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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다니엘 키스 지음, 김인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Flowers for Algernon
Daniel Keyes (1966) / 김인영 역 / 동서문화사 (2판, 2006)
프랑스어 펜팔을 위해 프랑스어로 된 한국어 교재를 찾으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FNAC.com에서 ˝당신 인생에서 꼭 읽어야 할 책 20권˝ 쯤 되는 리스트에서 발견한 책. 설마 했는데 한글 번역판이 있었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것이라 역간 망설이긴 했지만 (번역의 질이 미덥지 않았고 책의 생김새는 촌스럽다...) 2006년에 재판 찍은 것이 아직도 절판되지 않았다니 (나름 SF를 많이 구경했다 생각했었는데 처음 들어본 책으로서) 뭔가가 있는 거겠지.
그리고, 정말 뭔가가 있었다. 긴 소설은 아니지만 아무튼 간만에 읽다가 밤 샐 뻔. 플롯 자체는 60년대의 상상력이니 21세기에는 오히려 익숙하고 진부한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話者]가 지능의 극단을 경험하면서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지적 심리적 변화를 관찰하여 보고하는, 이를테면 ˝자기고백˝의 형식은 플롯에 상관 없이 읽는 이의 마음을 직접 두드리는 무엇이 있다.
인생에서 지능보다 중요한 건 많다. 당연하다. 또한 이 말이 지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닌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 -나 아닌 타인과의 유대, 연대로 확장될 수 있는-이라고 한다. 동의한다. ˝모든 것˝(무엇이든 간에)에서 ˝사랑˝을 빼면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까지. 그러나 인생은 사랑 외에도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공기, 햇빛, 자유, 기타 등등, 물론 지능도 포함되고. 부족하거나 없어도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생존˝과 ˝삶˝은 다르다. 그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를 나는 기꺼이 이해한다.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겠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이 곧 삶의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조차 할 수 없는 삶을, 꺼내놓고 고르란다면 고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 이야기의 끝이 좋을 수 없는 것은 현재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인데 한계가 어디인지를 알려면 저질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불완전함이다. 이런 불완전함을 묻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SF˝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역자 후기를 보니 이분은 아마도 이 소설이 SF란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지능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영혼의 순수함, 이런 걸 얘기하는 걸 보니 이 이야기를 지능 대 순수함에 대한 우화 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심지어 초판 때 한국어 제목은 ˝빵가게 찰리의 행복하고도 슬픈 나날들˝이었단다. 절대 찾지 않았을 제목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이야기는 미래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지금 세상 어딘가에서는 이를 현실화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바보의 영혼의 순수함을 지켜주는 것보다 그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그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라 믿기 때문일 거다. (물론 바보가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찰리가 똑똑해져서 자기의 인격을 드러내보이지 않았다면 그를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걸핏하면 잊었겠지. 그래서 그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어도 진정한 인간 동료로 대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읽는 동안 <벤저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로버트 드니로와 로빈 윌리엄스의 <사랑의 기적 Awakening>이 떠올랐다. <사랑의 기적>은 다시 보고 싶다. 로빈 윌리엄스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