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마치 (보급판)
조지 엘리엇 지음, 한애경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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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작의 15분의 1만 번역된 책이란 걸 받아보고서야 알았다. 대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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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르 사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83
밀로라드 파비치 지음, 신현철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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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서, 미로 속에서, 퍼즐 조각을 맞춰가며, 꿈을 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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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엄마 - 평범한 엄마가 세계 인재를 만드는 창의력 레서피
한젬마 지음 / 넥서스주니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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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필 소동의 그 한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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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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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발자크.
사실 읽은 지 3주나 되었다. 이 책 이후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거의 3주를 책을 읽지 않고 보냈구나.
3주가 지나는 동안 읽은 직후의 충격이 많이 가셔서, 지금은 그냥 가슴 어딘가에 덤덤한 느낌으로 자리잡았다.
읽게 된 아주 직접적인 동기는 '프로이트가 죽기 전에 곁에 두고 읽은 책'이라는 광고 문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질 수 있다면, 가지면 된다.
그러나 가질 수 없다면? 여기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첫째, 포기하거나 잊는 것. 둘째, 어떻게 해서든 갖(도록 노력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머리(이성)로 욕망과 그 결과를 시뮬레이션하고 폐기하는 방법과 몸(경험)으로 겪어서 욕망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방법.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원하는 바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욕망을 충족시킬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그 욕망의 결과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겪어서 충족하기를 원할 것이다,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돈을 갖는다면 자기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긁어 모은다거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처 욕망을 충족할 만큼 돈을 모으기도 전에 그 과정에서 이미 시들어 버린다), 알콜중독자가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려지고 건강을 해치게 된다는 걸 이성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여건을 만들어서 술을 마시고 그 결과 때이른 죽음의 손에 떨어지는 것처럼.

발자크는 이 소설에서 욕망을 이기는 두 가지 방법 -즉 욕망의 억제와 그 충동대로 살아가는 것-을, 소유자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지만 그 댓가로 소유자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만큼 줄어드는 신비의 나귀 가죽과 그 가죽을 손에 넣은 라파엘 발랑탱의 삶 속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라파엘 발랑탱은 자신의 지성을 과신하고 파리 사교계에서 부와 미모로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페도라에 대한 욕망으로 동분서주하지만,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페도라에게서도 조롱만 당하자 결국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자살 하기 전 우연히 들른 골동품 가게에서 신비의 나귀 가죽을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게 된 라파엘은 소원대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지만 자신의 눈앞에서 그 소원 성취의 댓가로 가죽이 줄어드는, 즉 자신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을 보자 이번엔 그만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저택에 자신이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아도 모든 필요한 일들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그러니까 문은 모두 앞에 서면 자동으로 열리고 식사와 옷 같은 것은 충실한 하인이 챙겨주는 대로 입고 먹는 식으로) 갖추어 놓은 후 그 안에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려고 극도로 조심하면서 식물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욕망을 이루지 못해 차라리 죽어버리려고 했던 그가, 무슨 욕망이든 이룰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죽음이 두려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표면적인 상징은 자명하다. 욕망대로 욕망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때이른)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죽음 속의 삶이라면, 욕망을 억제하며 사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 속의 죽음이라는 것. 이것이 모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손에 든 라파엘 발랑탱 앞에 놓인 모순이다.

나귀 가죽이 무서운 것은 욕망의 충족과 그에 대해 댓가를 치르는 것이 동시에 눈 앞에 보여진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당장은 괴롭지만 그 댓가는 나중에 속쓰림이나 심한 경우에는 죽음으로 치른다. 돈을 쓰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그 댓가는 나중에 카드대금청구서나 빚독촉으로 치른다. 아무리 올 것이 분명하더라도 일단 미래의 일이라면 그보다는 당장의 만족을 취하게 되는 것이 평범한 인간들의 마음인 것이다(카드회사는 이것을 이용하여 슈퍼세이브로 사람들을 꾀어낼 수 있는 것이고). 그런데 어떤 욕망의 댓가를 욕망의 성취와 동시에, 그것도 목숨으로 치러야 한다면?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계약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가죽의 능력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자기 가게에 그저 걸어놓기만 한 골동품 가게의 주인처럼. 그러나 바라는 것이 많고 강력한 인간이라면 일단 덥석 잡고 볼 것이다. 우리의 라파엘 발랑탱처럼. 그러나 자기 바램/행동의 결과-그것도 죽음이라는 결과-를 그 즉시 눈앞에서 확인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즉시 동작그만 상태가 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던 것과 가장 멀리 떨어진 상태로 내몰린다.

