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곳에서 오래 살아가는 사람.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의자취를 잃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나의 마음은부러움이랄지 자괴감이랄지. 나는 여러 장소를 거쳐왔고,
그것은 장소를 여는 것과 같다고 쓴 적 있다. - P116

그 말에 나는 다 들통난 기분. 그래, 나는 나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사람들을 통틀어 제일 지긋지긋한사람은 바로 나인 것이다. 먼 데서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다.
아무리 멀리멀리 가도 나를 벗어날 수는 없는데. 나의 유토피아는 나의 폐허에 있는데. - P118

호수 이름에는 관사가 붙지 않는다 - P120

"늙은 사람이 사랑을 잊으려고 하면 한차례 비가 내리는구나." - P130

조용한 당신이 담길 것을 떠올리면서 - P133

시절 인연처럼 계절이 열렸고, 이제 닫히려 한다. 나는문밖으로 드르륵 나가야 한다. 더 쓸쓸한 세계로 들어가야한다. - P142

그러나 여름아, 여름의 모든 인연아, 너는 여기에서 멈추어라.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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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또 왔네."
"네. 현수 언니 본다고요."
"그래서 그렇구나."
"뭐가요?"
"요즘 들어 기고만장한 거."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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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할머니의 말을 허투루들은 적이 없어요. 잠시 뒤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휴지로 톡톡 두드려 닦아주었다. - P122

내가 겪어왔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당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빤히 보이는데보이지 않는 척하는 것. 서로가 떠안은 일들에 지쳐 상대의 상처에는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태도. 우리가 그런데도 서로를친밀한 사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 - P125

"뭘 아는데?"
"정미정이 그랬어. 네가 자기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떠벌리고 다녔다고. 그래서 자기는 너랑 똑같은 사람이 되지않으려고 노력했다." - P131

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이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전한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P133

내 가슴팍에 박혔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서로를 혐오하고 끔찍한 생활을 반복했지만 결국, 그때의 나도 나일 뿐이었다. 나는 작게 코를 골며 잠든 현수 언니를 보며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생각해보다가, 비밀 친구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오늘만큼은 참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고 죽는것.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열망이다. - P146

수의 목소리는 가늘고 높아서 어딘지 무른 사람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수를 사랑했다. 대수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럽고 남성적이니 수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했던 수를 사랑했다. 나의 아버지는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할 때 김, 상, 남, 상남자 할 때 상남 말이요, 라고 말하는사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수와 육 년간 함께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헤어짐을 결심했던 것 또한 저런 식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네 고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온 거야. 라는 식의 태도. - P151

"정말 불경한 아이들이구나." - P155

그때 우리 가족은 방 두 개짜리의 낡은 이십 평 복도식 아파트에서 아버지와 엄마, 나와 순정까지 넷이서 함께 살았다. 순정은 그 당시 내가 자신을 순정이라고 불러주길 바랐다. 순정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순정을 그저고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으로 순정을 순정 대신 고모라고 불렀을 때, 담담히돌아보던 순정의 그 모습만은 기억에 남아 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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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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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나이에도 교과서가 필요하다는 걸 #어린이라는세계 를 읽으며 알았다. 나의 무지와 무례를 자각하는 고통이 이내 희망의 의지가 되었던 건 당연히 사려 깊은 관찰자이자 대책 없는 애호가인 #김소영 작가님 덕이다.

4년 만에 김소영 작가의 신작 #어떤어른 이 출간 되었다. 전작이 제목부터 가이드의 뉘앙스를 품고 있었다면 이번 책은 제목부터 독자에게 질문을 건네는 책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꼼꼼히 오래 생각하고 답해야 할 설문지와도 같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건너 어떤 어른인 나에게 오는 길에는 매일의 일상이 있기 마련이다. 작가는 이 범상하고 신비로운 일상을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의 징검다리로 사용한다. 그 다채롭고 친근하며 맛있고 손이 많이 가는 (마치 #잡채 처럼) 일상의 기록들을 읽으며 나는 또 적당한 때에 호되게 혼이 났고 난데 없이 애틋해졌으며 오밤 중에 주먹을 꽉 쥐거나 지하철 안에서 주책맞게 웃기도 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고심 끝에 내린 답들이 정답일리 없겠지만 언제라도 또 이러한 시험에 들고 싶다. 오답을 잔뜩 썼다해도, 번거롭고 면구스럽다해도 여전히 고민에 반응하는 어른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천진난만하고 어메이징하며 여도러블한 어린이의 부분도 너무 갖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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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산책로 자체도 그렇게 조용하지만은 않다.
먼저, 이것은 매우 좋은 발견인데, 새소리가 제법 시끄럽다. - P238

