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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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의 힘'으로 글을 쓴다는 작가 황석영이지만, 나는 이 책을 세번에 걸쳐 끊어 읽었다. 세번에 나누어 읽으니 리뷰를 뭐라 써야할지 난감해서 또 열흘이나 지났다. 그래도 오늘은 엉덩이의 힘으로 글을 쓴다는 작가의 말을 생각하며 나도 엉덩이의 힘으로 끄적여 본다.

바리데기, 너무나 익숙한 우리의 설화다. 우리 설화를 모티브로 작가적 상상력이 발휘된 작품이며, 방북사건 후 본의 아니게 망명생활을 했던 작가의 경험세계를 녹여낸 작품이라 느꼈다. 하지만 설화와 바리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전개가 가독성을 떨어 뜨렸고, 특히 바리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으로 풀어가니까 현실성이 덜 느껴졌다. 특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우리와 너무 동떨어져서, 독자가 공감하고 열광하기엔 거슬리는 요소 같았다. 개인적으로 환타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현실성이 없고 일종의 도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황석영이 환타지적 요소에 기댄 것인지, 명성에 걸맞는 스테디셀러를 위해 대중에 영합한 것인지 의문이 꼬리를 쳐든다. 

'황석영'이란 이름만으로 그의 작품을 평가하기엔 요즘 독자는 너무나 영리하고 날카롭다. 하여간 개인적 평가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 탁월하거나 노벨상 운운할 정도의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토리 전개나 구조도 바리데기 설화에서 차용한 것이지 온전히 그의 창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그의 문장이 흡인력이 있다는 것이고,

바리데기라는 제목에서부터 읽혀지듯이 주인공 바리는 버려진 아이다. 일곱 번째 딸이어서 부모에게 버려지고, 김일성 사망후 북한의 경제상황 때문에 국가로부터 버려졌다. 물론 살아남기 위한 탈북이고 도피였지만 결국엔 국가 없는 난민으로 흘러갔고, 바리의 인생역정은 주변의 영향으로 뒤틀렸기에 자기 삶의 주체라는 면에서도 버려진 진정한 바리데기다. 하지만 독자들에겐 사랑을 듬뿍 사랑받고 있다. ^^

북한에서 바리의 성장과정은 사람 사는 세계는 이데올로기가 달라도 결국 인간 보편의 정서가 다르지 않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북한 사투리로 풀어낼 뿐 청진에서의 생활이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1990년 중후반부터 끔찍한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버려진 운명에서 살려낸 할머니와 흰둥이에 의지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도 이해된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바리공주 설화와 교차되면서 바리의 인생을 풀어가는 방식이 소설에 쏙 빠져들기엔 방해가 된다.

바리는 열두살에 가족과 흩어져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탈출한다. 탈북 주민들의 삶이 여지없이 드러나 가슴 무겁고 착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경지역에서 살때 할머니와 아버지, 바리가 보여주는 정신은 바로 사람의 자존감을 보여준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상황에서도 그런 정신이 사람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도 밥과 같아서 오래가면 쉬게 마련이라 자꾸 폐를 끼치면 나중에 정말 도움이 긴요할 때는 냉정하게 돌아선다"는 아버지 말씀에 공감한다.

중국에 혼자 남게 된 바리는 샹 부부에게 마싸지와 발바닥 혈을 배워 살아가는 방편으로 삼는다. 손님의 발바닥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이는 특별한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샹 부부가 사기를 당하고 바리는 샹언니와 같이 영국으로 가는 배에 태워진다. 콘테이너에서 짐승처럼 취급 받으며 비참한 상황에서도 마침내 영국에 도착한다. 설화 속 바리공주처럼 우리 주인공 바리의 험난한 인생은 영국에서도 계속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계 어디서도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다는 것이다.

영국 연립주택에서 만난 관리인 압둘 할아버지와 바리는 마음이 통하고, 할아버지의 손자인 알리와 열여덟살인 바리는 결혼한다. 행복할 것 같은 바리의 인생은 또 한번 뒤틀린다. 남편 알리는 동생을 찾아 파키스탄으로 떠나고 소식이 끊어진다. 혼자가 된 바리는 딸 '홀리야 순이'를 낳아 압둘 할아버지와 키우지만 아이는 죽는다. 순이를 잃고 바리는 식음을 전폐한다.

"아무런 악한 것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신은 왜 고통을 주나요?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이고, 어째서 악한 것이 승리하는지?" 인간 실존의 고통에 직면한 바리는 침묵속에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어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특별한 능력을 얻었던 것처럼, 바리는 순이를 잃고 죽음을 넘어선 깨달음을 얻는다. 바리데기 설화에서 말하는 생명수를 찾은 것이다. 바로 압둘 할아버지의 입으로 전하는 작가 황석영의 목소리가 아주 아주 크게 들리는 부분이다.

"신은 우리를 가만히 지켜보시는 게 그 본성이다. 불행과 고통은  우리 모두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거다.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다. 미움이 바로 바로 자기 지옥이다.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리신다.(263쪽)"

"우리가 받은 고통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다. 이승의 정의는 늘 반쪽이다(282쪽).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286쪽)"

3년 후 바리가 스물한 살 되던 해에, 남편 알리는 오랜 가뭄 끝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리듯이 갑자기 돌아왔다. 바리는 다시 아기를 갖고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사람들의 삶이란 이렇게 자손을 낳으며 끝없이 이어져 세계가 하나되는 것이런가? 작가는 생명수를 찾은 바리의 미래를 독자의 몫으로 남긴채 마무리한다. 작가가 그려낸 우리의 바리는 설화 속에 머물지 않고,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모습으로 불쑥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책을 읽고 난 솔직한 소감은, 작가가 너무 많은 욕심을 낸 듯하다. 기아와 전쟁과 세계화의 병폐 등, 인간의 온갖 참상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과 꿈을 교차시키며 풀어내지만 독자가 다 수용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슬쩍 슬쩍 건드리듯 언급만 하지 어느 하나도 깊이 있게 파고 들지 못한다. 차라리 그 중 한가지를 철저하게 헤집고 들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여러 민족과 인종간의 이동과 조화를 얘기하고 싶었다는데, 책을 읽은 독자가 고개를 끄덕여야지 작가의 인터뷰나 해설로 집어 넣으면, 소설로서의 주제는 살아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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