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인 인간
브라이언 크리스찬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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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he Most Human Human
Brian Christian (2011) / 최호영 역 / 책읽는수요일 (2012)

2016-3-17

헐. 사다놓은지 벌써 2년 반이나 되었어! 그 때 함께 산 책들 목록을 보니 일곱 권 중 겨우 한 권 (이 책까지 이제 두 권) 읽었네. 아니 버트런드 러셀도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세돌과 알파바둑이의 대국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는데 며칠 전 청소하다가 문득 책꽂이 한 구석에 모셔져 있던 이 책을 발견했다. 아마도 인공지능에 관한 좀 따분한 입문서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공지능 기계로부터 거꾸로 인간다움의 조건 또는 특징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에세이였다. (이로서 책을 일단 쌓는 나에 대한 변명거리 내지는 옹호의 근거도 하나 더 늘었다. 쌓인 책 중에 후회하게 만드는 책은 정말이지 거의 없다니까!)

꼼꼼하게 긴 글의 독후감을 쓸 만한 책이다. 그런데 그런 독후감은 `써야` 하지,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일단 두 개의 엄지 손가락만 쓰기에는 양이 무척 많을 테니까. 특히 작가가 `장소적합성`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관한 4장과 정보 엔트로피와 압축, 예술에 관한 고찰인 10장은 기억해두고 싶다. 나는 `인공` 지능을 가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므로 뭐, 언젠가는 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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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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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읽어보기로 한 책. 
소설 본문을 다 읽은 것은 책 잡고 이틀만이었는데 뒤에 붙은 해커들의 짧은 에세이를 오늘에서야 읽었다. 
휴고상 최종심까지 올랐다니 SF 라고 불러도 되나? 그것보단 영어덜트 모험 소설류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고.
2. 디스토피아적 상상이라기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현실적이라고. 더 많이 더 넓게 더 세게 막고 가두려고 할수록, 그 반동으로 스스로 뛰쳐 나가거나, 부지불식 간에 밀려 나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것은 멀쩡한 사람들을 모두 범죄자로 낙인 찍는 결과밖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즉 테러방지법이란 누군가 말했듯 “테러리스트 조장법˝이 되는 것이다.
3. 위양성(false positive)의 역설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의료현장에서 여러 가지 스크리닝 테스트의 정확도를 나타내는 개념이 위양성도와 위음성도, 양성예측율과 음성예측율, 민감도와 특이도 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흔한 질병에 대해서라면 위음성률이 낮은 검사가 더 유용할 것이고, 드문 질병에 대해서라면 위양성률이 낮은 검사가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개별 결과에서는 위양성으로 나오는 것이 위음성으로 나오는 것보다, 즉 실제로 나에게 병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나오는 것이, 위음성보다, 즉 실제로 병이 있는데 없다고 나오는 것보다 낫다. 없는데 있다고 나왔다면 다른 종류의 검사를 더 해서 정말 없는 것인지 확인하면 되지만, 있는 걸 없다고 보여준다면 병을 더 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병˝을 ˝인간-테러리스트˝로 대치한다면 어떨까? 실제로는 게임과 컴퓨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인데 그를 여러가지 ˝데이터˝로 환원시켜 ˝테러리스트 고위험˝이라고 본다면? 99%의 정확도로 잡아낸다고 해도 몇십 몇백만 사람들 중에서는 수천 수만 명이 걸리게 된다. 질병이나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란 말이다.
4. 그러나 실제로 현재 세계 곳곳에서 테러는 발생하고 있다. 사실 테러의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도시는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테러의 위협에 맞서려면, 즉 안전을 확보하려면 시민들 각자가 자신에게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먼저 자신의 정보를 드러내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다 그런다면 오픈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공격할 수도 있다. 뭐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숨겼겠지 라고. 그런 사람들에게 넬슨 제독의 차티에서 없어진 보석을 찾기 위해 모두 자신의 몸수색을 허용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그냥 자리를 떠남으로써 의심을 사고 만 어떤 장교의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싶다. 보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고, 나중에 그에게 미안해진 넬슨 제독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가난한 집에서 가족에게 먹일 음식 몇 가지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머니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다.
한편, 그렇게 사생활을 내주고 얻는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생활이 없다면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정체성이 없는, 모두와 같은, 자기자신이 없는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삶은 삶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저 숨 쉬니까 생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나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생활과 안전은 하나를 얻는 댓가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그런 상호배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저것 하다가 생각나면 쓰다보니 삼일째 쓰고 있고 좀 지겨워졌다… 아무튼 결론은 ˝테러방지법˝이란 ”(법에 의한) 테러리스트 양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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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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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s for Algernon
Daniel Keyes (1966) / 김인영 역 / 동서문화사 (2판, 2006)

프랑스어 펜팔을 위해 프랑스어로 된 한국어 교재를 찾으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FNAC.com에서 ˝당신 인생에서 꼭 읽어야 할 책 20권˝ 쯤 되는 리스트에서 발견한 책. 설마 했는데 한글 번역판이 있었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것이라 역간 망설이긴 했지만 (번역의 질이 미덥지 않았고 책의 생김새는 촌스럽다...) 2006년에 재판 찍은 것이 아직도 절판되지 않았다니 (나름 SF를 많이 구경했다 생각했었는데 처음 들어본 책으로서) 뭔가가 있는 거겠지.

그리고, 정말 뭔가가 있었다. 긴 소설은 아니지만 아무튼 간만에 읽다가 밤 샐 뻔. 플롯 자체는 60년대의 상상력이니 21세기에는 오히려 익숙하고 진부한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話者]가 지능의 극단을 경험하면서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지적 심리적 변화를 관찰하여 보고하는, 이를테면 ˝자기고백˝의 형식은 플롯에 상관 없이 읽는 이의 마음을 직접 두드리는 무엇이 있다.

