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좋아!

‘완전’ 맛있어!

한동안 대한민국에서 ‘완전’이란 단어는 ‘진짜’ ‘정말’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였다. 사전을 찾아보면 ‘완전’이란 ‘필요한 것이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음’이라고 나온다.(네이버국어사전 참조) 과연 완전은 존재할까? 100%? 어떤 것에 대해 100%라는 것이 존재하는 지에 항상 의심인 나는 이 책 제목 속 ‘완전’이란 단어가 조금은 거슬렸다. 그럼에도 주인공 엘리너 올리펀트 자신은 완전 괜찮다(fine)고 말한다. 묻고 싶었다. 당신! 완전 괜찮은 거 맞나요?

엘리너 올리펀트는 87년생 7월생, 9년 째 한 직장을 다니고 있다. 자기 생활에 만족해하며 취미는 크로스워드 낱말퀴즈 풀기다. 최

 

 

근 보고 온 콘서트 장에서 만난 가수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그녀를 소개한 글에서 보자면 그녀는 평범한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쁘진 않고, ‘사람에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해 완전 괜찮다고 볼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을 읽고 내가 직접 판단해보기로 했다. 주어진 100페이지 분량에서 나는 그녀를 뚫어져라 살폈다. 올리펀트가 하는 말, 보여주는 행동, 태도가 머릿속에서 그려지면서 ‘완전’에 대해 품었던 내 의구심이 스물스물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 과연 완전 괜찮은 거 맞나? 먼저 그녀가 왕따인 상황이 보였다. 그리고 상대의 말에 대답하는 그녀의 말을 보며 난감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공감능력이 떨어졌다. 그에 반해 위생에 대해서는 예민했다. 술을 자주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올리펀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완벽하게 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충분한 독립체라고 표현했다. 한번쯤은 불편함을, 불안함을 이야기할 만도 한데 그에 대해선 전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엄마가 자주 그녀의 일상과 생각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헬리콥터 맘인가? 알고 보니 엄마는 범죄자이고, 올리펀트 그녀는 범죄자 엄마의 딸로 국가에서 사회 복지사를 통해 관리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레이먼드와의 퇴근길에서 한 노인이 쓰러지면서 묘한 감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얼떨결에 레이먼드와 함께 그 노인을 돕는다. 이 사건이 그녀의 삶에 뭔가 브레이크가 될 거라는 조짐이 느껴진다. 그 이후가 어떤 변화가 있을는지 궁금해진다.

나는 ‘조금만’ ‘조금만 더 (알려줘)’를 외치며 읽어나갔다. 결국 의문과 아쉬움을 남기며 100페이지에 도달했다. ‘폴리’란 식물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는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왜 엄마의 일에 대해 알 권리를 포기했을까? 레이몬드는 그녀의 삶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녀를 사랑에 빠뜨린 가수는 그냥 그렇게 그녀를 스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 급히 읽어 놓친 부분이 있을까 싶어 돌이키며 또 읽고 또 추측해본다.

리즈 위더스푼이 영화화하기로 결정하고, 북어워드를 수상하며, 베스트셀러 책으로 선정됐다는데 그런 만큼 대단한 책이겠지? 얼마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 드러나길 기다리는 걸까? 8월 21일 출간으로 밝혀질 그 뒷이야기가 ‘완전!’ 알고 싶어!

책 초반에 인용된 올리비아 랭의 <외로운 도시>의 구절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외로움은... 그 욕망은 단순히 의지를 보인다고 해서, 혹은 외출을 더 자주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이 글이 이 책의 전개와 어떻게 연관되어 그녀의 상처를 외로움을 풀어나가는 키(key)가 될지 기대된다.

아! 하나 더!

그녀가 보여준 단어쪼개기를 보며 생각해 봤는데,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코끼리(Elephant)가 생각나는 건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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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 헤리엇이 사랑한 동물들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7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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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번째 헤리엇 시리즈가 나왔습니다. 오랜만에 헤리엇 시리즈를 맞이한 소감을 말해주세요.

