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진실 -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
데이비드 우튼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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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의학사에 관한 책을 세 권째 연달아 읽었다. 평소에는 한 분야에 대한 책을 묶어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식의 독서가 바로 수많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독서법이긴 하지만,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주제에 대한 책을 여러 권씩 그것도 붙여서 읽느냔 말이다. 그랬는데도, 직업에 관련된 일이다 보니 이렇게도 하는구나. 이렇게 읽고 나니 뭔가 아는게 많아진 듯한 느낌이 든다. 음.
사실 이 책도 읽지 않은 채로 책장에 꽂힌 지가 2년은 넘은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알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제목보다는 부제, '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해악을 끼쳤는가?'에 혹했을 것이다.   

 

<의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의학'사상'의 역사가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의 역사와 맞닿아 있음을 횡설수설 논한 책이라면, 이 책은 의학'기술'의 역사가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걸림돌 때문에 갈짓자를 그리면서 나아왔다는 것, 즉 대부분은 실패한 역사라는 것을, 시종일관 진지하고 격앙된 어조로 빽빽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첫번째로 자신의 이러한 '실패한 의학의 역사'를 기술하려는 태도가 기존의 의학사의 관점 및 서술과 아주 다르다는 것부터 강조하고 있다. 의학도 잘 모르고, 역사도 잘 모르는 내가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겠다. 오히려, 이것이 내가 읽은 의학사에 관한 책 중 거의 첫번째이니, 앞으로 의학사 책을 더 읽는다고 하면 이 책의 논점이 기준이 될 수도 있겠지. 이런 것이 아마 폭이 좁은 독서의 단점이겠다.   

 

두번째로, 이 책이 서술하고 있는 '의학'의 역사는, 의학이 한번도 순수한 자연과학인 적이 없었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오직 의학의 '기술'적인 측면의 역사이다. 거의 2천 년 동안 서양의 의학은 질병이 아닌 '사람'을 치료했고, 따라서 치료 방법도 사혈, 사하제, 구토제로 충분했다. 이런 '의학'이 2천 년을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효과는 '치료' 때문이 아니었다. 무얼 해도 낫지 않는 병이 있는가 하면, 아무 거나 해도 나을 수 있는 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연치유력(요즘의 과학으로는 그 질환에 대한 인체의 면역의 재구축 쯤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을 기반으로 다양한 위약 효과(의사에 대한 신뢰, 환자의 의지를 모두 포함한)였다. 요즘 같으면 같은 원인의 질환을 가진 환자 백 명을 같은 방법으로 치료했을 때 적어도 서른 명에게는 효과가 있어야 그 치료법의 효용을 인정해 주겠지만, 옛날에는 그런 통계적 사고나 지식이 없었으니, 단 한 명만 나아도 그 치료법은 계속 행해질 수 있었다. 더 고약한(?) 것은 나머지 99명 중 심지어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나빠졌거나 생명을 잃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에서도 의사는 쉽게 책임을 벗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환자가 의사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거나, 지시를 '완벽하게' 따르지 못했다고 몰아붙이는 것이 간단했으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정말 종교 수준이다.

과학이 임상에 적용되는 과정의 지연을 논하는 것은 오직 '서양'의학에서만 가능하다. 왜냐면 동양 의학은 과학이 아니라 '생각의 틀', 곧 우주관이며 철학이기 때문에 어차피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실 이 책에서는 '동양 의학'이란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사의 해악'을 논할 때, '의사'에 '한의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 책이 굳이 논의를 의학 '기술'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의학의 효과, 즉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실제로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의학도 질병을 치료하거나 생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위해 존재하므로, 이 의학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해악'을 끼쳐왔는지를 물어볼 수 있겠다. 그런데 한의학이 과학이 아니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서양 의학의 발달 과정을 논하는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은 이런 질문들로 바빴다. 이런 생각 또한 '자연과학의 분과'로서의 의학 교육만 받아와서 사고의 패턴이 이미 그 쪽으로 자리잡았기에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일까.

세번째로, 저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강조하는 것은 현대에 과학이 실험실에 발견한 것이 얼마나 빨리 임상에 적용되는지를 볼 때, 16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자연과학의 발달이 의학기술에 적용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결론은 당대의 문화적, 심리적, 제도적 요소들의 저항, 즉 자연과학 이외의 요소들 때문이라고 내린다.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라고 해서 일반 의사들이나 환자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빨리 진료실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연구 결과가 발표될 때마다 그것이 임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제안은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 (사실 요즘의 연구는 임상과 관련이 높은, 임상 적응의 가능성이 많은 주제에 집중되는 경향까지 있다). 단지 그 제안이 실제로 성과물로 나오기까지는, 신약을 예로 든다면, 피할 수 없는 생체 실험(동물 실험)의 엄정함이 더욱 요구되고, 환자에게 직접 적용하는 임상 시험도 세 단계에 걸쳐서 충분한 기간과 환자에게 시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이전(정확하게는 리스터의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된 1865년)에는 생물학 연구와 생체 실험을 하는 사람들이 그 실험의 결과로 인체를 더 잘 이해하게 됨으로써 더 나은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연구는 오직 지식 추구를 위한 것이었고, 의학은 결코 과학이 아니라 갈레노스의 '철학'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의학 기술을 발달시키려고 하면, 지금까지 해온 것이 뭔가 잘못이나 부족함이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1865년 전의 의사들에게는 '전통'이라는 것이 부족하고 심지어는 잘못되었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인간의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 때문에 나은 사람들을 자신의 공이라고 쉽게 생각했고,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질병'을 치료한다는 통계적 개념의 부재로 인해, 한 명이라도 나았으면 그 치료의 효과는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 의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패의 세균설'이 확립되고 그것을 임상에 적용한 방부 외과 수술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이 17세기 전반 현미경의 발명보다 무려 150년이나 늦어졌던 것이고, 그 사이에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의사의 손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던 것이다.