그런데도 ‘시끄럽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거나 눈총을 받는 건 어린이들이다. 그때의 ‘시끄럽다‘가 혹시 어른들이대화를 나누는 데 방해가 되어 시끄럽다는 뜻은 아닐까? - P243

어린이가 소음을 내면 ‘나도 한때 저랬지‘ 하며 ‘
그러이 이해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누구든 잡채에 대해서는 좀 큰 소리로 말하면 좋겠다. - P246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어린이한테는 ‘무심히‘ 하면안 된다고. ‘별 뜻 없이‘ 하면 안 된다고. 어린이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아니다. 특별 대우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어린이가 있다는 걸 안 이상, 상대가 어린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 P252

세상에 어린이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내 결론은 우리가무심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한테도 어른끼리도어린이끼리도. - P254

산책길에 어린이가 보이면 나는 스스로 사복 경호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개는 덩달아 경호견이 된다. 그러면좀 멋있는 것 같다. - P254

, ‘쉽게 쓸 수 있으면 쉽게 쓴다‘는 내 글쓰기 원칙이 옳다는 걸 확인하는 듯해 뿌듯하다. - P259

쉬운 말이 좋다. 쉽게 쓸 수 있으면 쉽게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한 명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좋은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느라 작가가 고생하더라도,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읽고 ‘해석‘하는 대신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데 힘을 쓰는 게 좋다고 믿는다. 그렇게 쓰려고 노력한다. - P261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 나는 어린이 출입 제한 구역에 대해서만큼은 복잡하게 말하고 싶다. - P266

그런 말을 사용하기 전에도 우리는 어린이와 함께 잘 사 먹고잘 놀고 잘 구경했다. 사회의 면면이 달라져 제재가 필요해지더라도, 한 가지 사실만은 잊지 않으면 좋겠다. 어린이의출입을 제한해야 할 때는 오직 어린이를 보호해야 할 때뿐이다. - P268

1인 1주문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및 어린이는 예외) - P274

나는 어린이 앞에서, 청중 앞에서, 무엇보다 글에, 되도록 속어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번만은 예외로 해야겠다. 그때의 사장님 말씀을 그대로 옮겨야 하니까.
"애기가 가오가 있지." - P277

애기가 가오가 있지. ‘아기가 체면이 있지‘라고 순화해야겠지만. 이 말이 너무 멋지지 않은가? 애기가 가오가 있지. - P277

"못된 어린이는 정말 못됐다."
나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 P280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어린이는 자기 자신, 딱 한 명이다. 그것도 자의적으로 정리된 기억이다. 그것만으로 어린이를 이해하기란불가능하다. - P285

시험 전날 안부를 전하면서 일부러 무심한 투로 "시험잘 보고, 끝나고 어디 가서 놀지 말고 집에 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선생님, 항상 보고 싶어요. 끝나고좋은 마음으로 연락드릴게요"라는 답이 왔다. 걱정하는나를 안심시키는 다정한 말이었다. 나는 이제야 겨우 어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데, 그때 그 어린이는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었구나.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는 연말이다. - P287

"선생님, ‘동심 파괴‘ 하셨네요." - P289

"그럼 우리나라도 중학교 1학년까지는 어린이로 해주면좋겠어요. 저도 이제 막 어린이가 끝나가지고 아직 모르는게 많거든요." - P293

"저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과 동갑이에요. 그때 소식을 알면서도 선생님들이 하래서 그냥 공부를 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요. 이제 저는 어른이 되었는데 그 친구들은 아니잖아요. 과연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생각을많이 해요. 그 뒤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지도 않고, 저도그때 공부하라고 하던 선생님들이랑 똑같은 어른이 된 것같아요." - P302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해줘!"
할머니는 원장님이 염색약을 바르는 동안에도 엄청난기세로 말씀을 이어갔다.
"나는 인제 하고 싶은 거 다 해. 수박도 한 통씩 먹어. 복숭아는 일곱 개. 포도는 입이 시릴 때까지. 아주 잇몸이 시릴 때까지. 내가 90살까지는 살아야지 했는데 이제 12년밖에 안 남았어." - P308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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