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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평점 :
1.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읽어보기로 한 책.
소설 본문을 다 읽은 것은 책 잡고 이틀만이었는데 뒤에 붙은 해커들의 짧은 에세이를 오늘에서야 읽었다.
휴고상 최종심까지 올랐다니 SF 라고 불러도 되나? 그것보단 영어덜트 모험 소설류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고.
2. 디스토피아적 상상이라기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현실적이라고. 더 많이 더 넓게 더 세게 막고 가두려고 할수록, 그 반동으로 스스로 뛰쳐 나가거나, 부지불식 간에 밀려 나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것은 멀쩡한 사람들을 모두 범죄자로 낙인 찍는 결과밖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즉 테러방지법이란 누군가 말했듯 “테러리스트 조장법˝이 되는 것이다.
3. 위양성(false positive)의 역설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의료현장에서 여러 가지 스크리닝 테스트의 정확도를 나타내는 개념이 위양성도와 위음성도, 양성예측율과 음성예측율, 민감도와 특이도 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흔한 질병에 대해서라면 위음성률이 낮은 검사가 더 유용할 것이고, 드문 질병에 대해서라면 위양성률이 낮은 검사가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개별 결과에서는 위양성으로 나오는 것이 위음성으로 나오는 것보다, 즉 실제로 나에게 병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나오는 것이, 위음성보다, 즉 실제로 병이 있는데 없다고 나오는 것보다 낫다. 없는데 있다고 나왔다면 다른 종류의 검사를 더 해서 정말 없는 것인지 확인하면 되지만, 있는 걸 없다고 보여준다면 병을 더 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병˝을 ˝인간-테러리스트˝로 대치한다면 어떨까? 실제로는 게임과 컴퓨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인데 그를 여러가지 ˝데이터˝로 환원시켜 ˝테러리스트 고위험˝이라고 본다면? 99%의 정확도로 잡아낸다고 해도 몇십 몇백만 사람들 중에서는 수천 수만 명이 걸리게 된다. 질병이나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란 말이다.
4. 그러나 실제로 현재 세계 곳곳에서 테러는 발생하고 있다. 사실 테러의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도시는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테러의 위협에 맞서려면, 즉 안전을 확보하려면 시민들 각자가 자신에게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먼저 자신의 정보를 드러내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누구나 다 그런다면 오픈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공격할 수도 있다. 뭐가 켕기는 게 있으니까 숨겼겠지 라고. 그런 사람들에게 넬슨 제독의 차티에서 없어진 보석을 찾기 위해 모두 자신의 몸수색을 허용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고 그냥 자리를 떠남으로써 의심을 사고 만 어떤 장교의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싶다. 보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고, 나중에 그에게 미안해진 넬슨 제독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가난한 집에서 가족에게 먹일 음식 몇 가지를 주머니에 넣고 있었기에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머니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다.
한편, 그렇게 사생활을 내주고 얻는 안전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생활이 없다면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정체성이 없는, 모두와 같은, 자기자신이 없는 ‘나`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삶은 삶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저 숨 쉬니까 생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어느 정도나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생활과 안전은 하나를 얻는 댓가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그런 상호배타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저것 하다가 생각나면 쓰다보니 삼일째 쓰고 있고 좀 지겨워졌다… 아무튼 결론은 ˝테러방지법˝이란 ”(법에 의한) 테러리스트 양산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