그런데 왜 라파엘은 그 가죽의 신비를 그렇게 믿었을까? 어차피 자살할 결심까지 했었는데, 1-2년쯤 나귀가죽을 가지고 바랄 수 있는 소원을 모두 성취한 후 그 댓가로 '쿨하게' 죽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짧고 굵은, 기억에 남는' 삶이 아니었을까. 또는 어쩌면, '가죽이 절대로 줄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빌어서 모순을 가죽 자체로 떠넘겨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내가 아직 '죽음'에 대해 힘들이지 않고 생각할 만큼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루지 못했거나 이룰 수 없는 욕심이 어떤 댓가를 치르면서라도 떨쳐 버리고 싶을 만큼 내 속에서 맹렬하게 들끓고 있기 때문인지도.

바라는 것은 많지만 얼마쯤은 여건이 안되어서, 얼마쯤은 밀고 나갈 만큼 배짱이 없어서 꾹꾹 누르면서 사는 나는, 많은 중대한 욕망을 채워서 이겨본 적도, 누르는데 성공해서 이겨본 적도 없다. 뭐 싸우지도 않고 그냥 눈치만 보는 정도에 멈추고 있으니 승패가 있을 수 없고, 이 상태가 어쨌든 져서 나를 잃는 상태보다는 낫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나귀 가죽이 주어진다면, 나는 가죽이 쪼그라들어 결국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바라고 누리는 선택을 할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소원은 '네가 앞으로 나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절대로 쪼그라들지 않기를 원하노라'로 하고! 욕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렇다고 욕망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삶도 결국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인데도, 그 모순은 머리로나 이해해 볼 뿐, 내가 골똘한 생각은 결국 이런 것이었다.. ㅎㅎ

사족1) <고리오 영감>에서 만났던 라스티냐크와 비앙숑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라스티냐크는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확실히 정했구나. 교묘한 술수를 써서 부유한 여자에게 자기 삶을 확실히 의탁하는 것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엾은 고리오 영감의 쓸쓸하고 비참한 최후를 혼자서 지켜줄 만큼 진정 '인간다운' 면모가 있었지..

