난, 퇴거에 대한 학문적 분석이나 통계 수치들을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여러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무수한 통계와, 치밀한 분석 자료들, 그를 분석하여 분명한 대안들을 내어 놓는다. 중요한 건 이러한 마무리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고 깊은 감동까지 주는 건 저자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수년 동안 슬럼가에서 살았고, 그것을 서술함에 있어서 자신의 시선을 최대한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학문과 결합하니 묵직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까지 생생하게 다가온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실 강제 퇴거가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처럼 빈번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물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강제로 쫓겨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있지만 미국처럼 수백만명씩 강제 퇴거를 당하는 수준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라면 집 때문에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그나마 전세 제도가 주거 안정을 도모했었는데, 그것마저도 반전세, 월세화 되면서 집 없는 사람들의 부담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다. 독거노인이나 청년들의 경우엔 그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데, 서울에 사는 청년들 중 다섯 명중 하나가 주거 빈곤층이라는 조사들도 있을 정도이다. 저자의 말처럼 집은 생명과 행복의 기초라고 할 수 있고, 모든 삶이 평화롭게, 든든하게 뻗어 나아가는데 있어서 든든한 배경이 된다. 집 때문에 불안한 상황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개개인들이 집 때문에, 그리고 집 문제로 파생하는 무수한 문제들을 당할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빠르게 해체 되면서 기본적인 치안조차 파괴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미국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 역시 그러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가 되는데 지금 이 책이 한국의 많은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집값이 올라도 너무 올라서 기뻐하는 사람은 소수인 반면, 그것 때문에 꿈마저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집을 포기하는 사람들. 이건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집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한다.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한다. 이건 자연스럽지도 않고 당연하지도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저자가 갖게 된 문제의식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올해 읽은 책 중에 단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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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 밑바닥 노동 - 야/너로 불리는 이들의 수상한 노동 세계 유스리포트 YOUTH REPORT 2
이수정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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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밑바닥 노동>, 청소년 노동인권 네트워크, 교육공동체 벗

 

얼마 전 현장 실습을 하던 고등학생이 끔찍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얼마 전에는 한 콜센터에서 실습 여고생이 자살한 사건이 모 방송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열 명에 가까운 청년 노동자들이 위험하단 주의조차 듣지 못하고 작업 후유증으로 실명을 당한 메탄올 실명 사건도 오래 된 일이 아니다. 하나 같이 사람 취급 하지 않는 조직 문화, 위험하고 주의조차 주지 않는 현장을 가지고 있었다. 더 안타까운 건 그런 곳에서 너무 괴로워 집에다, 학교에다 그만 두고 싶다고 말하면 참고, 열심히 하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면 그만두지 그래가 안 되는 이유>라는 책이 있는데, 정말 수많은 청소년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고,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거나, 몸과 마음을 다치고 있는 것이다.

 

<십대, 밑바닥 노동>은 노동 현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러 청소년들과의 인터뷰들을 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로 호텔, 패스트푸드점, 배달, 택배 상, 하차 등의 일을 하는 청소년들이 위험하고 강도가 심한 노동을 감당해야 하고, 그에 비해서 받는 돈도 적을뿐더러 얼마나 모욕적인 상황에 쉽게 노출되는지를 들을 수 있다. ‘나이가 모든 갑, 을 관계의 기본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우리의 정서여서인지, 언제든지 !”, “로 불리는 건 예사이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욕을 듣는 등의 모욕적인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배달 아르바이트는 상황이 너무 심각했다. 배달 업무 자체가 위험한데, 점점 외주화 되면서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책임을 떠안아야 하고, 조금이라도 반품되는 일을 막으려면 곡예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사고가 날 수 있고, 크고 작은 부상들을 달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배달 업종 외에도 적잖은 일들이 외주화 되면서 청소년과 같이 약자의 입장에서 부당한 일을 당할 위험이 점점 늘고 있는 것도 큰 문제였다. 게다가 여성일 경우엔 그 정도가 심해질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갑자기 퇴사 요구를 받아도, 일하다 다쳐도, 일을 하고 급여를 받지 못해도 누구에게 억울하다고 말할 곳이 애매해졌다. 회사는 외주 업체로 책임을 떠넘기고, 외주 업체는 모르는 척하거나 잡아떼기 일쑤라고 한다. 일하는 청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현실이 매우 안타까운데, 몇몇 업주들에게는 오히려 득이 된다고 하니 참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을 읽으면서 한숨짓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한숨지으며 읽다가 청소년들이 너무 착해서 이런 상황을 그냥 받아들인다.”고 현실을 서술한 부분을 보면서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그리고 금세 미안해졌다. 나도 한동안 청소년이라면 공부를 해야지 왜 일을 해?” 라고 생각하며 청소년들이 부당한 상황들을 스스로 내면화 하는 것에 일조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온갖 위험을 무릎 쓰고서라도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우리 주변에는 이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나처럼 청소년을 공부 열심히 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존재’ 정도로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재구성하여 읽기 쉽게 했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 노동의 문제들을 여러 통계와 전문가들의 분석을 더해서 나름 관련 주제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깊게 하려고 애를 쓴 책 같다. 청소년 인권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이슈화 되고 있는 시점에 읽을 수 있는 괜찮은 책 같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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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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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사계절.

