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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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정체성 -'내'가 '너'가 아니고 '나'이게 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특정한 '나'라는 사람의 경우에는 첫째는 나의 이름, 둘째는 남들에게 거의 보여 주지 않는 특이하게 생긴 신체의 어떤 부분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둘 다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세상에 남은 것이 그것밖에 없다 해도 절대 고르지 않았을, 그런 것들이다. 나조차도 종잡을 수 없이 폐쇄성과 적극성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이유가 이렇게 싫어하는 것들을 결코 떼어 버릴 수 없는 나의 일부로 붙여서 살아야만 했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이름이다. 신체 부분이야 보여주고 싶지 않으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름은 그렇지 않다. 이름은 내가 누군가와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맨 먼저 주고 받아야하는 것이기에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그런데 이름이 이상하다면? 남자인데 이름이 주로 여자에게 많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름이 좋지 못한 뜻의 단어와 발음이 비슷하다거나, 발음하기 어려워서 한두 번 말해서는 상대방이 잘 알아듣지 못해 여러번 반복해야 한다거나, 아주 드물어서 리스트에서 매번 가장 먼저 눈에 띄거나 한다면? 그런 이름은 불려지고, 그 때문에 기껍지 않은 시선의 대상이 될 때마다 이름 주인(갖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떠맡고 주인 역할까지 해야 하는 불쌍한 주인)의 마음과 인격에 세상에 대한 은밀한 공격성을 심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개명을 할 생각이 없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왜냐면 이 이름은 내 기억에는 없는, 두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사흘 동안 꼬박 고민을 하시면서 옥편의 거의 모든 한자를 뒤져서 골라주신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은 서른 해 이상의 나의 인생과 밀착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코 좋아할 순 없지만 나의 '정체성'의 일부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체념을 넘어 냉소적으로 내 이름으로 남들 앞에서 먼저 우스갯 소리를 할 경지(!)에 이르렀다.  

이 책은 네이버 <오늘의 책> 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괴상한 이름 (이 소설에서는 '고골리') 때문에 고민하는 주인공이 이 책을 단숨에 주문하게 한 이유였다. 그렇게 해 놓고도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들 틈에 끼어있다가, 발자크 다음 고골의 중단편선을 읽은 후, 고골(리)을 아예 주인공 이름으로 하는 이 소설로 넘어왔다.  

주인공인 고골리 강굴리는 인도인-미국인 2세로, 가정에서는 미국을 늘 타국으로, 인도를 집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영향 하에 있지만 미국의 공립학교를 다니면서는 미국인의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체득하게 되고, 결국은 어느 쪽에도 얼마쯤은 불편함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 있는 한국인-미국인 2세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사람이다.  

고골리 강굴리에게 인도인-미국인 2세라는 것 외에 불편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고골리'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사회적으로 불릴 인도식 이름을 짓기 전에 아명으로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으로, 고골리의 아버지 아쇼크는 10대후반-20대초반에 엄청난 기차 사고에서 요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그 때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 고골리를 삶의 안내자,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린 고골리의 진짜 (사회적) 이름은 인도에서 편지로 대서양을 건너오다가 분실되고, 아명과 (사회적) 본명의 구분에 무관심한 미국의 문화 때문에 그의 이름은 그만 고골리로 확정되고 만다. 철이 들어서 학교에 다니게 된 고골리는 자신의 이름이 뜬금 없고 (아버지의 열차사고 경험을 몰랐기 때문에), 특이한데다가, 성인지 이름인지를 묻는 질문이 항상 따라오고,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진짜 러시아 작가 고골의 삶 (완벽한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강박관념에 결국 마지막 원고를 다 불태우고 먹기를 거부하다가 의사에 의해 욕조를 가득 채운 고깃국물에 담궈지지지만 결국 아사해 버린 이)에 대해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완전히 질려 버리고, 열 여덟 살 때, 대학입학 허가서를 받아들고 부모님을 설득해서는 이름을 니킬 (잃어버린 할머니의 이름 대신 아버지가 주려고 했었던 사회적 이름)로 바꾸어 버린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자신을 언제나 니킬이라고만 소개함으로써 새로 태어난 기분을 느낀다.  