사족2) 만일 발자크가 나와 동시대의 작가였대도 이렇게 좋아할 수 있었을까? 발자크는 공화주의를 부정했고, 장자 상속을 강력하게 옹호한 보수주의자였다. 하지만 필력과 문학성은 뛰어났다. 그의 소설은 자신의 시대를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떠나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그로부터 시대를 떠나 보편적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깨우는 작품을 남겼다.
이 정력적인 작가를 생각하면, 자꾸만 이문열이 떠오른다. 현재의 이문열을 감히 발자크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발자크는 거의 200년을 전 세계에서 살아남았지만, 이문열은 우리나라 사람 외에는 아직 생소한 작가이고, 그의 작품도 그렇게 오랜 시간의 시험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년 후에는 어떨지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은 우리 나라에서는 고전으로 남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황제를 위하여>는 읽지 않았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나 <레테의 연가>는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의 보수성은 이성의 영역을 살짝 넘어 수구반동에 걸쳐 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싫어하고 그의 소설도 더이상 읽지 않는다. 읽지 않아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부당할 수 있지만, <선택> 이후 그의 소설에 그런 수구반동적인 보수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내가 발자크와 동시대를 살았더라도, 발자크의 작품을 읽었을까? 아무래도 그러지 않았을 것 같다. 그의 보수성 때문에 그를 '꼴통' 작가로 단정 짓고 아예 작품도 멀리 하였을 것 같다는 말이다. 소설가의 작품이 반드시 자서전인 것은 아니다. 설사 자서전이라 하더라도, 문학 작품의 완성은 작가가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으로 성취되는 것이므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또는 발자크가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 살았더라면 19세기보다 훨씬 더한 미친 물신숭배의 시대에 발자크는 누구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마땅하다.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작가의 함량 미달의 작품을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수구보수적인 작가라 하더라도 그의 문학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문학의 역할은 독자에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경험을 넘어선 삶들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다시 이문열로 돌아가서, 이문열의 밥통 같은 사상 때문에 그의 작품을 모두 싸잡아서 비난하거나 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그의 보수성을 알기 전에 읽었던 작품에서 얻었던 감동까지 무시할 필요는 더더욱 없고. 100년 후 독자들은 이문열을 어떻게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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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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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나면 한참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소설이 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의 삶이 덮은 책장 사이로 빠져나와서 독자의 어깨 위에 무겁게 앉아 있어서 그들을 다시 책장 사이로 돌려 보내고 나는 '이렇게나 무게 없는 나의 삶'으로 건너오기가 힘든, 그런 소설이 있다. 바로 앞에서 듣는 북소리처럼, 고수는 북채를 멈추고 있는데 그 소리는 울림이 되어 내 몸통에서 진동하는 느낌과 같은 그런 소설들이. 그래서 나로 하여금 자꾸만 소설에 빠지게 하는, 그런 소설이 있다. 오래 전에는 19세기 러시아 작가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그랬다. 그리고 얼마전에 발자크를 읽고서 아주 오랜만에 그런 기분을 느꼈었다. 그리고 지금,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이다.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인간'이라기보다 무언가의 화신인 듯한, 어떤 시대(변혁이 일어나던 시대, 구체적으로는 중세와 르네상스가 겹치는 시대)에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활활 타오르는 인물 세 명과, 물결을 타듯 바람을 타듯, 납작 엎드리기도 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흔히 볼 수 있는, 가늘고 긴 인물 세 명이 얽힌다. 전자는 추醜함의 상징인 카지모도와 아름다움美과 순결의 상징인 라 에스메랄다, 그리고 외곬로 오랫동안 고인 나머지 썩어버린 정열의 상징인 클로드 프롤로 주교이고, 후자는 연극 대본을 쓰다가 망하고 라 에스메랄다 덕분에 거지패에게 의지해서 사는 작가 피에르 그랭구아르, 잘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라 에스메랄다의 목숨 건 사랑을 받지만 정작 본모습은 바람둥이 난봉꾼인 파리 순찰대 중대장 페뷔스 드 사토페르, 그리고 클로드 프롤로와 거의 스무 살 차이나는 동생으로 프롤로에게 돈을 받아서 역시 술과 노름과 사람들을 조롱하는 재미로 사는 장 프롤로이다. 하나의 성정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는 앞의 세 사람의 끝은 비참했다. 그 중 둘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자의반 타의반으로 격리되어 삶도 우울했다. 제때제때 자잘한 욕망을 발산하며 굽혔다가 섰다가를 유연히 반복한 뒤의 세 사람은 나름 불만없이 누리고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중 둘은 살아남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살아간다. 앞의 세 사람은 다른 길을 갈 수 없었거나 보려 하지 않았기에 '운명'이 마련한 길을 그대로 따라갔고, 뒤의 세 사람은 매 순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요리조리 잘 빠져 나가서 '운명'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앞의 세 명은 뭐든 넘치는 낭만적인 인간들이고, 뒤의 세 명은 그들에 비하면 보기에 하찮은 현실적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노트르담'이 있다. 연금술사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정문과 도합 열다섯 개의 종을 이고 있는 두 개의 종탑, 윗쪽에서 종탑을 둘러싸고 있는 돌이무기들, 중앙의 커다란 원화창과 끝으로 돌로 지어진 고딕식 성당 건물 자체.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초에 벌써 인구 오십만인 거대 도시 파리가 있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이들의 그림자가 어찌나 큰지 인물들은 전자이건 후자이건 모두 그 거대한 그림자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다.

여기에 빅토르 위고의 끝없이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과 중간중간 끼어드는 추임새는 마치 우리나라 판소리꾼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이 이야기꾼의 말재주와 좌중을 휘어잡는 솜씨 때문에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인데도 눈 앞에서 등장 인물들이 뛰어다니는 듯한, 책 읽은 내내 머릿 속은 인물들과 장면들과 사건들로 웅웅거렸다. 이 소설의 모든 묘사가 '생생'하지만, 특히 후반부의 거지떼의 노트르담 습격 묘사는 정말이지 카지모도가 무서워서 벌벌 떨기까지 한 것 같다.