효과의 평가만 문제였던 것이 아니다. 문화적이면서 심리적인 문제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의사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하는 지식의 (내용은 달라도) 양과 비용이 굉장히 높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애써 얻은 지식을 어느 날 잘못되었다고 바로 버리기에는 심리적 저항이 매우 강했다(예를 들면, 마취제가 발견된 후 바로 수술장에 적용되기 까지 5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은, 당시 외과의사는 마취 없이 수술을 할때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번개같은 속도'로 절단이나 절개를 하도록 배웠는데, 마취를 하면 그런 '번개같은 속도'를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반의도적으로 무시했다고 한다). 사실 이건 어떤 전문가 집단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며, 현재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생뚱맞은 비유일지도 모르지만, 시어머니에게 심하게 괴롭힘을 당한 며느리가 나중에 자기 며느리를 심하게 괴롭히는 시어머니가 되는 이치이기도 하고.

현대의 의학은 결코 '나쁜 의학'이 아니다. 저자도 1865년부터 의학 기술은 환자에게 적용되었을 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기술로 발달해왔다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의원성(iatrogenic)' 질병에 대한 개념도 잡혀 있어서, 환자의 상태가 나빠진다면 어떤 것이 치료와 관련된 것이고, 어떤 것이 질병 자체과 관련된 것인지를 구분하여 판단하고, 아무리 그 질병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는 치료법이라고 하더라도 그 치료 때문에 수반되는 합병증이나 후유증이 매우 크다면 과감히 그 치료법은 폐기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학은 결코 완전히 '과학과 기술'만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치유력과 위약 효과라는 것이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과학이 뉴런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완전히 설명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결국은 카오스(초기 조건의 아주 작은 변화 때문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이라는 것이 의사라는 인간이 환자라는 인간을 대하는 만나는 순간의 태도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좋은 의학'이란 환자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사의 마음으로부터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기 때문에, 의학의 전통은 '어떤 경우든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선서를 명문화한 히포크라테스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환자의 곁에서 환자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소생시킬 방법이 없노라 인정하고, 동정의 마음을 다해 손을 잡아주는 것도 결국은 의학이기에.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진보 또는 변화의 속도는 미래의 결과를 내다보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늦고, 현재의 좋은 점에 안주하려는 (혹은 현재의 장점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너무 빠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변화가 이루어져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된 이들이 이전 세상을 돌아보면, 참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사건들을 많이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굳이 그런 불합리한 사건들을 끄집어 내어 파헤쳐 보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같은 불합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게 바로 역사로부터 배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패러다임의 급격한 전환기에 처한 개인이 아날로그적 일상을 이어가면서 실제로 그런 변혁의 조짐을 읽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 '지금 변혁이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것을 읽어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다. 뭔가 달라지는 조짐이 있을라치면 온갖 방법으로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요소'를 끌어내어 일단 안심하고자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또는 나쁜(지금까지 잘못 해왔다는) 소식에 첫 번째로 보이는 태도가 아니던가. 저자는 결국 '의학사'를 예로 들어 어떤 분야에서든 진정한 진보를 가로막는 평범한 인간들의 안주하고자 하는 마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덧)