이제 고골리-니킬의 정체성은 더 복잡해진다. 열 여덟 살까지 고골리로 살아온 삶을 아는 사람이 열 여덦 이후 니킬에게는 없는,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 간에 단절이 생기고, '고골리'라는 이름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가슴에만 담긴 비밀처럼 변해 버렸던 것이다. 니킬로써 그는 학업을 지속하고 건축사가 되고 남들 하듯 연애도 하고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지만, 여전히 인도인 (태생이기에 자신의 일부란 걸 부인할 수 없으나 그 문화는 언제나 낯설게 느끼는)과 미국인 (그 문화대로 교육받고 사고하고 행동하지만 태생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는 주변인으로밖에 머물 수 없는) 사이에서 부유하며 산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가 오랫 동안 살던 미국의 집을 팔아서 자신의 방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그가 아직 고골리였을 때 선물한, 그렇지만 그는 표지조차 들춰보지 않은 채 그냥 책꽂이에 꽂아 둔 고골리의 단편선을 발견하고 속표지에 쓴 아버지의 글을 보게 된다. 소설은 거기에서 끝나지만, 고골리가 그 때 무엇을 느꼈을지 독자가 함께 느끼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고골리는 결국은 자신이 한번도 '고골리'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기에는 아버지의 삶과 그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컸으며, 그것은 또한 이름을 바꾸거나 그대로 두는 것 이상의 의미로 그의 삶의 바탕이었기 때문이다.  

역자의 소개나 책 뒷표지에 실린 문구대로 작가는 '이름이나 문화적 배경은 한 인간의 정체성과 어떤 연관을 맺는가?'라는 주제를, '사물을 묘사하는 섬세한 눈과 내밀한 욕망'과 '자신만만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조용조용 치밀하게 풀어가고 있다. 고골리는 세번의 연애를 하게 되는데, 상대 여성의 입은 옷은 물론 걸친 스타일, 읽는 책, 먹는 것까지 꼼꼼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이런 묘사로 눈 앞에서 그녀들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것 같을 정도이다. 물론 고골리에 대해서도 각 상대에 따라 옷차림이 어떻게 바뀌는지, 태도는 어떤지가 여지없이 꼼꼼히 묘사된다. 요컨대 각 인물에게 코드처럼 각각 옷과 책과 요리와 포도주가 따라다니고, 특히 세번째 여자이자 니킬과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게 되는 모슈미의 경우는, 역시 인도인-미국인 2세로서 다른 문화로의 적극적인 도피를 선택한 이였기에 이런 취향으로만 묘사되는 느낌이다.  

작가가 자신의 주제를 위해 이런 식의 인물 서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대부분 지겨웠다. 나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 외래어 (또는 외국어)로 자세히 묘사하는 문장이 싫다. 상표가 붙으면 짜증 지대로다. 나는 또한 요리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고, 무몇 줄씩이나 자세히 묘사된 걸 아무리 읽어봐야 무슨 요리인지 대부분 감도 잡지 못했다. 작가는 이름과 문화적 배경과 '취향'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 주고 싶었겠지만, 애초에 그런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취향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아마 그런 데 대한 무관심이 나의 취향일수도 있겠지만, 그런 취향만 걷어내고 보면 나와 똑같은 인간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것을 먹고 어떤 책을 읽는지에 대한 묘사가 과연 재밌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 책은 내게는 그야말로 미하일 엔데가 <끝없는 이야기>에서 주인공 바스티안의 입을 빌려 싫어한다고 말한 책, 즉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아주 평범한 이야기', '현실에서도 이미 지겹도록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이었다.  

