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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또롱 아래 선그믓 - 옛이야기 속 여성의 삶에서 페미니즘을 읽다
권도영.송영림 지음, 권봉교 그림 / 유씨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배또롱 아래 선그믓
권도영 송영림 지음
권봉교 그림
여성차별의 기원과 주체적 여성으로 거듭나기
누구의 아내처럼 남편의 이름을 소유격으로 받아 소유물처럼 대상화한다. 잘되면 내탓 못되면 조상탓이아니라 못되면 아내, 며느리탓을 정당화하는 <오는 손님 막으려다 망한 손동지댁>,<홍천 장자터 전설>,<아기장수>부터 시작한다. 아내와 며느리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방인이자 약자였음을 보여준다.
집안에 남편이 죽거나 우환이 발생하면 그 책임을 가장 약자에게 덧씌우는데 집안에선 새로 들어온 며느리거나 여성이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엔 이처럼 오랜 고질적인 관습들이 이야기를 통해 세대로 이어지며 내면화한다. 1장엔 여성의 생리혈을 부정하고 터부시하는 이야기, 아들보다 뛰어난 딸을 억압하거나 죽이는 이는 다름 어머니, 개가금지법이 만들어진 이야기엔 남편을 잔인하게 죽인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선 여성의 욕망은 거세되며 가부장적인 이념을 내면화하여 남편이나 시아버지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는 여성들에게 열녀비를 세워주며 그 정신을 강화시킨다.
남성의 소유욕과 집착에 희생된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상사바위 전설>로 처녀를 흠모한 중이 상상병에 걸려 뱀이 되어 여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아 뱀에 휘감긴 여인을 동네 사람들이 연못에 떨어트리는 이야기로 엽기 공포물이 따로 없다.
1,2부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희생되는 여인들의 옛이야기와 오늘날 젠더적 시각에서 바라보기, 3부는 주체적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회가 부여한 역할을 뛰어넘어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손없는 색시>, 무엇이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 <세경본 풀이>의 남장여인 자청비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뮬란과 비교하여 함께 읽어볼 수 있다.
불편한 부분 그리고 더 논할 부분
물론 여성들 스스로 자신을 가꾸는 것에 대해여 개성이며 자기만족이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이 때로 자기합리화는 아닐까?-79쪽
아름다운 몸에 대한 욕망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읽는 시대가 아닌 어느 시대보다도 시각적인 미디어가 주류를 형성하는 시대인 만큼 화장, 성형, 스포츠와 다이어트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과 함께 움직인다.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할 때도 ‘예쁜’사람을 뽑는다는 외모 차별적인 기준을 제시해도 용모단정이란 이중적 표현보다 더 솔직하다고 선호하는 20대들이다. 다이어트와 성형이 우리나라가 더 심할지는 모르지만 전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몸’에 대한 욕망이 넘쳐 흐른다. 화장이라는 부분을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로 가볍게 다룰 부분은 아니다. 스스로 가꾸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보고 자기 합리화라는 부분은 상대방에 대한 주체성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계몽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대적인 꼰대 발상이다.
우선 ‘남혐은 없다’는 이 교수의 의견도 참고가 될 것 같다. 그는 남혐의 발언이 남성 집단을 열등한 집단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차별 구도가 확증, 재생산 되어야만 남혐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219쪽
페미니즘을 다룬 책들이나 기사를 보면 남성 페미니스트 교수의 글을 여기 저기 비판적 성찰없이 진리인양 인용한다. 이 책도 예외 없이 인용하고 있어 지적한다.
혐오는 혐오다. 혐오적 표현이 생기면 그런 혐오표현들은 바이러스처럼 번식하여. 총량이 늘어난다. 고속도로에서 정속을 지키는 사람들(법을 지키면) 정속충이 된다. 정속충은 남성도 여성도 비하하지 않는 혐오표현이지만 정속이란 행위가 나쁜 행위처럼 보인다. 혐오표현을 달면 부정적인 의미를 생산해서 더 이상 진지한 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을 ~충이나 루저 등으로 비하하는 발언이 문제되지 않는 듯한 학자들은 반성해야 한다. 온라인이라는 가상공간의 위력을 너무 간과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베를 미러링했다는 워마드, 메갈리아의 게시판을 제대로 가보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초기의 의도는 미러링였을지 몰라도 일베 미러링이 아닌 또 다른 일베였다. 거기에선 어떤 자정적 힘도 생산적인 담화도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범죄에 가까운 혐오적인 발언들과 이미지를 올려놓고 모욕과 조롱만이 난무하였다. 그런 공간에서 놀던 여성들은 여전사라도 되는냥 실제 오프라인으로 나와 일면식도 없는 남성을 조롱하거나 여성이 남성 누드를 촬영한 사진을 워마드에 올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도록 허용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도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여성들은 자신들이 약자(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된다는 언더도그마에 빠졌고 실제로 자신의 범죄를 여성운동이란 경도된 합리화를 했다.
감상
이 책은 전형적인 근대적 페미니즘적인 시각들이 보여서 뻔하고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반면 존경할 만한 여성 운동가도 만날 수 있었다. 흑인 노예 폐지론자이며 여성 권리 운동가인 소저너 트루스의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란 150년 전의 처절한 외침이 마음을 때린다.
<손없는 색시>,<자청비>,<가문장아기>를 규정의 틀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여성의 시각으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있어 인상 깊게 읽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