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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낮잠 - 사진, 여행, 삶의 또 다른 시선
후지와라 신야 글.사진, 장은선 옮김 / 다반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인생의 낮잠
낮잠은 밤잠과 달리 반드시 자야하는 잠도 아니거니와 보통 사람이 낮잠을 자기는 어렵다.
너무 힘들고 지칠 때 막간을 이용해 자는 낮잠은 길지만 얕은 밤잠보다 꿀맛이다.
인생의 낮잠이라니……. 너무 시적이지 않는가?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제목은 그의 에세이 중에 한 부분임을 책을 읽는 중에 알게 된다. 후지와라 신야의 황천의 꿈은 아주 구체적이고 이야기의 맥이 있어서 오랜 꿈을 꾸고 얘기하려면 맥이 하나도 없어서 말하는 나 자신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도 못 잡는데 작가는 꿈도 현실처럼 생생하게 꾸나보다.
후지와라신야는 장년과 노년(50~60대) 사이의 나이를 지닌 전문 여행가이며 사진 전문 작가다.
그의 글은 치밀함과 섬세함이 묻어난다. 프로다운 집요함도 엿보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만고만한 나의 일상에 호기심으로 충만 된다.
번역 또한 매끄러워서 작가의 아름다운 글속에 흠뻑 취한다. 절반이상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몇 장 밖에 안남아 더 천천히 아껴 읽고 싶은 마음과 다음은 어떤 내용으로 나를 이끌지 한숨에 다 읽고 싶은 충동과 싸우게 된다.
(p113 아일랜드스튜편) 신야는 인간관계든 요리든 끈적끈적하게 엉겨 붙는 게 맘에 안 든다. 부인도 자식도 없고 부모님도 이미 돌아가신 작가답게 삶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과 남편의 가족과 나와 나의 가족과 남편과 나사이 자식이 있는 나의 삶은 오랫동안 방치해둔 렌즈후드의 기름때처럼 끈끈해서 닦아도 처음에 산 것처럼 깨끗하지 않다. 그래서 그의 글은 내게 묘한 해방감과 부러움의 저항감이 인다. 자신의 본능대로 호기심 나는 대로 뚜렷한 목적도 없이 닿는 여행 속에서의 경험은 일상의 규칙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 날에 해치워야 할 밀린 자잘한 일들로 치이는 현대인들을 비웃기나 하듯 경이롭고 때로는 꿈인가 싶을 정도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후지와라 신야의 글은 그 표현이 너무 재미있고 생생하며 때론 너무 날카롭도록 비판적이지만 얄밉지 않다. 그 근본에는 살아있는 생명과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을 느껴서다.
(난로와 신화)편에선 일본인의 여행모습이 한국인의 여행모습과 묘하게 겹쳐짐을 느꼈다.
p188 이십세기 후반,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민족이었으나 벽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미족이기도 했다. 어째서인지 관광하러 가는 지역이 딱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없는 곳에는 하나도 없는 반면, 있는 곳에는 고구마 넝쿨마냥 줄줄이 몰려다닌다.
신혼여행을 갔을 때 모든 여행사의 천편일률적인 여행상품으로 가는 곳마다 우르르 마주치는 사람들은 한국 신혼부부들이었던 기억이 난다.
난로와 신화 편에서 보이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순박함과 시골정취는 이웃집 살림살이를 모두 알고 있었다던 우리의 옛 시골정취가 떠오른다. 지금은 가는 곳마다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벨을 누르면 모니터를 통해서 방문객을 일일이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기에 여행갈 때 집에 없음 알리는 아일랜드의 풍습이 신기하면서도 남을 믿고 사는 곳이 아직도 있음에 놀란다.
(섬마을 소녀)에선 젊은 시절 신야가 ‘이슈’라는 섬마을 처녀에게 구혼 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슈’처자와 신을 섬기는 ‘이수’처녀의 엄마가 나오는데 일본의 어느 작은 섬에서 어느 남태평양의 원주민들의 이국적인 삶이 느껴졌다. ‘이슈’라는 처자에게 받은 거북이 껍질과 야광 조개 때문에 6년 동안 연하장을 보내는 모녀의 집요함도 두렵고 거북이 껍질과 야광조개를 돌려준 후 소식이 묘연한 모녀는 그 후 어떻게 됐을지 신야만큼은 아니더라도 궁금했다.
(천상의 음악편)에선 한가로운 발리에서 뛰어가는 소떼를 쫒아간 사연이 나온다. 소떼가 뛰어가는 전경도 신기하고 그 사연이 특별하지 않았지만 왜 뛰어가는지 궁금해서 쫒아간 신야의 호기심이 아이마냥 천진하고 여유롭다.
P 210의 발리섬의 몇만마리 개구리의 합창소리를 거대한 호두열매를 굴려 대는 것같은 소리, 양쪽 고막을 찔러대는 가시라는 표현에서 그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겪어보지 않았지만 충분히 전달된다.
나와 다른 시선을 갖고 있는 신야의 글은 너무 아름답다.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여행기이면서도 현지인의 삶을 왜곡하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자연이 녹아있다. 여행객의 미화된 동경이 아니라. 그는 여행과 사람을 통해서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한다.
작가의 일기 같기도 하고 여행에세이 같기도 한 이 책은 날짜도 어떤 순서의 흐름도 없다. 저자처럼 일본에서 발리로 혹은 영국이나 뉴질랜드로 마구 넘나든다. 그의 글 사이에 나타나는 고베지진등의 특별한 사건을 통해 시기를 짐작할 뿐이다.
일본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자가 안내한 일본의 섬이나 마을은 내가 모르는 곳이고 그곳의 사람들의 삶도 너무 낯설다. 내가 일본을 간다면 결코 가보지 않았을 곳을 구석구석 안내해준다. 그의 글을 통해서 후지와라 신야의 삶이 곧 여행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자처럼 살 수 없지만 저자의 글을 통해 낯선 그의 시야로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내 눈으론 절대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상을 말이다. 나른한 고양이처럼 편안하게 때론 흥분으로 때론 박장대소하며 하루 동안 긴 여행을 다녀왔다. 그 여행은 정말 멋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