<고민하는 힘>의 저자 소개가 눈에 띈다. “재일 한국인...사회 진출이 힘들어 대학원에서 유예의 시간을 갖던 중...유학의 길. 베버.푸코.사이드를 통해‘재일‘이라는 인식이 서구중심주의라는 보편적 컨텍스트에서 이해,확장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음”. 아마도 이러한 배경이 글 전체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다. 이에 더해서 그의 고민에 큰 통찰을 주고 힘을 주었던‘나쓰메 소세끼’, ‘막스 베버’를 주로 인용하며‘정체성’, ‘청춘’, ‘일’과 같이 인생에 있어서 그 의미들을 묻지 않고 지나기 힘든 주제들을 짧지만 가볍지 않게 다룬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고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은 부분은 아무래도‘청춘’에 대한 챕터였다. 저자가 청춘에 대하여 가장 강조하는 부분은 답이 없는 것을 붙잡고 과감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고,미칠 듯이 타자와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라 말한다.지금은 그러한 청춘의 모습을 보기 힘들어 졌다는 것이 저자가 안타까워하는 부분이다.저자는 여기에서 나쓰메 소세끼와 베버의 통찰이 왜 중요한지를 곳곳에서 인용하는데,이 둘이 중요한 것은 근대라는 시기,자본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그 낯을 드러내는 시기에‘인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다.그들의 통찰은 문학과 종교사회학이라는 다른 옷을 걸치고 있지만 자본이 왕노릇 하는 시기에 철저하게 개인화 된 지금의 시대에도 적실하다. (저자의 매력적인 소개 덕분에 책장에 먼지만 쌓여 있던 베버의 책<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자꾸 눈길이 간다.어서 손이 가야....ㅎㅎ)

‘고민’과 ‘관계’라는 주제는 ‘청춘’ 챕터를 넘어서 책 전반에서 다루어진다. 저자가 명시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관계와 고민은 결국 이어지는 주제가 아닐까 싶다.저자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결국 자아란 타자와 마주치면서 인식이 되고, 생겨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저자를 따르자면 사랑이란 찰나의 기쁨을 위해서 타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고민에 지속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관계를 맺어주기보다 분리하고, 단절시킨다. 여기에 익숙해진 청춘들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그리 이상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고 타자와의 관계 가운데서만 할 수 있는 치열한 생각을 어려워하는 것 같다. 아니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책을 읽다가 얼마 전 배달 어플들이 잘 나가는 이유를 나름 분석하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배달 어플들을 사용해보면 전화로 음식을 시키는 것보다 단계도 더 많고 오히려 시간도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점점 이런 어플들을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목소리조차 주고받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치열한 경쟁 속에 던져지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는데 관계 맺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사랑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타자와 깊은 관계들을 맺을 수 없으니 덩달아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고민하기 힘든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이 책을 덮으면서 제일 먼저 생각이 난 것은‘교회’였다. 내가 목사이니까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데, 교회만큼 ‘고민’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곳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해석(고민)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는다. 학문을 논하는 신학교에서 조차 그러한데, 교회는 심하면 더 심했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소그룹 모임을 장려하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눔 들은 설교자의 이야기들을 재탕하는 경우에서 그치는 경우가 정말 많다. 이러한 모습은 저자의 주장들이 교회 안에서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교회 안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데 합리적이든,그렇지 않든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고민들에 합당하게 반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얇지만 ‘관계’와 ‘고민’에 대해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나름 ‘진지하게’답하고, 우리에게 답해보라 권한다. 시간을 내서 거기에 응답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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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십계명>, 스탠리하우어워스, 복있는 사람.

주기도문과 십계명,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이라면 익숙하다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주기도문이나 십계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기도문과 십계명은 기독교 역사 내내 기본 중에서도 기본으로 여겨지고, 가르쳐졌던 것인데 의외로 그 해석들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려서부터 매주 예배 시간 마다 암송했을 주기도문이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던 것이 십계명이라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상당히 의외의 모습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개인의 차원에서 기껏해야 (지역)교회 내에서의 규범 정도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보더라도 결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데 그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이 귀한 기도문과 삶의 방식을 개인적으로, 그것도 내적으로만 가두어 놓았다는 말이다.