게다가 번역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브루클린에서 남편과 고양이 노마와 함께 살며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하는' 역자 소개에서 약간 속이 뒤틀렸는데 (도대체 역자 소개에 이런 건 왜 들어가 있는지. 그게 번역의 질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문장이 크게 서걱거리는 것은 없어도 몇몇 단어의 선택이 확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가장 심한것은 '고골리'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영어 원서에도 주인공 이름은 'Gogol'인데 이걸 왜 '고골리'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고골 강굴리'와 '고골리 강굴리'는 우리말 어감이 다르다. -리가 무슨 각운을 이루는 것 같아서 더욱 괴상한 이름처럼 느껴진다 (역자의 의도가 그것이었다고 해도 이상하다. 이건 고유 명사니 그냥 옮겨 줘야지). 그리고 '수능시험'이라든가 (아마 SAT겠지? 물론 그걸 우리말로 그대로 풀어쓰면 수학능력시험 - 수능시험 쯤 되겠지만 우리나라 수능시험과는 다른 것이다), '너와집'이라든가 (이건 우리나라에서 붉은 소나무 껍질로 지붕을 해서 덮은 특정한 형태의 집을 말하는 것이다. 미국에 있을 리가 없잖아.), '아점' (이건 심지어는 표준어도 아니고 거의 우스갯 소리처럼 쓰이는 말이다. 메뉴 리스트에도 올라와 있는 영어의 'brunch'와는 다른 말이다) 까지.  

아마 내가 이전에 사건으로 꽉찬, 작가가 독자를 밀어 부치는 소설을 죽 읽어와서 갑자기 내 이야기를 조근조근 하는 것과 같은 이런 소설에 적응을 잘 못한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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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이란 무엇인가 - 동서양 치유의 역사
파울 U. 운슐트 지음, 홍세영 옮김 / 궁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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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논지를 정리하는 과정이 지루하기 짝이 없고, 전문번역가가 아닌 번역도 엉망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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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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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르가소 바다는 서인도 제도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 흐름이 느리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지역인 데다 '사르가숨'이라는 해초 뭉치들이 떠다니는 곳으로 이 해초로 인해 많은 배들이 비극적 운명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책의 뒷표지)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랫 동안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러나 가슴은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울컥함으로 꽉 채우면서, 다른 책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은, 더 오랫 동안 거기에만 잠겨 있고 싶은, 그런 책들이 있다. 이 책,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Wide Sargasso Sea>도 그랬다.

책 제목의 '광막한'이란 단어에 끌려서 클릭하였다가,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첫번째 부인 버사와 로체스터의 이야기, 어쩌면 <제인 에어>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이야기라는 걸 알고 당장 받아서 읽었다. <제인 에어>는 나에게 있어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르가소>는 앙트와네트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의 과거이다. 그녀는 자메이카에서 대농장주이자 노예주인 영국인의 딸로 태어났지만, 자메이카인에게는 물론 (대부분 흑인 노예 출신이었으니까), 영국인에게도 (영국인들은 식민지의 백인들의 혈통에 원주민이나 흑인의 피가 섞였을 거라고 내심 단정적이었던 듯. 그리고 이것이 로체스터가 앙트와네트를 불신하게 된 배경의 한 이유이기도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크리올 여자이다. 어느 곳에도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은 그녀의 인종적 배경은 아버지가 일찍 죽고, 노예해방령 때문에 집안이 몰락하고,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백치인 상황 때문에 더욱 악화되며, 이는 어머니가 부유한 백인(이 사람이 메이슨)과 재혼한 후에도 나아지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원주민 흑인의 폭동으로 집이 불타고, 그 와중에 백치 남동생이 타서 죽는 사고가 발생하고, 어머니는 미쳐 버림으로써 그녀의 어린 시절은 (제인 에어 못지 않게) 상처로만 남게 된다. 이어서 그녀는 (제인의 로우드 학교를 연상시키는) 수녀원 학교에서 사춘기를 보내게 된다. 상처투성이인 어린 시절과 이어지는 학교 생활까지는 제인과 앙트와네트가 가는 길이 비슷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두 사람의 길은 엄청나게 달랐으니, 그 이유는 앙트와네트에게는 비록 '양부'이지만 애정을 가져주는 아버지와 오빠가 있었고, 제인은 그야말로 천애고아로서 모든 것을 자신이 결정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앙트와네트는 그 시절 여자들이 그랬던 대로, 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오빠가 골라준 사람과 결혼한다. 