1. 교정되지 않은 오자가 많다. 열 개 정도 되는 것 같다.
2. 의학사에 영원히 이름을 새긴 훌륭한 분들의 (지금의 가치관에 의하면) 말도 안되는 바보 같은 생각과 행동에 대해 뒷담화를 듣듯 여러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가지 예를 들면 갈레노스는 '거친 바다를 본 꿈은 창자에 질병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효과적인 사하를 위해 가볍고 부드러운 사하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썼다고 한다. 이거야 원. 걸리버 여행기의 라퓨타성의 상류계급 사람들이 대변의 모양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을 유추한다(누군가를 암살해야 한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본 대변은 좀더 푸르스름하다나 어쨌다나)는 행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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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란 무엇인가 - 동서양 치유의 역사
파울 U. 운슐트 지음, 홍세영 옮김 / 궁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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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현대에 (서양)의학은 자연과학, 생명과학의 한 분과이고, 의사는 과학자이다. 과학자로서 의사는 엄격하게 '과학적인 근거', 즉 많은 관찰과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세운 '가설'이 실험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관찰과 경험에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실험을 통과한 '가설'은 이제 '과학적 사실'이 된다. 물리학이나 화학의 연구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의학(의료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은 또한 기술이기도 하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 과학자가 밝힌 사실에 근거에 기술자가 기계를 만들고 운용하듯 의사도 생명과학-의학에서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치료법을 고안, 개발하고 인체에 적용하게 된다. 복잡한 기계를 맨구석의 가장 작은 나사 하나부터 이해하듯, 일단 '정상' 인체의 구조와 기능, 작동 원리를 낱낱히 이해하고, 오작동하는 기계를 손볼 때 기계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 찾아서 그 부분을 손보듯, 인체가 '이상'을 보일 때 어느 부분, 어느 장기의 이상인지 찾아서 그 장기의 기능을 가능한 한 정상에 가깝게 돌려놓는 것이 의사가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과학자와 기술자가 하는 일이 어느 정도 독립적이라면, 의학에서는 기초의학 연구에 더 집중하는 의사와 임상 치료에 더 집중하는 의사로 나눌 수는 있어도,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의사가 과학자의 생각과 기술자의 일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계적인 것에 적용되는 과학/기술과 의학은 결정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첫째, 기계의 '정상'상태는 고정된 한 가지이고 비교적 환경과 독립적인 반면, 인체의 '정상' 상태는 사람마다 다르고, 한 사람안에서도 환경과 끊임없이 뭔가를 주고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고 넓은 '정상 범위'가 있을 뿐이다. 둘째, 기계는 그 기계의 제작을 가능하게 할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전에는 아예 존재할 수 없고, 일단 만들어진 기계는 완전히 인간의 손에 있는 '매뉴얼' 대로이지만, 인체는 그렇지 않다. 인체와 질병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 전에도 있었고, 병에 걸리면 그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일단 개입해야만 한다. '현대 의학'이라는 것이 인체의 세부적인 구조와 기능과 작동원리를 하나씩 과학적 사실로 파헤쳐 가는 동안에도 아직 과학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며, 그런 부분에서 발생하는 질병에도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방으로 더듬거리며 들어가듯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만들거나 적용해 놓고 나중에 그 원리를 찾아 매뉴얼을 만든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예를 들면 수혈 같은 것이 있다. 심한 출혈을 보이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넣어주었을 때 소생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하자. 그러나 수혈이 모든 과출혈 환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혈을 시작하자마자 거의 즉각적으로 사망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인간이 혈액형에 대해 완전히 알게 되기 전까지는 누구의 피를 어떤 사람에게 주어야 살거나 죽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운에 맡기는 수밖에. 하지만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수혈을 무조건 금지할 수 있었을까?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면역계의 많은 것들이 연구가 진행될수록 새로운 사실들, 일부는 이전에 예측했던 것과 정반대의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 와중에, 골수 이식같은 치료는 어떤 사람은 완전히 회복시키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식편대숙주반응을 심하게 일으켜서 원질병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비참한 상태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면역계의 모든 것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골수 이식 치료를 하지 말자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의과대학에서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이 성립된 이후의 지식과 기술만으로도 엄청난 양을 거의 주입식으로 학습해야 한다. 당장 임상이라는 전장에 나가기 위해 총 다루는 법 익히는 것도 빠듯한 것이다. 그래서 의학의 '자연과학' 이외의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도 못하고 졸업하게 된다. 그렇게 교육받은 의사가 자연과학의 관점과 방법론에 입각하여 인간을 '인체'라는 '기계'로 보고 의학 지식과 기술을 적용하고 평가하는 틀을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이 '자연과학 - 생명과학'의 한 분과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진단과 치료 행위 일체를 '과학적'으로 하려고 하지만, 위에서 얘기한 대로 '인간/인체'를 다루는 의학이라는 학문은 '자연과학' 속에 통합될 수 없는 아주 넓은 부분이 존재한다. 그리고 매일의 진료에서 의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당연히 의학의 이런 비-자연과학적 측면이다.

저자 서문의 일부이다.  

   
  이 책에는 서양과 동양의 의학사상이 전개되어온 흥미진진한 과정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당대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의학 사상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양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놀랍게도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에는 2천 년에 걸친 전통의 유사성이 폭넓게 존재한다. 유럽문화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이 19세기와 20세기에 중국에서 그토록 열광적으로 환영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의학'은 역동적이고 독립적인 형태의 대안요법으로서 앞으로 중국과 서구에서 장기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의학사상의 전개를 방향짓거나 규제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의료정책으로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의학이론체계만을 지정해 주어도 좋은 것일까? 세계화는 의학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 책의 내용은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교육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의학이 아닌 의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의학은 분명 관찰-가설-실험-증명의 과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자연과학이 아니다. 다만 음양과 오행이라는 선험적 틀이 있고 인체의 어떤 현상이든 그 틀에 맞추어 설명할 수 있다. 틀은 하나이지만 적용하는 방식은 제각각일 수 있다. 게다가 그렇게 제각각 적용하면 다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는데도 다 옳다! (한의학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의학은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의학'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효과를 보인다(이중맹검 시험을 하면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과학이 아니니 이런 시험이 필요하지도 않겠지만). 그래서 동서양 의학의 역사를 비교한다는 이 책을 읽으면 이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 책의 내용은..? 아주 꽝이다. 
'의학'의 '역사'를 말할 때, '의학'은 현재의 좁은 의미의 의학, 서양의 자연과학의 전통 위에 과학적 방법론을 표방하고 발전하고 있는 의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의학이 그 좁은 의미의 의학 밖에 없어서 더 당황하고 짜증났다 (그래서 저자는 '의학'의 역사라기보다 '치유'의 역사라고 부제를 달았는데 그걸 빨리 알아채지는 못했다). 하지만 겨우 '의학'이란 개념에 적응한 후에도 이 책이 꽝이란 건 변하지 않는다.
첫째, 중언부언. '누가 "의학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어떤 계기와 어떤 추동력으로 고안해냈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3천년전의 역사로부터 그 대답을 찾는 논의부터 시작하는데, '자료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이런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정도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하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없다', 이런 식으로 거의 200 페이지 가까운 중언부언이다.