내가 특히 이 소설에서 공감한 인물은 클로드 프롤로 주교였다. 그저 학문이라는 한 길만 보며 고독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그러느라 '인간적인' 욕망 따위는 한 방울도 흘릴 수 없어 속에 꼭꼭 눌러놓았을 뿐인데, 라 에스메랄다라는 아름다움의 화신을 보고 한 눈에 너무 깊이 반한 나머지 오랜 세월 쌓였던 정열은 한꺼번에 끓다가 결국 고약하게 변해가고 눈먼 운명이 모는 대로 끌려가는 사람. 라 에스메랄다 앞에선 프롤로 주교의 고백은 글자 그대로 뜨거워서 내가 다 데이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부패해버린 정념이라니, 그런 것까지 고백해야만 하는 그의 괴로움이라니.

그러나 라 에스메랄다는 가차 없이 그를 거절한다. 자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퍼부어지는 뜨거운 고백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아닌게 아니라 프롤로가 처음 그녀에게 고백한 장소는 차감고 축축하고 깜깜한 돌 감옥 안이었고, 라 에스메랄다는 며칠 밤낮인지도 모르는 채 그곳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에 혼자 버려져 있었을 때니 타이밍도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거절의 이유는 두려움 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너는 못생겼다. 가라!'는 것이었다. 비록 천대받는 유랑 집단인 집시의 일원이었지만, 아름다운 외모와 춤 솜씨, 노래 솜씨로 뭇 사람들의 웃는 얼굴만 보아온 그녀의 순진함은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추한 것은 악하다'라고 믿고 있어서 잘생긴 페뷔스에게서는 사랑을 발견하고 매달리는 반면, 오랜 고독과 자신도 압도당하면서 놀란 그녀에 대한 정념으로 음울한 모습을 한 프롤로 주교에게서는 악을 보는 것이었다.  

사실 작가도 처음에는 美=善, 醜=惡의 공식을 부정하지 않는 것 같다. 아름다운 라 에스메랄다는 그럴 수 없이 착한 마음씨의 소유자에 순수하고 순결하기까지 하며, 끔찍한 괴물처럼 생긴 카지모도는 프롤로 주교에게 온순한 짐승처럼 복종하는 것 외에는 귀도 먹은데다가 아주 심술궂다. 프롤로 주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되면서 적어도 카지모도는 악에서 선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으며, 페뷔스는 아예 양의 탈을 쓴 늑대인데다가, 라 에스메랄다의 선함은 선함이 아니라 그저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내면의) 선함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나아가서는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은 그 정도의 수많은 조합으로 뒤섞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정열이고, 정열이 카지모도와 라 에스메랄다와 심지어는 클로드 프롤로 주교에게까지 어느 정도 숭고함을 부여한다. 이 세 인물의 격렬함은 위고가 작품 군데군데 삽입한 파리의 사법 제도와 형별 제도의 비판(귀머거리가 귀머거리를 재판하는 카지모도의 재판이나, 마녀 재판)이나 왕에 대한 조롱(바스티유 성 루이 11세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플랑드르인들의 숨죽인 논평)같은 위트와 유머가 반짝이는 부분들조차 별 감흥없이 읽고 지나가게 할 정도이다. 그에 비하면 페뷔스나 그랭구아르나 장 프롤로는 초라하고 비루하다. 그렇게 살아남으니 좋으니하고 묻고 싶을 정도로.

