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나는 그리스도인이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대상은 바로 지역 교회회중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떻게 해야 복음이 믿을 만한 메시지로 들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인간사의 최종 결론이바로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람의 권세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게 될까?
나의 주장은, 복음을 믿고 복음에 따라 사는 남자와 여자들로 이루어진 회중이 복음의 유일한 해석자이자 단 하나뿐인 해답이라는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복음으로 공적인 삶에 도전하기 위해 우리가 펼치는 여러 활동의 중요성을 부인한다는 뜻은 아니다.
복음 전도 캠페인, 성경과 기독교 서적의 배포, 다양한 집회와 수련회, 심지어는 이 책을 포함한 여러 저술과 같은 것들도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이런 것은 다 부차적일 뿐이고,
이런 것이 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믿음의 공동체에뿌리박고 또 그 공동체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께서는 책을 쓰지 않고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이 공동체의 중심에는 그분의 말씀과 행위를 기억하고 재연하는 일과 그분이 제정한 성례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를 매개로 새로운 신자가 교회에 편입되고, 그분의 부서진 몸과 흘린 피를 통해 부활의 생명에 동참함으로써 생명이 계속 새롭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 공동체는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존재한다. 그분이 그 삶의 중심이다.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할 경우 그분의 성품을반영하게끔 되어 있다.  - 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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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활절은 불멸을 말하지 않고 부활을 말합니다. 부활, 그것은 진짜 죽음인 사망으로부터.
육체와 영혼의 죽음으로부터 온 인류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능력 행사에 힘입어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절의 메시지입니다. 부활절은 인간 안에 자리한 신적 씨앗이나 자연 안에 자리한 신적 씨앗이 반복적으로 소생함을 축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절은 인간의 죄와 죽음에 관해, 하나님의 사랑과 죽음의 죽음에 관해 말합니다. 부활절이 말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 행사이지, 자연에 내재하는 법칙이아닙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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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의기양양하게 자기 영혼의 이 절정을 향할 수 있지만, 여기에는 여전히 엄중하게 존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은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로부터 우리의 환상과 문화적인 행복을 겨냥한 거대한 방해가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직접 일으키시는 방해,
곧 바벨탑 건축 이야기가 보여주는 방해입니다.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 P25

다른 길이 열립니다. 그 길은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길, 계시의 길, 은혜의 길, 그리스도의 길,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 인정받는 길입니다. "너희의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종교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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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인류가 하나로 통일되어재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응답하면, 우리는 "우리도 그런 통일을 원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류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 진리는 교리도 세계관도 종교적 체험도 아니다. 그런 진리는 정의와 사랑 같은4. 추상명사를 되풀이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하나님이 그 안에서 세상을 화해케 하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다. 진리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이며 역사적이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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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은 곧 환대라는 것이다. 경청할 때 우리는 문을 열고 손님을 안으로 들인다. 나의 공간 속으로 타인을 맞이한다. 자신을 여는 것이다. 경청은 초대이며, 그 초대된 곳에서 사람들은 약점까지 내보이며 친해질 수 있다. 제대로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우리도 모른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들어올지 모른다. 우리는 뜻밖의 상황에 마음을 열고, 낯선 이를 받아들이며, 예기치 못한 일을 듣는다. 변화에 자신을 여는 것이다. 예수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 이들 안에 오셔서 함께 먹겠다고 하셨는데, 그 문화에서 식사는 친밀한 행위였다. 사회적으로 격이 같은 사람들끼리 함께하는 일이었다. 함께 먹으면 관계가 평등해진다. 경청할 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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