(그나마 근대에 관한 서술에서는 좀 낫다. 자료의 양이 좀 나아져서 그런 건가?) 

둘째, 논지를 전개하는 방식도 지지부진하다. 마치 1차 자료를 정리하면서 자료의 여백에 자기 느낌을 써놓은 것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묶어서 책으로 펴낸 것 같다. 반어적 의문문("왜 하필 '그 사람'이 '그 시대'에 '바로 그 생각'을 했을까")에 하나마나한 대답이 수도 없고, 강조의 느낌표 남발에, 어색한 비유(창살 하나를 바꾸는 것은 쉬웠다!)들. 그냥 설명을 하지 비유가 더 어렵다.

셋째, 번역도 엉망이다. 원저는 독일어인데 영어로부터 중역한 책이라고 한다. 원저가 이렇게 딱딱 끊어지는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해서 어쩔 수 없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독해집이라니. 주어 서술어도 제대로 맞추지도 않고, 대명사도 도대체 얘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도 애매한 문장이 한둘이 아니고. 문장은 그렇다 쳐도, 한 문단을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어도 중심어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번역이다. 내가 지식이 짧아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만큼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 것이 분명히 아니다. 왜 독일어 전문번역자가 번역을 하고 한의사에게 감수받는 형식으로 하지 않고, 한의사가 영어로부터 중역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간단하다. 

첫째, '의학사상', 즉 인체와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과 틀은 동양은 동양대로, 서양은 서양대로 당대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놀랍게도 최근까지 -그러니까 자연과학의 분과로서의 의학이 확립된 현재까지-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중의학은 기능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면서 발전해온 반면, 서양의학은 (형태학적) 세부구조를 규명하는데 관심을 가져왔다.

셋째, 에너지 위기나 환경오염, 점차 비인간화 되어가는 기술 중심 의학 등 여러 가지 도전 속에서 현대인들은 (과학 중심의 서양) 의학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데, 음양오행과 순환적 세계관의 '타당성'을 지닌 중의학이 그 대안으로서, 비유기체적인 것을 지양하고 생명체적인 기에 집중하며, 따뜻함과 공감, 그리고 조화로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의학은 (특히 치유의 측면에서) 한번도 순수과학인 적이 없었으며 늘 '현실'과 '타당성'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번째까지는 그렇다는 것이니 그렇다고 치고. 네번째 결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이 책에서는 동서양의 각각의 의학사상의 변화 발전을 논의하면서 '현실'과 '타당성'을 계속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서 현실과 타당성 각각에 해당하는 원문 단어를 모르겠는데, 읽어가면서 보면 '현실'이란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실'의 깊이는 자연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깊어진다. '오염된 물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는 '현실'은 콜레라균이 입증됨으로써 '오염된 물의 콜레라균 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한다'는 더 자세하고 세부적인 '현실'이 된다. 이에 비해 '타당성'이란 '말이 되는 것',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만한 설명 쯤의 뜻인 것 같다. 따라서 '타당성'이란 '현실'이 아닐 수도, 또는 아직 발견되거나 증명되지 않은 현실일 수도 있다.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반드시 자연과학적 증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의학과 음양오행설은 확실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생각의 틀, 철학 체계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에서 이미 자연과학적으로 그 원인과 경과가 규명되어서 그것을 응용한 치료법까지 나와 있는 질병을 치료할 때도 이런 한의학과 음양오행설을 신뢰할 수 있을까? 하긴. 생각해보니 그런 질병은 원인균이 증명된 세균에 의한 질환밖에 없구나. 지금 인류를 가장 괴롭히는 병인 암과 기타 만성질환(에이즈도 아직 골칫거리지만 그 병은 원인 바이러스가 규명되었으니 더 나은 치료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빼고)은 그 복잡한 기전이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았으니 '타당성'의 영역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결론적으로, 다 읽어내는데 두달이나 걸렸고, 몇번이나 시간 아까와서 집어치우려고 했지만 그래도 끝부분에 서문에서의 질문에 대한 무슨 답이 있을까 싶어 끝까지 참고 읽었지만, 다 읽고 나서, 저자가 서문에서 내건 질문에 대한 온전한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한마디로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다 읽은 후에 아무런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 책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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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론 연대기 1 - 마법사 멀린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옮김 / 북스피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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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소설보다는 소설을(소설은 기본적으로 있을 '법한', '꾸며낸' 이야기이므로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무로 돌려버릴 수 있지만 비소설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단편보다 장편, 장편만큼 '연대기'를 좋아한다. 왜냐면 연대기에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행복하게(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 살았습니다'를 할 수 있는 한 자세히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야기를 더욱 삶에 갖다 붙게 만든다. 그리고 물론 역사 대하 소설보다는(이건 아무래도 진짜 역사에 터를 대고 있어서 맘에 안든다고 취소해 버리는 일이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판타지나 신화의 연대기를 좋아한다. <아발론 연대기>는 이런 나의 취향에 잘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날 알라딘을 하릴없이 클릭하며 돌아다니다가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처음부터 오홍!하고 잡아챘던 것은 아니다. 왜냐면 어렸을 때 분명 꽤 두꺼운 (그 당시에는 문고판 시집도 두껍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야기를 읽었고,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도 좀 기억이 났으며 (랜슬럿, 퍼시벌 같은 유명한 이름은 물론이고, 가아웨인, 갤러헤드?, 유우웨인? 같은 좀 덜 유명한(?)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1권의 소제목이 <마법사 멀린>이었다. 음. 생각해보니 멀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구나. 그리고 다시 보니 어랏, 반값이네! 이래서 집으로 데려오게 된 것이다. 결정적으로 반값이 아니었다면 매끈한 표지로 책값을 올렸다고 분개하곤 그냥 지나쳤겠지.

