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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노래 ㅣ 푸른도서관 30
배봉기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5월
평점 :
배봉기작가는 내가 사는 곳, 대학의 문창과교수다. 새혼가정을 소재로 한 '실험가족'의 작가로 알고 있다가, 2007년 11월 이금이 작가의 광주대 강연으로 전화 통화도 하고 만나뵈었기에 친금함이 더했다. 마침 동화로 등단한 후배가 대학원에서 공부중이라 교수님을 모시고 사진도 찍었다. 그 후에 만나는 교수님의 신작이라 더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판타지 소설이나 너무 비현실적인 작품보다는 역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좋아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내 취향에 딱 맞는 작품이었다. 100년도 훨씬 전에 흔적없이 사라진 이스터 섬 부족의 역사를 전한 방식이, 문자가 아닌 '노래'였다는 데 감동을 받았다. 우리도 구전되는 노래로 당시의 시대상이나 생활을 연구하고 밝혀내지 않는가! 언어학자의 기록으로 남겨진 태평양 작은 섬 부족의 역사가, 한국의 작가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하다!^^
작가의 친구가 오클랜드 대학교의 인류학 자료 보관소에서 발견한 언어학자의 기록이, 작가의 상상력으로 멋진 소설로 탄생했다. 언어학자의 기록은 이스터 섬의 거대 석상 모아이(Moai)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액자형식을 취하여 화자인 작가가, 언어학자의 기록에 나오는 족장과 부족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언어학자에게 노래로 전달되었는지 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이 수차례 반복되면서 피의 역사를 보여준다.
처음 파도에 밀려온 이방인 '회색늑대족'에게 친절을 베푼 '제비갈매기족'은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했지만, 삶의 방식이 달랐던 두 부족은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했다. 제비갈매기족의 친절로 목숨을 건지고 살 터전을 얻은 회색늑대족은, 그들을 힘으로 지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자연에서 먹을 것을 취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평화롭게 살던 제비갈매기족은 노예로 전락했다. 회색늑대족은 귀가 큰 장이족으로 불리고 제비갈매기족은 귀가 짧은 단이족이라 칭한다. 장이족은 우기의 빈 시간에 단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거대 석상을 만드는 노역을 시킨다. 그들은 좋아했던 석상을 장이족의 얼굴을 본딴 거대 석상을 만들어 세우며 공포에 질린다. 지배자의 권위와 피지배자의 복종을 요구하는 거대 석상은, 섬 주민의 피와 죽음의 노역으로 늘어간다.(현재 남아있는 거대 석상은 900여기가 넘고 큰 것은 무게 75톤에 높이는 21미터에 이르며,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석상 분묘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수차례 바뀌었지만 그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두 부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족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노예로만 살아간다. 그 중에 한 사람 '괴상한 소리'는 '발과 입이 없는 자'를 만나,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평화로웠던 섬 이야기를 듣는다. 예전의 평화롭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음이 큰 슬픔으로 다가오고,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생각에 잠긴다. 마침내 그는 노래를 부르는 자가 된다. '나는 이리 들었노라~'로 시작되는 섬의 역사를 노래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신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똑같은 분노와 증오를 넘어 슬픔과 그리움으로 한 마음이 된다. 그들은 노래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노예 노동을 폐지하고 무기를 거두어 바닷 속에 던져 버렸으며, 그동안 자행된 살육으로 죽은 자들의 유골을 거두어 장사 지내 주었다. 또한 장이족과 단이족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 모두 귀걸이를 달아 귀의 크기를 같게 했다.
이로써 피의 역사는 끝나고 섬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족장이자 제사장인 '큰 목소리'는 그들의 저주이자 상처였던 거대 석상을 모두 눕혀서 영원한 평화를 얻으려 한다. 하지만 일곱 번째 이방인의 침입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가져왔다. 서구 열강들이 노동력을 얻기 위해 노예사냥을 온 것이고, 이스터 섬 남자들은 모두 노예선에 끌려가 질병으로 죽거나 강제 노역으로 죽어갔다. 살아남은 족장 '큰 목소리'는 오클랜드의 농장으로 팔려갔고, 거기서 슬픔에 잠겨 노래하는 소리에 감동한 주인집 아들 헨리와 친구가 된다. 열두 살이던 헨리에게 끊임없이 부족의 노래를 들려주었고, 후에 헨리는 언어학자가 되어 그 노래를 추억하며 기록으로 남겼다. 이로써 '큰목소리'가 간절히 원했던 부족의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노래로 남았다.
인간의 욕심과 폭력은 형태만 달라졌을 뿐 현재도 다르지 않다. 있는 자들이 더 가지려고 없는 자들의 것을 빼앗는 현실을 우리는 경험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온갖 비리와 추악함도 날마다 반복된다. 권력의 주체가 바뀔 때마다 드러나는 비리와 부패에 치를 떨면서도 반복되는 그 짓을 막지 못한다. 인간의 욕심과 폭력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저주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은 모름지기 꿈과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어야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반복되는 폭력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던 부족의 노래는 인간의 선한 마음을 되돌리는 힘이 있었기에 위로가 된다. 대중가수의 노래에 열광하는 우리에게도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인간 본연의 심성을 되찾아 줄 노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