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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ㅣ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2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에큐멘 세계에 막 발을 들인 웨렐-예이오웨이 행성계를 배경으로 한 네 편의 중단편 연작이다. <어스시 시리즈>와 <헤인 시리즈> 초중반기(?) 장편 이후 거의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쓰여진 작품이었고 그만큼 내가 마음 속에 품어왔던 르 귄과 많이, 뭐랄까, 달랐다.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은 르 귄인데 그 단정하고 조용한 문장에 실린 이야기는 격렬하고 고통스럽다.
내가 아는 르 귄은 언제나 압박에 시달리는 약자들의 편이다. 물론 웨렐-예이오웨이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이 세계의 이야기들이 20년 전(르 귄의 시간으로도, 나의 시간으로도)보다 더 격렬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약자들이 이중의 압제에 눌려서 눌린 상태를 정상 상태로 받아들이고 시작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중의 압제의 고발은 당연히 한 겹의 압제보다 더 고통스럽고 격렬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을 부수고 일어서는 과정 역시 느리고 고통스럽다. 한 마디로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르 귄을 판타지 작가, SF 작가라고 하는 건 당연하고 페미니즘 작가라고 할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이 작품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모든 진실은 지역적이고, 모든 진실은 부분적이다. (그러나) 어떤 진실도 다른 진실을 진실이 아니게 만들 수 없다. 모든 지식은 전체 지식의 일부이고, 진실한 선, 진실한 색, 더 큰 패턴을 한번 보고 나면, 절대로 다시는 옛날처럼 부분을 전체로 볼 수 없다 . (p252)”
진실을 진실이 아니게 만드는 어떤 것은 그러므로 진실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진실을 진실이 아니게 만드는, ‘여성은 여성의 일이 있고 남성은 남성의 일이 있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진실이 아니다. 더 큰 진실이 실재하는 걸 한번 보고 나면, 지역적이고 부분적인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 진실을 앞에 내세울 수는 없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모든 패턴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큰 패턴이다.
패턴의 확실한 발견은 한 여자가 한 남자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는 개인적인 경험 안에서 완성된다. 여자 노예였던 이와 남자 노예였던 이가 서로 용서하고, 자유로운 헤인의 여자와 소유주였던 웨렐의 남자가 서로 용서하고, 더 큰 패턴을 보는 헤인의 남자가 예이오웨이의 노예였던 여자에게 배우고, 오랜 압박에 짓눌린 노예였던 웨렐의 여자가 각성하고 변화하고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자유를 세운 뒤 자유롭게 헤인의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헤인 시리즈>에서 르 귄은 인류를 대상으로 사고실험을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류가 그 실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교훈을 얻으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폭주하다가 그냥 망해버리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