그런데 시작하고 보니, 내가 꽤 만만찮은 이야기 속에 발을 담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린. 그 출생부터 충격적이다. 몽마, 인큐버스라니. 그리스도 탄생의 사악한 거울상이었다니. 
그리고 모르간. 이 여자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 것도 몰랐었다. 모르간에게 아예 할당된 한 권이 있으니 이후에 더 충격을 먹겠구나. 
그리고 저자와 역자 후기에서 알게된 '역사적' 인물 아서의 진상. 어쩐지. 왜 영국 왕의 이름이 찰스 아니면 에드워드 아니면 존 아니면 헨리는 계속 되풀이되는데 그 유명한, 언젠가 영국 땅에 와서 다시 왕이 될 것이라는 아서의 아서 2세, 아서 3세는 없는 것인지 이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아서왕 이전의 켈트왕의 역사. 이건 중국의 요 임금, 순 임금,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등과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하여튼 세상은 넓고 오래된 것이었고, 그 넓고 오래된 세상의 땅들은 땅마다 민족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끝도 없이 품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켈트' 신화라는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나 고대 중국처럼 어렴풋하게라도 잡히는 건 아니지만. 특히 '드루이드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로서 충분히 매력적이고 따라갈 만하다. 게다가 이 켈트 신화라는 것이 기독교가 유럽을 덮기 전에는 문자화되지 않았고, 문자화되면서는 기독교 전승에 교묘하게 맞춰짐으로서 그 원래 의미를 더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도 읽는 재미의 일부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남의 나라 역사 신화를 읽다 보니, 내가 또 우리 나라 역사와 신화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구나 새삼 느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연대기에 비할 책이라면 삼국유사가 될까? 그렇다면 이 책을 다 읽고 삼국유사나, 이미 데려다 놓은 이이화의 한국사 책을 읽어야겠군..

한가지 짜증난다면, 저자 주는 양이 많지 않으니 그렇다쳐도, 역자 김정란의 주석은 너무 과하다. 특히 '~을 유념할 것.' 식의 주는, 먼저 책을 읽은 누군가가 여백에 자신의 생각을 메모한 식이고 강의하고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는 느낌이어서 매번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켈트 신화의 해석에 대한 책을 쓸 거라면서 뭐하러 그런 주를 달아놨는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읽는 이의 자유에 완전히 맡기려면, 아무리 아는 만큼 보게 되니 많이 알고 보시라는 노파심이라고는 해도, 그런 식의 주는 좀 자제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여튼, 일단 발을 들여놓았으니 앞으로 며칠 간은 다음엔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없이 이 연대기를 따라가면 되겠다. 무려 여덟권이다. 기대 만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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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징조들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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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항상 저자 소개, 그 다음으로 역자 소개 (역자가 있다면), 그 다음으로 출판 기록 (원서는 언제 초판, 번역본은 언제 초판, 내 손에 들어온 책은 몇 쇄인지)이다. 그러니까 나는 표지부터 한장씩 넘겨가면서 속표지도 몽땅 읽고, 차례도 읽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이 책 <멋진 징조들>의 두꺼운 겉표지 바로 안에 들어 있는 저자 소개를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러니까 언젠가 저자 소개를 꼼꼼히 읽는 이들을 위한 상(!)이 있을 줄 알았다. 네이버 글감 불러오기에 오류가 있어서 저자가 닐 게이먼 한 사람밖에 안 떴지만, 사실 이 책은 테리 프레쳇과 닐 게이먼의 공저이고, 앞표지 안쪽에 테리 프레쳇의 약력이, 뒷표지 안쪽에 닐 게이먼의 약력이 들어있다. 둘다 시도해봐야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바나나 다이커리에 대한 애정을 (사실 닐 게이면은 바나나 다이커리보다는 그걸 사 먹으라고 팬들이 부쳐주는 돈에 더 관심이 있어하는 것 같지만) 언급하고 있다. 테리 프래쳇 씨, 그리고 닐 게이먼 씨!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정말 바나나 다이커리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를 한 잔씩 꼭 사드리지요! ^^ 

 

아무튼 저자 소개부터 범상치 않게(!) 시작하는 이 책은, 묵시록의 그 전쟁, 아마겟돈이 벌어지기 전 일주일간의 긴박한(!) 상황에 대한 장황한 농담이다. 

