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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대왕 ㅣ 사계절 1318 문고 7
크리스티네 뇌스트링거 지음, 유혜자 옮김 / 사계절 / 2009년 2월
평점 :
막내가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와 절판된 구본으로 읽었는데 신판 표지가 훨씬 낫다. 사계절 1318문고로 독일청소년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외국소설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지?' 하는 감탄을 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상상의 스케일은 크지 않지만 우리 지하실에 누군가 살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만든다. 제목을 보곤 '오이대왕'이 철권통치라도 하는가 생각했는데... ^^
책 첫머리에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에 엄청 공감했다. 사실은 누나가 글을 쓰기로 했는데, 분홍색 종이와 타자기에 넣을 녹색 리본을 사왔을 뿐, 글을 어떻게 쓸지 구상하느라 한 줄도 못 써다는 이야기. 우리가 흔히 하는 경험이지만, 너무 잘 하려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글쓰는 일은 정말이지 잘 쓰려는 의욕만 앞섰다가 흐지부지 되니까.^^
결국 짜임새 있는 글 구성을 하지 못한 누나를 제쳐두고, 열네 살 중학교 1학년인 볼프강이 작문의 원칙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썼다는데 술술 읽히고 재미있다. 자기 집에 일어났던 일을 소개하는 체험글이라 쉽게 썼을거 같긴 하다.^^ 뇌졸중으로 입은 삐둘어졌지만 지혜로운 말씀은 많이 한다는 일흔 한 살의 할아버지, 마흔 살 동갑인 엄마 아빠, 고등학교 1학년 누나 마르티나, 막내둥이 닉키까지 여섯 식구가 엮어내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이야기다.
부활절 날 아침에 '쿵'소리와 함께 부엌에 등장한 오이대왕, 밀가루로 반죽한 것처럼 물컹거리는 초록색 오이 모양에 왕관을 쓰고 스스로 '짐'이라 부르는 '트레페리덴 왕조의 구미-오리 2세 대왕'이다. 지하실에 살았는데 구미-오리들의 반란으로 쫒겨났다면서 정치적 망명을 선언했다. 흰 장갑 낀 손에 입맞추고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라는 무례한 망명객에 다들 눈살을 찌푸리는데 아버지 호겔만씨와 막내 닉키만 환영한다. 아버지는 신문사에 특종을 제보해 한 밑천 건지려는 심사였지만 사진에 찍히지 않는 오이대왕을 증명할 길이 없다.
좌충우돌, 오이대왕과 호겔만씨 가족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교활하고 야비한 오이대왕은 아버지 호겔만씨에게 보험회사 사장자리에 앉혀주겠다고 뻥을 치지만... 불리해지자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손수 음식을 가져다 먹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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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겔만 씨 어디있어?" 오이대왕이 화를 벌컥 내며 물었다. "호겔만씨 없다." 누나가 소리쳤다. "짐 배고프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 오이 대왕이 허기진 얼굴로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손으로 부엌 쪽을 가리켰다. "싹이 난 감자들은 싱크대 밑에 있어" 구미-오리대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짐, 직접 안한다! 짐, 안 가져온다!" "그럼, 굶는 수밖에는 없지 뭐." 내가 말했다. 하지만 오이대왕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기분 나쁜 얼굴로 우리 곁을 지나가 부엌에서 감자 자루를 통째로 끌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1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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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나 맘대로 하는 오이대왕과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저항, 서로 도와가며 즐겁게 사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며 읽을만한 청소년 소설이다. 곳곳에 웃을 요소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