<이 세상의 똘똘하고 경이로운 것들>을 비롯해, 3번째로 읽어보는 헤리엇 시리즈에요. 저희 아빠가 사슴농장을 운영하신 적이 있어서 헤리엇 시리즈에 나온 동물 이야기는 익숙한데요. 그렇다고 아빠가 농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잘 이야기 해 주신 편은 아니어서 듣지 못한 여러 일들은 이 시리즈로 생생하게 읽어봤어요. 또, 최근엔 아들들이 자연관찰 책만 읽어달라고 해서 단순히 동물을 몇 가지 특징과 짝짓기, 탄생으로만 본 게 아쉬웠는데, 그런 아쉬움을 달래준 게 이 책 아니었을까 해요. 오랜만에 반갑고, 마음 따뜻해진 이야기였어요.

2.여전히 따뜻한 감동을 전하는 헤리엇 시리즈네요. 그럼 이번 시리즈는 전의 것들과 어떤 점이 다를까요?

주제에 맞췄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이번 시리즈 주제가 <수의사 헤리엇이 사랑한 동물들>이기 때문에 양, 소, 개, 염소들이 각 스토리에 등장합니다. 매 편 동물들이 그림으로 먼저 등장해서인지 자신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느낌을 받습니다. 경기의 하이라이트같이 가장 애정이 가득한 동물들을 모은 게 아닐까 싶게 각 동물들은 각자의 매력을 뽐냅니다. 또 이번 책은 유독 겉표지 색도 예쁜데다 각 동물의 삽화까지 들어가 있는데요. 책의 크기 또한 한손에 잡히는 크기에 그림까지 사랑스러워 정말 소장하고 싶은 책입니다.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에 실린 10편의 이야기들은 본책에서 실린 이야기 중에 뽑은 거라고 해요. 편집을 맡아 이야기를 선정한 건 헤리엇의 아들, 짐 와이트였는데요. 사랑스러운 이 동물들의 치료이야기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림들을 함께 담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레슬리 홈스라는 분의 그림이라고 하네요.

 

 

3.기존의 책에서 뽑아낸 이야기를 담은 책이군요.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나요?

네! 그렇다보니 기존에 읽었던 책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보이더라고요. 다시 읽었을 때, 받았던 감동을 또 느꼈어요. 늙은 암소 블로섬이야기인데요. 주인과 함께 늙어간 블로섬은 계속 밟히기만 하는 젖꼭지를 꿰매다가 팔리기로 결정납니다. 그렇게 팔리기로 한 날 도축업자를 따라가는 블로섬과 블로섬을 거칠게 다루지 말아달라는 주인의 만류를 보며 참 가슴 아팠어요. 결국은 블로섬이.... 이야기는 책으로 읽어보세요.^^ 그 장면은 마치 영화에서 절정 장면을 본 듯해요. 이 글을 읽으면서 단순히 동물을 키우고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내는 게 아니라 주인과 동물사이도 사람사이의 관계처럼 교감이 생겨난다는 걸 실감하게 됐어요. 그밖에도 헤리엇이 자신의 아내 헬렌과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이야기도 로맨스마냥 설레였답니다.

4.이번이 3번째 고르신 거라고 했는데요. 헤리엇 시리즈를 잡게 되는 매력이 있을까요? 왜 이 책을 선택하셨죠?

생명, 탄생의 순간을 글로든 경험으로든 접할 때마다 감격이죠. 전 아빠가 사슴을 키우셔서 새끼를 낳았을 때, 집에서 키운 개가 5~6마리의 새끼를 낳았을 때, 그리고 그 개들이 하나하나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봤을 때, 제가 두 아이를 낳고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느꼈어요. 때마다 감동이고 신비롭습니다. 지금은 키우는 반려동물도 없고, 아이들도 많이(?) 커서인지 생명에 대한 감격이 그리워지기도 해요. 그때 저는 수의사 헤리엇 책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더 애정합니다.

5.이 책을 읽고 키득키득 웃었다던데, 어떤 장면이었을까요?