이제 인간 세상에 아마겟돈을 내릴 만한 시기가 적당히 무르익었다고 생각한 마왕 (또는 하나님? 아무튼 그 모든 것은 하나님 외에는 결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놀랍고 원대한 계획의 일부이니까 말이다)이 적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는데, 수다스러운 악마 숭배 수녀들의 헛짓으로 아기가 바뀌어, 진짜 적그리스도는 천사든 악마든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조용한 인간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아이로 키워지고, 그 부부의 진짜 아이는 천사와 악마 모두에게 적그리스도로 오인되어 어렸을 때부터 천사와 악마가 각각 보낸 가정교사나 정원사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란다. 그리고 11년 후, 아마겟돈의 D데이 1주일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닥쳐온 아마겟돈에 대해 지옥의 네 명의 기수(죽음, 전쟁, 기아, 그리고 돌림병의 뒤를 이은 오염)들이 모두 소환된 가운데, 천사는 천사대로, 악마는 악마대로, 이 모든 것을 300년 전에 예언한 <근사하고 정확한 예언집>을 남긴 마녀 아그네스 너터의 자손인 마녀 아나테마 디바이스는 그녀대로, 마녀사냥꾼 섀드웰은 그 나름대로, 얼떨결에 마녀 사냥꾼의 조수가 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300년전의 가업을 이은 뉴튼 펄시퍼는 또 그 나름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작가는 각주의 형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끼어들려고 하고, 진짜 적그리스도인 아담 영은 마침내 그날,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선택을 한다!

번역된 책의 분량이 무려 580여 페이지에 이르지만 다루고 있는 시간은 일주일. 아마겟돈의 그날을 향해 달려가는 여러 인물들을 마치 영화에서 짧은 컷들을 이어붙인 듯 경쾌하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달려가고 있지만, 글쎄. 너무 길었다. 다음에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초반부터 잔뜩 긴장하게 하는데, 너무 오래 긴장하고 있다보니 오금이 저리고 차라리 지겨워졌다고나 할까. 뭔가 굉장한 일이 일어날 듯한 너무나 긴 긴장감.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결말. 결국은 소설 전체의 즐거움이 저자 소개의 즐거움과 엇비슷했다.. 사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한 꼭지 한 꼭지가 재치있고 재미있고 즐거운데, 이런 것을 계속 이어붙여서 몇시간이나 되는 긴 <개그콘서트>에 던져진 것처럼. 웃는 것에도 피로해지는 느낌.

소설 속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살고 있는 천사와 악마는 인간을 좋아하고 심지어는 부러워한다. 천사는 항상 옳은 일만을, 악마는 항상 나쁜 일만을 해야하지만, 인간은 때로 천사 이상의 선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악마조차 상상하지 못한 잔인한 일을 저지르곤 한다. 왜냐하면 그건 인간이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자각한 적그리스도 아담 영의 지적대로, 천사나 악마가 끼어들지 않아도 인간의 삶은 충분히 복잡하며, 차라리 그들이 인간을 가만히 냅두는 편이 인간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애초에 천사나 악마가 왜 지상에 내려왔겠는가. 그 역시 인간이 불러낸 것 아닌가? 무시무시한 자연 현상들에 맞서 두려움을 느낀 인간이 신을 부르고, 신이 그에 응답하셔서 천사와 악마를 인간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믿었다면, 신의 도움의 손길에 "감사합니다만, 저희끼리 해결해 보겠습니다. 안되면 말구요"라고 대답했다면, 신이 개입되지 않은 인간의 삶은 좀더 단순해졌을까. 

그러나 만약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그의 뜻대로 만들어다면, 모든 것이 그의 '거대하고, 형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신을 부르든, 부르지 않든. 자유 의지란 것도 진짜로는 허울 뿐인. 

