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 최갑수 -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십일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속같은 십일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십일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詩 몇편을 슬렁슬렁 읽어 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詩句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한 십일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계면쩍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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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친구가 e메일로 보내준 시,
이 시를 읽으며 행복했던 소중한 추억을 다시 되돌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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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8-11-0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에 관해서 문외한인데 순오기님 덕분에 시 감상을 많이 하고 갑니다@_@ 왜 이제야 놀러 왔는지 후회막급입니다^^;

순오기 2008-11-01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몰라요~ 그냥 내 마음에 당기는 시만 좋아하죠.
카테고리처럼 '시가 내게로 왔다'이런 것들만요.^^

메르헨 2008-11-0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담하기만한 십일월의 하늘...이라...
예전엔 서늘하고 코 끝에 찬기운이 매달리는 느낌이 좋았는데
지금은 마냥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진짜 한해 한해가 빠르게 지나가네요.^^

순오기 2008-11-01 16:40   좋아요 0 | URL
벌써 11월~ 아 화살처럼 빠르다는 어른들 말씀이 팍팍 실감납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