이 남자가 마음이 넓고 자신감이 있는 행복한 남자였다면, 아름다운 앙트와네트를 사랑하고 둘은 행복했을 수도 있다. 앙트와네트가 기대한 것이 많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 남자 또한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부터 자기 감정을 감추도록 강요 받으며 자랐고, 아버지와 형은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한 푼도 물려주지 않으면서도 가난뱅이로 만들지 않으려고, 가계가 불안한 것을 알면서도 3만 파운드라는 지참금에 아들을 팔 듯 앙트와네트와 결혼시킨 사람들이다. 그는 춥고 해가 잘 비치지도 않는 영국에서 살다가 열대지방 숲의 현란한 원색들, 진한 꽃향기들, 햇빛에 압도당하며 곧 지쳐 버리는 사람이다. 요컨대, 상처투성이인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열대의 현란한 색과 향기의 자연에 마음을 열고 지내온 앙트와네트와 속물적인 아버지와 형 밑에서 감정을 숨기는 신사로 살아온 남자 (에드워드 로체스터이겠지만, 소설 중에는 한번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여,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앙트와네트의 배다른 오빠로 자처하는 남자가 뿌리는 앙트와네트에 대한 악의적인 중상을 로체스터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인정해 버리고,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하게 통하던 육체적 만남까지도 중단해 버림으로써, 관계를 확실히 좌초시킨다. 그리고 왜 로체스터가 자신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앙트와네트는 서서히 미쳐 간다.

자신의 앞길에 대해, 바로 내일의 일부터 단호하게 자신의 결정으로 밀어붙였던 제인 에어와, 아버지와 오빠 때문에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을 결혼에 밀린 앙트와네트는 같은 남자와의 관계에서 정반대의 선물을 받는다. 앙트와네트의 파멸이 그녀의 잘못인가? 그녀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태어난 땅의 원주민인 흑인으로부터도 배척당했고, 혈통을 물려준 영국인에게도 손가락질 당했으며, 그런 이들이 모여서 제 3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만들 수도 없었던 데다가, 19세기 여자로서 남자에게 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다. 그에 비해, 제인도 비록 비슷한 시대를 타고 났지만, 제인은 달랐다. 제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할 아버지나 오빠가 없었고, 무엇보다 제인은 본토에서 자라 교육을 받은 영국인이었다. 앙트와네트의 파멸에 로체스터는 어떤 책임이 있을까? 로체스터는 크리올 여자의 순결에 대한 그 시대의 편견에다가 아버지와 형에 대한 증오까지 무의식 속에 가지고 있던 남자이다. 그러니 오고 싶지 않은 곳에 와서 지참금 때문에 크리올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무의식 속의 크리올 여자에게 딱 들어맞는 중상을 들으니 더는 이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로체스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식민지를 두고 원주민을 노예로 부리면 못된 제국주의 시대의 책임, 그러니까 인간 모두의 책임인 것이 아닐까. (비슷한 종류의 중상이 제인 에어에 대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로체스터가 그렇게 단번에 돌아섰을까? 제인은 정숙한 영국 여자이니까 질투심에 찬 비방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주지 않았을까?) 


 아름다왔던 앙트와네트가, 그녀의 시대가 덧씌운 이미지에 쓰러져 버사가 되고, 마음이 피폐해지면서 미쳐가고, 하는 과정이 사르가소 바다의 느린 물흐름처럼 처연하고 막막하다. 인간은 모두 시간이라는 거대한 팔 밑의 장기말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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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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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완독. 세권이 결국은 하나의 축을 따라가고 있으므로 책은 한권만 올리면 된다.
1권부터 따져보면 다 읽는데 반년 걸렸네. 작가가 중간에 쉰 탓도 물론 있지만.
이걸 다 읽으려고 3권 읽기 전에 조지 오웰의 1984년도 찾아서 읽었다. 뭔가 힌트가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별로 없는 것 같다. 오웰의 1984년이나 하루키의 1Q84년이나 '말이 안 된다'는 공통점 외엔.

1. 그러니까,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기 위해서 리틀 피플과 공기 번데기가 달이 두 개인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고, 두 사람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저 'honky-tonk parade'가 되었을 것을, 두 사람이 사랑이 있었기에 달이 두 개가 떠 있는 1Q84의 세상이 그저 'make-believe'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2. 3권에는 아오마메와 덴고 외에 두 개의 달을 바라보는 세번째 인물이 등장한다. 역시 아오마메와 덴고처럼 세상과 거리를 정해 놓고 홀로 존재하듯 하는 이인 우시카와. (다시 보니 1권의 표지는 아오마메, 2권의 표지는 덴고, 3권의 표지는 우시카와의 그림자인 것 같다.) 아오마메와 덴고보다, 나는 오히려 이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의 몸으로부터 새로운 공기번데기가 만들어지고, 그 번데기는 어떤 도터를 잉태하게 될까. 그의 영혼은 남아 도터로 아니면 아예 퍼시버로 돌아와 1Q85년이 열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상을 잠깐 해봤다.