그래서 세상이, 진짜 의미를 가지려면 사실은 창조주가 없는 쪽이 나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뭐 지금의 나는 사실 있든 없는 결정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상관없고 따라서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지만. <악마의 시>에 이어서 읽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ps1) 닐 게이먼의 책 중 세번째로 읽는 것이다. <베오울프>, <신들의 전쟁> 다음. 어쩌다 보니 쓴 것과는 정반대 순서네. <신들의 전쟁>과 <멋진징조들>은 같은 뿌리의 형제이다. 결국은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ps2) 역자 후기에 테리 길리엄 감독으로 영화화될 거란 이야기가 있어서 imdb를 검색해 보았는데, 나오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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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 상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세계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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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악명 높은 책이라고 해야할까. 어떤 책을 썼다고 해서 그 작가에게 현상금과 함께 사형선고가 내려지고, 책이 진열된 서점이 테러를 당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고, 번역자가 칼로 난자당해 죽는가 하면, 영국과 이란은 외교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대부분의 책에 대해서는 어떤 계기로 그 책을 선택해서 그 시기에 읽기 시작했는지를 다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블로그에 이런 글을 뚜닥거릴 때 거의 그런 계기부터 적어놓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는 그런 계기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또 다 읽는데 열흘 정도 걸렸는데 왜 열흘 전에 수많은 쌓인 책 중에 이 책을 집어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상하게도 나에겐 이런 게 중요하게 느껴진다..  

다 읽고 나서 가장 놀란 것은 이 책이 그저 '소설'이었다는 것이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그 정의부터가 작가가 꾸며낸 '있을 법한 일'이지, '있었던 일'인 사실이거나 '액면가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이렇게도 생각해보자고, 더욱 단순하게 얘기하면 '웃자'고 꺼낸 이야기인데, 여기에 대해 '죽자'고 칼을 들다니. 난 이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잘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이 소설에 대한 이슬람 국가의 반응이야말로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볼 만한 강력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맘에 안들었다면 그냥 비난 성명 한 장이나, 자국내 판매 금지 정도로 끝낼 수는 없었던 것일까(물론 그 정도만 했어도 다른 나라들에겐 대단한 웃음거리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꼭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작가를 쫓아다니고, 번역자를 죽이고, 무고한 (하긴, 그들의 입장에서는 못된 출판사와 관련된 서점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죄인이니 결코 무고하지 않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사람들까지 상하도록 테러나 해대다니. 이슬람이 자기들의 신과 예언자를 내세워 세상의 다른 종교나 무신론자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들과 무신론자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슬람 박멸을 외쳐야 할 것이다.  

소설을 둘러싼 사건에 대한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소설은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어떤 소설보다도 정신 사나운 소설이었다. 폭발하는 비행기에서 떨어지면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정신 없는데, 꿈과 현실과 마술적 현실(?)이 뒤섞인 구조에, 주어가 나오면 마침표는 대여섯 줄은 지나가야 찍히고, 게다가 영어와 각종 영어 사투리와 가지각색 인도어와 고전으로부터의 온갖 인용이 역자의 꼼꼼한 주석과 함께 들어오는 통에 도대체 이 문장의 시점은 무엇이고 내가 이 집의 어느 방에 서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정말 한참 걸렸다. (잠깐 딴길로 새서, 30년전 출판된 발자끄의 <사촌 베뜨>도 찔끔찔끔 읽고 있는데 여기엔 정말 "역자주'가 없다. 역자의 주석이 자세하게 달려 있으면 물론 세밀한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문 중에 자주 끼어드는 역자주석은 아무래도 읽는 흐름을 자꾸 끊는다. 뭐랄까, 역자가 독자에게 작품을 떠먹여주는 느낌으로, 나는 '됐어요' 하는 축이다.). 그러나 일단 현실(마술적 현실(?) 포함)과 꿈이 대충 구분이 되고, 이게 누가 하는 말인지 파악되기 시작하면, 천사 같지 않은 천사, 악마 같지 않은 악마를 따라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만화경을 보듯, 퍼즐을 풀 듯, 미로를 짜맞추듯 머리를 쥐어짜며 읽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읽지 않은 이에게는 스포일러임)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모든 인도인에게서 사랑을 받는, 발리우드의 수많은 영화에서 주로 신의 역할을 맡았던, 인간적으로도 '사랑'의 능력이 넘치는, 이름도 천사의 이름인 지브릴 파리슈타와, 인도인이지만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가능하면 뼛속부터 자신을 영국인으로 재창조하려는, 천의 목소리를 가지고 TV 성우로 일하며 주로 외계인이나 사물들의 목소리 연기를 하던, 이름도 웃기는 살라딘 참차가 같이 탄 비행기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납치된 후 공중에서 폭파되는데, 에베레스트 높이에서 영국으로 낙하하면서 두 사람은 살아남는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지브릴은 천사의 모습으로 (날개는 없지만 머리 뒤에 후광이 달린), 살라딘은 악마의 모습으로 (머리에 뿔이 나고 허리 아래는 염소 모양으로 바뀐다) 변한다.  