‘머튼은 아무 이상도 없다’ 편이었어요. 아마 수의사 헤리엇이 가장 지르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싶어요.(깔깔 웃음) 헤리엇은 새벽에 머튼의 주인에게서 전화를 받습니다. 하지만 결국 머튼에게 갔을 때 헤리엇이 봤을 때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허탈함과 원망이 들면서도 헤리엇은 자신의 일에 충실해서 머튼에게 갑니다. 결국 그런 여러 호출 끝에 마지막 호출은 정말 심각한 일이었다는 거죠. 머튼의 주인의 오버스러운 행동도 너무 웃기고요. 마지막에 반전스러운 부분도 전 너무 재밌었어요. 코믹영화를 보는 듯 했어요.

6.이 책에서 만큼은 우리에게 주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을까요?

제가 헤리엇 시리즈를 다 읽은 건 아니었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수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생각하는 헤리엇의 모습였어요. 제가 그렇게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유독 수의사로 일하면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인간적인 모습들이 자주 보였어요. 책으로 읽어서 우린 다 공감할 수 없겠지만, 쉬는 날도 없이 내게 있는 어떤 사적인 일이 있어도(자다 일어나서도, 모임에서도..) 즉시 출동해야 했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일투성이던 상황들이 그에게 얼마나 버거웠을까 싶기도 했어요. 물론 그를 가르쳤던 교수님의 말씀대로 부자가 될 수 없어도 흥미롭고 풍부한 생활을 그는 즐겼기 때문에 수의사로 일할 수 있던 거겠지만요.

7.이 책을 누구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수의사 이야기이기 때문에 동물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추천할 것 같으셨죠? 아니죠! 모두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생명은 다른 특정한 누군가에게 해당되는 분야가 아니에요.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의 생활 전반에서 마주하고 있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먹을까 사랑할까>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 헤리엇 시리즈가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동물과 인간의 교감이 새삼 더 깊이 느껴졌어요. 동물은 인간이 다스리기만 하는 권력구조아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인간과 동물 사이에 긴밀한 교류와 균형이 있어야 서로가 행복하고 지금의 환경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너무 나아갔나요?^^; 아무튼 헤리엇 시리즈 특히 이 책을 통해 생명이 주는 경이로움과 감격을 함께 느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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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까, 먹을까 - 어느 잡식가족의 돼지 관찰기
황윤 지음 / 휴(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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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서평대신 제가 알고 있는 까페 지인들에게 추천한 글을 옮깁니다.

여러분들의 글들과 용기에 감탄하며 글 올라올 때마다 눈팅만하고 있는 1인이에요.^^ 그래서 사실 다른 분들은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악어가 눈만 내놓고 먹을거 찾듯 조용히 여러분들을 요까페 글들로 파악하고 있답니다.ㅋㅋ

수업 후기도 아니고

제가 나름 용기를 내서 글을 적는 이유는

책 하나 알려드리고 싶어서에요. 제가 하고 있는 독서토론 모임에서 (저희 읽었던 <이상한 정상가족>과 함께)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인데요.

다들 아이 키우시는 엄마들이시고 무엇보다 의식있는 엄마들이시기에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원래 아이들 먹거리에 그다지 생각이 없었습니다.

남들 유기농유기농 할 때, 옛날 우리 먹은 것과 얼마나 다르다고 굳이 유기농을 따져야 할까? 하는 생각이 제 전반적인 먹거리 인식에 깔려있었죠. 아이들 이유식도 그냥 집근처 마트와 정육점에서 파는 채소와 고기를 사다해 먹였어요. 남들따라 한ㅇㅇ 에서 먹거리를 사봤지만, 별다른게 그다지 티가 나질 않으니 쉬운대로 가까운 마트에서 사다먹였죠.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먹거리와 생태계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집 밥상에 올라온 고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 집 식탁까지 올라왔는지 아시나요?

우리가 먹는 고기를 단순히 뉴스에서 보여주는 우리 안의 닭과 돼지들의 그것, 그리고 식당의 간판에 그려진 앞치마를 두른 닭과 엄지를 치켜든 돼지로만 친근하게 알고 계시진 않은가요?