인생에서 지능보다 중요한 건 많다. 당연하다. 또한 이 말이 지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닌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 -나 아닌 타인과의 유대, 연대로 확장될 수 있는-이라고 한다. 동의한다. ˝모든 것˝(무엇이든 간에)에서 ˝사랑˝을 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까지. 그러나 인생은 사랑 외에도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공기, 햇빛, 자유, 기타 등등, 물론 지능도 포함되고. 부족하거나 없어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생존˝과 ˝삶˝은 다르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를 나는 기꺼이 이해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겠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곧 삶의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삶을, 꺼내놓고 고르란다면 고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 이야기의 끝이 좋을 수 없는 것은 현재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인데 한계가 어디인지를 알려면 저질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불완전함이다. 이런 불완전함을 묻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SF˝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역자 후기를 보니 이분은 아마도 이 소설이 SF란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지능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영혼의 순수함, 이런 걸 얘기하는 걸 보니 이 이야기를 지능 대 순수함에 대한 우화 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심지어 초판 때 한국어 제목은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나날들˝이었단다. 절대 찾지 않았을 제목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이야기는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지금 세상 어딘가에서는 이를 현실화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보의 영혼의 순수함을 지켜주는 것보다 그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그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라 믿기 때문일 거다. (물론 바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찰리가 똑똑해져서 자기의 인격을 드러내보이지 않았다면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걸핏하면 잊었겠지. 그래서 그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어도 진정한 인간 동료로 대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읽는 동안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엄스의 <사랑의 기적 Awakening>이 떠올랐다. <사랑의 기적>은 다시 보고 싶다. 로빈 윌리엄스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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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바트 어만 지음, 강창헌 옮김, 오강남 해제 / 갈라파고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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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6
읽는데 한 달이나 걸렸는데 지루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기 전에 침대에 엎드려 잠 올 때까지 읽었는데 고작 하루에 고작 `몇 페이지`밖에 진도를 못낸 걸 보면 뭐 흥미진진해서 잡은 즉시 밤새울 정도로 재밌었던 건 아니었나 보지만.

예수의 죽음부터 니케아 공회의까지, `인간`으로 나서 (어쩌면 자신의 의도와 다른) 신이 된 예수의 변모를 역사적으로(즉 과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시적이고 명확한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추적해서 보여주는 책.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학과 신학은 다른 영역이고 자신은 오직 역사적으로만 고찰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가 ˝정답˝이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가 신앙인이었을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논리적-이성적으로 따져서 납득해야 하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러니까 그저 믿어야만 하고 ˝믿음이 곧 증거˝가 되는 류의 ˝사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신앙을 떠나서 생각해보니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에 별 생각없이 복종하였던 것 같다. 신앙의 본질이 그런 것 아닌가? 순종, 복종말이다.
하지만 진실한 신앙이라면 자신이 순종하는 대상을 잘 알고 분별해야 하겠지. 그래서 삼위일체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해진 거겠다. 하지만 예수가 오직 신적인 존재였는지 혹은 오직 인간일 뿐이었는지 하는 문제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 중 지극히 작은 이에게 네가 베푼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는 그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문제보다 중요할까? 신앙에 관한 한, 같은 것을 믿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왜` 그것을 믿는지를 굳이 물어야하는 걸까? `삼위일체`는 확실히 `인간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패러독스임에 틀림없다. 그런 패러독스를 `믿는 것이 보는 것`으로 밀어붙이면서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원수로 만들고 끝내는 죽이는 것이 과연 신앙일까?

요즘 우리나라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보면 신앙의 진정한 대상에 대한 성찰도 중요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건지, 목사/사제나 교회라는 `제도`와 그 `제도`의 기득권인지 진지하게 자문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자기성찰은 물론 무슬림에게도 유대인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특히 그리스도교인과 무슬림과 유대인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니 우리는 이웃! 에서 끝나면 안 되나?

깊이 생각하면서 차분하게 글을 써야하겠지만 몸에 밴 게으름을 어쩌지 못해 스맛폰에다가 이틀 동안 두들김. 다 읽고 나서 글을 쓰게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은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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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믿음˝도 행동이고 따라서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신앙˝은 파스칼의 논박처럼 그 행동의 결과가 가져올 잠재적 득실을 평가하여 ˝이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아니다. 신앙은 결국 위험회피용 혹은 수익창출용 보험을 선택하듯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 접한 기독교가 복음주의를 강조했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는 (그리고 어쩌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란 게 복음주의밖에 없는 것 같다. 여하튼 나는 논리적으로 당연히(혹은 어쩔 수 없이) 내가 가졌었던 ˝신앙˝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을 실행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일을 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지만, 그가 성공할 확률은 최소한이다. 그럼에도 성공한다면,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다. 파스칼의 도박은 비록 성공 가능성이 적다 해도 선택할 상황이 오면 위험을 택하는 게 더 낫다고 말한다. 잃을 것은 없고 얻을 것은 많다.
파스칼의 이 개념은 로메르의 영화에서처럼 개인적 관계에 대한 실존적 결정이 아니라 신학과 관련이 있었다. 계몽주의적 인간 파스칼에게 신의 존재를 믿을지 말지 결정하는 문제는 중요했다. 그가 성공할 확률은 아주 적다. 그럼에도 누군가 신의 존재를 믿기로 결정할 경우, 그가 옳았다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 것이고 틀렸다 해도 실제로 손해 보는 것은 없다. 다른 한편 믿지 않는다고 결정할 경우에는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실제적 이득은 없으나 (영원한 형벌과 같은) 막대한 손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옳은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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