우선 스탠리하우어워스의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는 이런 식의 주기도문 사용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적잖은 충격이 될 만한 책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주기도는 개인과 교회 안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주기도란 무엇인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기도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밝히는 기도문이다. 동시에 그 기도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실천하며 참여해야 하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주기도는 철저하게 정치적이면서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정치적, 공적이란 말은 세상이 그어 놓은 기준에 따라 어느 편에 속하는 것을 나타낸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주기도문은 “세상이 그어 놓은 경계들 – 성, 계급, 인종, 경제 등에 기초한 – 에 반대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무엇보다 그 힘은 전 세계인의 생활방식이 되어가고 있는 소비주의를 거스를 수 있게 하고, 힘에 의한 평화를 반대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이처럼 공적이며,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주기도는 ‘예배의 요약이자 결정체’라 할 수 있는데, 매 주일 이것을 암송하는 사람들은 결국엔 주기도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가족을 넘어 다양한 나라, 민족, 문화로부터 나아온 사람들과 가족이 되는 것을 연습해야 하고, 점차 ‘우리’가 되는 것이다.

<십계명> 역시 위의 책과 비슷한 논조를 가지고 있다. 루터와 칼뱅의 십계명 해설들을 바탕으로 급진적이고, 구체적이고 공동체 중심적인 그의 십계명 해석과 적용들을 전개한다. 특별하게 새롭거나 폭넓은 논의를 전개하진 않지만 ‘십계명은 하나님 백성의 예배 방식’이라는 일관된 관점으로 십계명을 해설한다. 이 말은 윤리(삶, 실천)와 예배를 나누지 않는 저자의 신학과 이어져 있는데, 십계명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교회라면 목숨 걸고 살아내야 하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을 읽다 보면 당혹스러울 정도로 저가가 교회에 대하여 굉장한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은 참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생사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오늘날 진실함을 제대로 증언할 수 있는 곳은 교회의 강단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교회가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 줄로 알)고 말(만)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다.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그의 교회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소문으로만 그 명성을 들었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든지 <교회됨>을 더욱 기대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의 회고록 <한나의 아이>를 읽으면서 그의 매력에 빠진 이후 이 책들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책들을 읽어나가는 중에 있다. 그의 글들은 그의 보수적인 신학과 신앙을 견지해서인지 개혁주의 전통에서 자랐고 일하고 있는 나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중요시 여기며 신앙을 개인의 내적 영역에만 머물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급진적인 실천이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다며 그 중요성을 역설하는 주장은 그 어떤 윤리학자의 글들보다 도전적이었다. 왜 지금껏 그의 글들을 몰랐는지 안타까울 정도다.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스탠리하우어워스라는 탁월한 그리스도인의 해설로서 읽을 수 있는 이 책들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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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리뷰 101

풀타임 사역 시작하고 6개월인가 지나서 함께 일하는 목사님 한 분이 책리뷰, 영화 리뷰 매니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년에 영화 500, 책 500이 넘었다 했으니, 한 10년 넘게 열심히 리뷰를 쓰신 분이다. 그분의 권유로 책을 읽으면 알라딘 블로그에 짧게라도 흔적을 남겨 놓았다. 3년 가까이 된 지금 돌아보니 벌써 100개의 리뷰를 넘었네. 점심을 대강 먹고 그동안 무얼 읽었고, 그중에 어떤 책들이 좋았는지 한 번 추려봤다.


기독교 

로완 윌리엄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리처드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 리차드 미들톤.  <새 하늘과 새 땅>, 톰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그레고리 빌. <성전신학>과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스탠리하우어워스. <한나의 아이>, 베트케의 <디트리히 본회퍼 – 신학자, 그리스도인, 동시대인>, 김용규. <데칼로그>


사회과학

피케티. <21세기 자본>, 한상용. 최재훈<IS는 왜?>, 장 지글러.<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우리는 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 정희진.<페미니즘의 도전>, 케이시 윅스.<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황석영 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문학

권정생.<몽실언니>. 요나스 요나손.<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주제 사라마구<죽음의 중지>


생각보다 문학작품을 잘 안 읽었다. 이 부분이 많이 아쉽고, 사회과학 관련 책들이 눈에 많이 띄었는데, 그중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책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철저하게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을 알려줬다. 그리고....그래도 목사인데 기독교 관련 책들을 제일 많이 읽었네. 좋은 책들이 여럿 있었는데 로완 윌리엄스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이 정말 좋았다. 그러고보니 개혁주의 책들이 리뷰 101 목록에 몇 권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사상이.....ㅎㅎㅎㅎ


가만 보니 문학 작품을 좀 더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조금 힘들더라도 고전을 읽어야한다는 부채감은 더 무거워진다. 3년 동안 사역하면서 바보 되지 않으려고 나름 몸부림 쳤는데, 몇 권 안 되는 책 읽다보니 읽어야 할 책들은 훨씬 더 많이 보이고,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은 점점 많아지고, 아이들은 더 눈에 들어오고, 아내한테는 늘 미안하고...뭐 그렇다 ㅎㅎ 101이라는 숫자가 보니 괜히 기분 좋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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