그렇다면 지브릴은 천사가 되고 살라딘은 악마가 된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겉모습은 천사요 악마이지만, 둘 다 자신의 몸이 변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생각하는 것도 천사답거나 악마답지 못하다. 자신의 모습이 천사와 같이 후광을 머리에 얹었다고 해서 지브릴이 갑자기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지브릴은 '사랑'의 능력과 함께 굉장한 바람둥이였다), 악마처럼 뿔이 나고 염소 발굽이 생겼다고 해서 살라딘 참차가 갑자기 사악한 생각을 하고 사악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천사의 모양을 한 지브릴은 영화를 보듯 꿈을 꾸는데, 꿈 속에서 자신은 대천사가 되어, 어떤 꿈에서는 마훈드 -혹은 무하마드- 에게, 어떤 꿈에서는 망명자 이맘, 어떤 꿈에서는 여자 예언자 아예사에게 계시를 내린다 (계시를 내린다고는 하지만, 지브릴은 항상 자기는 아무 말도 않거나 (아예사), 그들이 시킨 말을 하거나 (망명자 이맘), 마훈드의 경우에는 아예 자신이 마훈드이면서 대천사로서 말을 한다고 느낀다). 한편 더욱 비참한 모양으로 변한 살라딘은 꿈은 거의 꾸지 않지만, 일생동안 오직 진정한 '영국인'이 되기 위해 소심하고 착하게 살아온 결과물이 이런 것인가에 대해 절망하면서 그저 숨어지낼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살라딘은 갑자기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지만, 지브릴은 갑자기 머릿속에서 음성을 듣고 나팔을 사서 들고 다니며 자신이 진짜로 천사로서 신의 뜻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지브릴을 사랑하는 알렐루야 콘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금발의 얼음여왕이며, 애초에 지브릴이 인도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국행 비행기를 타도록 만든 여자)은 지브릴의 '정신분열증'을 치료하려 노력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살라딘 참차는 알렐루야 콘과 함께 있는 지브릴을 보고 새삼 질투와 원한(처음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서 경찰에 끌려갈 때 자신을 외면한 지브릴)에 사로잡혀 정말로 사악한 짓을 해서 커플을 갈라놓게 되고, 살라딘은 가책을 느끼지만 지브릴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아무튼 나로서는 천사가 되었다는 지브릴이 예쁘게 보였던 적이 없었고, 악마가 된 살라딘이 가엾지 않은 적도 없었다. 딱 한 페이지에 걸쳐, 이 소설의 진짜 화자 -신인지 악마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지브릴과 살라딘을 선택해서 각자를 천사와 악마로 변형시킨 그 이-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분은 왜 하필 지브릴이고, 왜 하필 살라딘이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밝혀달라고 요구하지 말아라. 계시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난다. 창조의 규칙은 명확한 편이다: 이것저것 만들어 차려놓은 다음에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 놓은 뒤에도 넌지시 힌트를 주거나 규칙을 바꾸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하면서 일일이 간섭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2권 p176)'고,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떠드실 따름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분이 처음부터 불쌍한 지브릴, 불쌍한 살라딘, 불쌍한 인간들을 데리고 천사 만들기 악마 만들기 놀이를 했냐는 것이다. 그것도 겨우 겉모양만 바꾸는. 겉모양을 바꾸어 주면 속도 겉모습에 어울리도록 바뀌는지 보고 싶었나? 그런데 창조의 규칙을 아는 분에게 이런 실험이 왜 필요한가? 어차피 자기가 정한 규칙대로 갈텐데 말이다..  

어쩌면 그가 규칙을 만들었지만, 규칙을 따르고 따르지 않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린 건지도 모른다. 즉 인간은 천사 옷을 입히면 천사가 되고, 악마 옷을 입히면 악마가 되는 단순 명쾌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아니면 애초에 '창조의 규칙'을 정한 자 따위가 없든지……. 그래서 지브릴은 총알을 삼키고, 살라딘은 후회를 하는지도.  

위키에서 이 소설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찾아보았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구나. 이 소설이 이슬람권에서 그렇게 강력한 반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 원제인 'satanic verses'를 아랍어로 번역했을 때, 그것이 '악마적인 꾸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이슬람이란 문화에서 '소설'이란 장르에의 노출이 적다는 점, '풍자'와 '패러디'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문화 속에서라면 애시당초 이 소설이 '웃자'고 달려든다는 것을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이슬람에서 그런 반응을 보이기 전에는 소설의 '예언자 마훈드'가 이슬람교의 '무하마드'인지도 대부분 몰랐었다고 한다. 이슬람 세계가 그렇게 작정하고 칼을 들고 나선 덕분에 서구인들은 오히려 이 소설이 그저 풍자이거나 패러디가 아니라 이슬람에 대한 일말의 진실이라도 담겨 있는게 아닌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노이즈 마케팅에도 성공적이었고 말이다. 하여튼 무슨 일이든 내가 보기에 '미친 짓'으로 보이는 일은, 상대방 입장에서 두세 번은 더 생각해 보고, 더 나아가서 그 입장에서 인정하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위키의 기사에서 몇몇 타 종교의 대표자들도 이슬람의 행동을 지지 했다고 한다. 어떤 종교에 대한 모독이든 신성모독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이유로 말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하는 생각들을 보면, 이분들이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의 신은 '알라 외에 신은 없다'는 이슬람의 신이지만, 사실 모든 유일신교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아무래도 완전한 무신론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소설,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소설 속의 시인 바알의 입을 빌려, 작가는 시인이 해야 할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거짓을 손가락질 하는 것, 어느 한 편에 서서 논쟁을 일으키고 세상을 가다듬어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정의에 입각해서, 어쩌면 천벌 받을 각오를 하고, 그 밖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신을 공격하고, 그의 손에 제대로 놀아나지 못하는, 그래서 가엾으면서도 떨어져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린 것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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