발자크나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반 고흐를 보면 19세기 유럽에 대해 동경이 생긴다. 도대체 그 시대는 어떤 시대였길래 이들을 그렇게도 격렬한 작품을 쓰고 그리도록 만든 것일까? 만일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그리고 그 시대의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매일매일 이어지는 일상에 치여 자기 시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천재들을 방출하면서 들끓는 시대였다는 것을 아마도 몰랐겠지. 하지만 지금 그들의 작품을 보고 나서 타임머신 같은 것을 타고 그 시대로 가면, 그런 천재들을 낳은 시대의 끓는 대기를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을 산 것은 작년 4월 말로, 파리 여행에서 본 노트르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읽어 보려고 했었다. 내가 방문한 시간에 미사가 있었는데, 높은 천장 때문에 약간 어둑한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에 맞추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성가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와서 숨을 죽이고 울었더랬다. 옆에 앉았던 중년의 수녀님이 연민의 눈으로 내 팔을 잡고 성찬대로 끌었지만, 신앙이 없는데 차마 성찬을 받는 신성모독은 할 수 없어서 못 나가고 계속 울었었다. 미사가 끝나고 해질녁에 좁은 나선형 계단을 몇백개 올라 노트르담 종탑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내려다 보이는 센 강과 파리 시내도 아름다왔지만 벽에 매달린 각양각색 얼굴의 돌이무기들은 (그 때는 들은 풍월로만 알고 있었던) 종지기 카지모도의 외로움과 처연함을 아마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짐작하게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읽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문장이 길었다. 그리고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카지모도도 라 에스메랄다도 프롤로 주교도 한참 동안 등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압권인 건 역자 주註였다! 첫 장부터 거의 모든 역사적 인물의 생몰연대와 지명의 현재 위치에 대한 주석이 붙고, 작가가 주석 없이 인용한 원전들을 일일이 붙여 놓았다. 한마디로 어깨 숫자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가고, 그 주의 내용이란 게 읽는 흐름을 방해할 뿐 소설을 즐기는 일반 독자의 작품 이해에 큰 소용이 없는 것들이라 짜증만 쌓여갔다. 최고는 3부이다. 3부는 노트르담 종탑에서 내려다 보이는 파리의 모습에 대한 설명인데, 파리의 지리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 주가 없어도 읽기에 고역이었을 판에, 매 지명마다 여기는 현재의 어디, 저기는 현재의 어디라는 식의 주가 붙고, 어떤 건물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것은 언제 지어진 것이니까 위고가 착각했다느니, 이것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느니 하는 자질구래한 주가 끝도 없어서 그만 책을 덮고 말았다. 차라리 파리 지도나 끼워 넣고 그런 주를 붙이든가 했으면 찾아보는 재미라도 있지, 도대체 현대의 파리를 가본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 갈 일도 없는 수많은 독자에게 그런 주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번역에서 한국어 단어 선택도 고루하다. 탄상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감탄이 더 많이 쓰이는 말 아닌가? 첨두홍예는 아예 사전을 찾아봤다. 그리고 왕은 계속 임금님이라고 부르고, 거지들의 성당 습격이 있던 날 밤 바스티유에서 루이11세가 그의 신하들과 나누는 대화는 마치 우리나라 사극에서 상감 마마와 대신들이 대화하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뒷날개에는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중략)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라고 이 문학전집의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는데, 이런게 '오늘의 독자'를 감동시키기 위한 '오늘의 번역'이란 말인가? 고전이라면 아무리 발번역으로 독자에게 전달되어도 그 이야기의 힘이 결국은 독자를 감동시키리라 믿지만, 우리말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 원문은 정말 어떻게 표현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스트레스와 함께 오는 감동은 어느 정도 빛바랠 수밖에 없다.

다행히 3부를 넘어서서는 사건이 빠르게 진행되고 주석도 확 줄어서 3일만에 2권까지 완독했지만, 앞부분의 쓰잘데기 없는 역자 주석 때문에 이 소설을 그렇게나 오래 책장에 박아두었던 걸 생각하면 열이 확 오른다. <파리의 노트르담>은 누구에게나 다 읽어 보라고, 카지모도, 라 에스메랄다, 프롤로 주교만 있는게 아니라 페뷔스, 그랭구아르, 장 프롤로, 자루 수녀 귀뒬, 거지들, 성당과 파리도 있다고 권해주고 싶지만, 왠만하면 민음사 책은 피하라고 하고 싶다. 그래도 읽고 싶다면, 역주를 깡그리 무시하든가 3부는 일단 건너 뛰고 젤 나중에 읽든가(3부 끝부분에 건축의 발달과 인쇄술과의 바톤 터치에 대한 위고의 주장이 있으므로 결국 읽는 것이 낫다)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결론은,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은 'Must-Read'의 고전으로 별 다섯이지만, 민음사에서 출판된 '책'은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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