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그런데 나는 단 한 번도 할머니의 말을 허투루들은 적이 없어요. 잠시 뒤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휴지로 톡톡 두드려 닦아주었다. - P122
내가 겪어왔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당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빤히 보이는데보이지 않는 척하는 것. 서로가 떠안은 일들에 지쳐 상대의 상처에는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태도. 우리가 그런데도 서로를친밀한 사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 - P125
"뭘 아는데?" "정미정이 그랬어. 네가 자기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떠벌리고 다녔다고. 그래서 자기는 너랑 똑같은 사람이 되지않으려고 노력했다." - P131
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이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전한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 P133
내 가슴팍에 박혔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서로를 혐오하고 끔찍한 생활을 반복했지만 결국, 그때의 나도 나일 뿐이었다. 나는 작게 코를 골며 잠든 현수 언니를 보며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생각해보다가, 비밀 친구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오늘만큼은 참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고 죽는것.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열망이다. - P146
수의 목소리는 가늘고 높아서 어딘지 무른 사람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수를 사랑했다. 대수라는 이름이 너무 촌스럽고 남성적이니 수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했던 수를 사랑했다. 나의 아버지는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할 때 김, 상, 남, 상남자 할 때 상남 말이요, 라고 말하는사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수와 육 년간 함께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헤어짐을 결심했던 것 또한 저런 식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네 고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온 거야. 라는 식의 태도. - P151
그때 우리 가족은 방 두 개짜리의 낡은 이십 평 복도식 아파트에서 아버지와 엄마, 나와 순정까지 넷이서 함께 살았다. 순정은 그 당시 내가 자신을 순정이라고 불러주길 바랐다. 순정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순정을 그저고모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으로 순정을 순정 대신 고모라고 불렀을 때, 담담히돌아보던 순정의 그 모습만은 기억에 남아 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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