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오월 이삭문고 1
윤정모 지음, 유승배 그림 / 산하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해 오월, 난 무얼 하고 살았을까? 79학번의 번호표를 받아야 했지만, 직장을 다니는 상황에 그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었다. 못 이룬 꿈이라 입시철만 되면 가슴앓이 했던 내 청춘의 봄은 세상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해 오월, 난 치열한 현실을 살아내는 풋내기로 직장에선 조선일보를 봤고, 집에선 동아일보를 봤지만, 광주의 오월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YMCA 활동에 동참하며 5.18의 진실에 접근하고 역사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래도 실감나지 않았던 광주의 오월은, 88년 6월 망월동묘지에 참배하면서 비로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후 산자의 죄의식과 빚진 마음으로 5월을 살았고, 해마다 독서모임에서 5월 문학을 토론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부채를 갚는 심정이었다. 
 
이 책도 어머니독서회 선정도서로 다음 월욜에 토론한다. 광주에서 당시 새댁이나 여중고생으로, 더 어리게는 초등생으로 5월 광주를 겪었던 회원들은 나와는 또 다른 느낌의 5.18을 풀어내리라. 광주시민이 죽어간다는 가두방송을 들으며 밤새 숨죽였던 그들은, 광주 MBC가 불타는 걸 지켜보고 총성을 들어야 했던 그들은 지금도 5월이면 몸서리를 친다. 산자가 겪어야 할 몫도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책 속의 기열이가 추적하는 누나의 오월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몸소 겪었고 치를 떨었기에 낱낱이 알고 있으리라. 

작가는 1980년 5월의 광주 항쟁 당시 중학교 국어교사를 하며 시민군 홍보부장을 맡았고, 항쟁이 끝난 후에 '금희의 오월'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오월의 광주'를 알렸던 박효선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억이 늘 깨어 있어야 불의가 다시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말과 더불어 우리는 지금 깨어있는가 물음을 던지는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5.18이 무슨 날인지 어떤 의미인지 헤아리지도 않는 학생들에게 기열이의 담임은 5.18묘지에 다녀오게 한다. 기열이는 그곳에서 만난 사진 한장에 시선이 박히고 오래전 죽은 누나의 죽음에 의문을 갖는다. 오직 동생 하나 공부시키려고 당차고 야무졌던 자신의 꿈을 접은 누나가, 그 난리통에 동생을 피신시키기 위해 돌아간 집에서 그대로 숨을 거둔 이유가 궁금하다. 팔뚝의 무수한 바늘 자국때문에 쉬쉬하고 덮어버린 누나의 죽음을 회상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소통하지 못한 사회의 비극, 토론하지 못하는 사회가 만들어 낸 폭력에 맥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 강한 신념이나 열정으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일상에서 그들은 그 폭력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기웃거리다 날벼락을 당한 사람도 있지만, 기열이의 누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을 했던 사람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사람도 5.18 한복판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내 몸속의 피라도 연거푸 뽑아내야 했던 기열이 누나처럼, 소리없이 희생된 그들을 자꾸만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기열이를 통해 죽은 누나의 명예가 회복되듯이, 무수한 주검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도 산자들의 몫이다. 

'누나의 오월'은 5.18 한복판의 치열한 항쟁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5월 광주 역사의 뒤안길에 소리없이 희생된 평범한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광주의 오월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소중한 자유와 민주를 우리에게 건네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온전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를 누리고 있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지금 5.18 정신이 살아있는지, 우리 사회의 잘못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가슴 무거워지는 오월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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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5-2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피흘려 지켜내고자 한 이 땅의 민주주의인데 오늘날 이렇게 망가지고 무너져 있는 모습을 보자니 부끄럽고 참담할 뿐이에요. 그 시간을 겪은 사람들이 해마다 맞닥뜨려야 했을 끔찍한 오월을 생각해 보니 이 화창한 계절의 아름다운 시간도 어쩐지 죄송스럽게 여겨집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집 장가가고 또 이사 가고 축제를 열고 운동회도 열고 소풍도 가는 이 계절에 말입니다.

순오기 2008-05-24 12:59   좋아요 0 | URL
며칠전 민주의 댓글을 보면 조별로 달력을 만들며 행사니 기념일을 표시하는데, 누군가 '5.18'했더니~~ 그런 걸 달력에 표시하냐고 무시하더랍니다. 미래의 초등선생님들의 의식이 그래서야 문제되는 거 아닌가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