3. 타이거가 왼쪽 옆얼굴을 보이고 있는, 덴고와 아오마메가 마침내 손을 잡고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달이 한 개인 세계는, 1984년과 어떤 점이 다를까. 선구는 없고, 그렇다면 노부인과 다마루가 선구의 리더를 암살할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고, 후카에리는 애시당초 있을 필요가 없고. 우시카와는 아마도 변호사 자격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덴고의 연상의 여자친구도 상실되지 않아서 금요일에 덴고와 아오마메가 함께 있는 덴고의 방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모든 세계는 동시에 존재하는 (혹은 할 수 있는) 패럴렐 유니버스의 각각의 모습일까. 아니면 그냥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 만이 있고, 1Q84는 덴고와 아오마메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겐 그저 honky-tonk parade에 지나지 않는 걸까.

4. 나의 하늘에 연한 초록색 하드보드지로 만든 창백한 달 하나를 매달아 본다. 이것이 그저 make-believe에 지나는 것이 될 수는 없다고 믿어 줄 그대, 어디에 있는지.

5. NHK 수금원의 노크.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모르겠다. 몰라서 괴롭다. 소설 속의 어떤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괴롭다는 느낌까지 든 건 또.





It's only a papermoon

Say, its only a paper moon
Sailing over a cardboard sea
But it wouldn't be make-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Yes, it's only a canvas sky
Hanging over a muslin tree
But it wouldn't be make-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Without your love
It's a honky-tonk parade
Without your love
It's a melody played in a penny arcade

