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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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으로 만난 박성우 시인이 2002년에 낸 첫시집이다. 대학 때 매주 4~5편의 시를 써서 교수님께 내밀었다는 박성우, 교수님은 한번도 시를 갖고 야단치지 않아서 울었다는 박성우는 시인이 되었다. 이 시집 끝에 실린 강연호교수의 해설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썼으니 시인이 되었고, 좋은 시를 쓰게 되었음이 이해되었다. 

예전에 사회교육원 시창작반을 기웃거릴 때, 매주 시를 써오라고 했지만 나하고 옆집 언니는 한 번도 써가지 않았다. 다른 분들이 써오는 시를 들으며 잘썼다, 못썼다 평가만 했다. 하지만 그때 사춘기 소녀의 낙서같은 시라도 열심히 써오던 분들은 지역 신문 공모에 당선돼 시인이란 이름표를 붙였고, 옆집 언니랑 나는 여전히 시 한 편도 쓰지 않으며 시집만 사들이는 독자로 머물렀다. 

1971년 전북 정읍 출생, 신경숙 작가와 같은 정읍 사람이다. 사람은 결핍으로 단단해지기도 하지만 시인은 시적 감성을 훈련받기도 한다. 박성우 시에는 그의 가족사나 생활이 고스란이 드러나 그의 시세계를 가늠하게 된다. 처절하고 절박한 현실, 경제적 궁핍이 불러왔을 삶의 무게가 드러나 짠한 마음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러한 결핍이 그를 시인으로 키웠구나 생각되었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성되었다는 '거미'를 비롯한 시들이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림을 그리듯 섬세한 묘사와 시인의 진술에 저절로 공감된다. 쉽게 이해되지만 담고 있는 이야기는 무거워서 마음이 편치 않아도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에 반하게 된다.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8~9쪽 '거미' 전문>

감꽃 

옹알종알 붙은 감꽃들 좀 봐라
니가 태어난 기념으로 이 감나무를 심었단다
그새, 가을이 기다려지지 않니?
저도 그래요, 아빠 

뭰, 약주를 하셨어요? 아버지
비켜라 이놈아,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담장 위로 톱질당한 감나무, 이파리엔 햇살이
파리떼처럼 덕지덕지 붙어 흔들렸다
몸을 베인 뒤에야 제 나이 드러낸 감나무
나이를 또박또박 세고 또 세어도
더 이상의 열매는 맺을 수 없었다 

아버지 안에서
나는 그렇게 베어졌다 

후략
                <56쪽 '감꽃' 부분>
  

찜통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통 내미신다 

중략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면 모가지라는
디 
                     <84~85쪽 '찜통' 부분> 

 

콩나물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올린다
           

참으로 비통할 가족사와 없는자들이 감당했던 현대사 산업발전의 역꾼이었던 미싱공이 등장한다.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인지 보조사원 박성우도 등장한다.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여전히 몸으로 책을 읽히시는 어머니께 바친다는 시인의 말이 그 어떤 시보다 애절하게 다가왔다. 

*인용된 시의 저작권은 저작권자와 출판사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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