It's a Barnum and Bailey world
Just as phony as it can be
But it wouldn't be make-believe
If you believed in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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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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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이라는, '책 읽기'에 대한 아주 훌륭한, 거의 성경처럼 여러 번 읽어서 체화하고 싶었던 (그렇지만 뭐 결국 그 이후로 다시 읽지는 않아서 Forgotten Book 속으로 점점 잠수해 가는 중이지만) 책의 저자인 피에르 바야르의 책들인 '패러독스' 시리즈가 계속 번역되어 나왔는지 몰랐다. 사실 그 책도 네이버의 오늘의 책에 소개되었던 것을, 제목에 혹해서 읽었기 때문에 작가에게 큰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알라딘의 '책 추천 마법사'가 전에 읽었던 책의 저자의 다른 책들 중 한 권으로 이 책을 올려준 것이다. 잘 했어요, 알라딘~!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기보단(첫줄부터 꼼꼼히 읽어야 하고, 마지막 범인이 밝혀질 때까지 맘을 졸이면서 기다리기엔 내 심장은 너무 연약하다. 푸핫), 수퍼 히어로 취향으로 브라운 신부 전집과 셜록 홈즈를 읽고, 내친 김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중 베스트라는 10권을 반값에 사서 주욱 읽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충격이었다.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을 멋지게 범인으로 만든 크리스티 여사. 가장 사소해 보였던 일을 실마리로 잡고서 휘몰아치는 추리력을 보여준 에르퀼 푸아로. 그리고 범인에게 하는 푸아로의 마지막 제안(이게 특히 소름끼쳤다. 크리스티 여사는 어쩌면 체온이 34도쯤 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 그런데 피에르 바야르는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를 묻고 있다. 이러니 내가 어떻게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것도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억에 생생한데 말이다.
책의 4분의 3 정도는 '왜 (독자에 의한) 수사가 재개될 수 있고, 재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증에 바쳐진다. 핵심은 이론 vs 망상, '적합성으로서의 진실' vs '드러남으로서의 진실'의 경계, 혹은 그 사이에 있는 세계와 그 해석에 있다.
그리고 마지막 4분의 1에서 그가 지목하는 범인은! 짠! 애거서 크리스티가 거의 대부분의 독자로 하여금 범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보다 더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며, 놀랍게도 그것이 정말이지 더 진실(!)에 가까울 것만 같다! (심지어는 이 사건이 에르퀼 푸아로 vs 제인 마플 대결이라고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가 저쪽 세상에서 이 글을 읽었다면, 흠, 그래도 누군가는 진실을 꿰뚫어 보는군 하면서 빙긋 웃을까, 아니면 자기가 내세운 범인을 완전히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한숨을 쉴까.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국어 교과서에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의 설명문(논설문?)이 있었다. 제목이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글은 지금 생각해 보면 구조주의 비평에 대한 글이었는데, 뭐 난 구조주의가 뭔지, 그 시절에도 그랬지만 그 이후로도 한 번도 공부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그냥 그 글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글의 마지막 단락이 그 이후 나의 독서 방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기억하기로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문학 작품이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하는 재미 없는 여로가 아니라, 모든 것이 갖추어서 있어서 이것저것 누려볼 수 있는 주택이다.'
그 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아하! 했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겉에서 보기에 끌리는 어떤 집에 들어갔을 때, 겉모습과는 다른 허술한 내부에 왕 실망해서 그냥 나올 수도 있고, 정말 멋진 집이지만 어쩐지 편하지 않아서 불안하게 빙빙 둘러보기만 할 수도 있고, 모든 방이 다 꽝인데 딱 한 방만 나의 맘에 쏙 들어서 그 집을 좋은 집으로 기억하고 나설 수도 있는, 한마디로 내 멋대로 느끼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김한길의 <여자의 남자>는 있을 수 없는 순수한 신파 러브스토리이지만, 그 책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 편지와 자끄 프레베르의 시를 여러 편 담고 있다는 점 때문에 내게는 '명작에 근접한 책'이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같은 책은 명성이 자자하지만, 내가 보기엔 담도 너무나 높고, 지붕도 너무나 높아서 문턱을 넘어서는 것조차 꺼려지는 그런 집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진짜 '구조주의'란 것이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모른다. 나는 그 설명문조차 제멋대로 읽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책읽기는 결국 '작품을 완성하는 이는 독자'라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거기다가,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갖고 새로운 생각을 한다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읽는 그 당시의 독자'라고 할 수 있다.

추리 소설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독자의 개입이 가장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장르이다. 전지적인 작가가 사건의 전모를 계획하여 실행하고,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서 마구 섞은 후 일종의 게임처럼 독자에게 맞춰 보라고 던져 준다. 조각들은 단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을 뿐 탐정과 독자에게 똑같이, 모두 드러나 있다(혹은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이미 사건은 일어났고, 일어난 방식은 단 한 가지, 이미 작가가 첫 줄을 쓰는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던 한 가지 방식 뿐이기에 독자가 이것저것 상상해 봤자이다. (이래서 내가 추리 소설을 잘 읽지 못한다. 단 한 가지 정해진 결론, 정답이 있다고 생각히기 때문에. 게다가 독자가 탐정과 출발선은 비슷한 것 같지만, 결코 탐정을 이길 수 없는게, 탐정은 책에 서술되지 않은 어느 시간과 공간 귀퉁이에서 자기만 할 수 있는 중요한 수사를 하고 있지만, 독자는 속수무책이기 때문에.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에.)

그런데 피에르 바야르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그는 우선 이 사건의 화자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왜 믿을 수 없는지까지 말하면 스포일러가 된다!). 그리고 푸아로의 추리대로 실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에 대해 설명한다. 다음으로 푸아로가 범인으로 지목한 이는 아무 것도 진짜로 '자백'한 것은 없음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여러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푸아로의 성격과 행동으로부터, 우리가 푸아로의 설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어야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리 하여, 결국 수사는 재개되고, 전혀 다른 이가 범인으로 지목되며, 이는 단순한 독자가 단순한 눈으로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색채를 이 작품에 부여하게 된다.

능동적인 책읽기, 작품의 숨은 의도를 찾거나 혹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궁극적으로는 '작품을 완성시키는 독자'로서 책읽기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멋진 책.

다음은 '셜록 홈즈가 틀렸다'를 읽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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