혹여나 저희가 먹는 대부분이 공장축산으로 만들어진(?) 돼지와 닭이란 건 대략 알고는 계실거에요. 하지만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세세히 알지는 못하죠. 그걸 알면 소비자들은 소비를 꺼리게 될테니 제대로 알리는 곳도 없죠. 단순히 그곳 안의 동물복지 필요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서 동물들을 다루는 데서 파생되어지는 것들(분뇨, 항생제사용 등)을 인간들이 결국은 받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불과 오래지 않은 때 터진 신종플루, 조류독감, 메르스 기억나시죠? 닭과 돼지들의 등떠밀려 깊은 땅이나 비닐 속으로 살처분되는 영상 보셨지요? 메르스는 혹여나 옮을까봐 아기 병원부터 어디 외출하는 것까지 얼마나 공포스러웠던가요?이는 단순히 바이러스의 진화뿐은 아닙니다. 이는 먹고 싶은대로 먹어야겠다는 인간의 욕망과 어떤 것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만의 콜라보(?)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또한 공장식 축산과 도축으로 행해지는 생명을 대하는 행위는 인간이 약자에게 대하는 바와 다르지 않습니다. 수컷돼지의 거세, 돼지 생산의 증대를 위한 암컷돼지의 출산과 임신 번복 등을 보면 인간의 잔혹함은 과거 히틀러, 스탈린의 행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저희들이 육식을 하는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고 먹어야 할 필요와 권리가 있으며,이것이 단순히 먹는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전 생태와 관련있음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이 누구에게는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함부로 방송에서 다루거나 쉬이 추천할 수 없겠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누군가에겐 상당히 불편한 내용일 수 있고요.

하지만 엄마이기에 우리아이가 살아갈 세상이기에 알고 고민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 감히(?)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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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며 마주치는 일상의 숱한 선택 앞에서 나는 자주 가치관이나 윤리 같은 저울을 꺼내야 했다. 그런데 가치관이라는 저울을 꺼내면 습관이란 방해꾼이 불쑥 튀어나오고, 윤리라는 저울을 꺼내면 이기심이 튀어나왔다. 저울의 눈금은 자주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윤리적 소비'를 하려고 노력했다.

p.15-16

"구제역으로 온 나라가 난리가 났을 때도 우리 농장은 아무 탈이 없었어요. 우리 농장은 아무 탈이 없었어요. 우리 돼지들은 무탈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어요. 구제역이 큰 병이 아니라,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기 같은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평소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살아온 돼지들은 구제역에 잘 걸리지도 않고, 걸려도 자연 치유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홍천 어느 집 돼지들이 구제역에 걸렸는데 뜨거운 물을 먹이고 햇볕을 쬐게 했더니 저절로 나았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우리는 돼지들을 늘 햇빛, 바람, 흙 속에서 살게 하고, 좋은 먹이를 주니까 자신이 있었죠. 우리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는 거죠. 여기서 무너진다면."

p.33-34

나는 이곳까지 찾아온 경위와 이유를 말씀드렸다. 구제역 살처분의 충격으로 돼지에 관심을 갖게 된 이야기, 대부분의 돼지가 사육되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 그 정반대 축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돼지를 키우는 소규모 농장을 찾아 여기까지 오게 됐노라고.

p.35

원가자농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유기농 경축순환 농장이다. 경축순환이란, 작물의 부산물을 가축이 먹고 가축의 퇴비를 작물 재배에 이용하는 순환을 말한다. 과거에는 이런 농장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극히 소수다. 지금도 논밭에 퇴비를 사용하지만, 대부분 밖에서 사 오는 퇴비이지 자신이 기른 가축의 퇴비는 아니다. 게다가 공장식 축산에서 나온 분뇨로 만들어진 퇴비이므로, 사육될 때 사용한 항생제와 약물도 포함된 퇴비다.

p.61

어느날, 공장식 축산이라는 열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열차는 축산기업과 소비자의 두 바퀴로 굴러갔다. 달리는 열차에 연료를 부어준 것은 정부의 공장식 축산 지원이다. 동물복지, 국민건강,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축산의 양적 팽창에만 전념해온 정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이윤을 축적해온 축산기업, 고기를 싼값에 많이 먹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욕망이 모여, 열차는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많은 동물을 실어 나른다. 브레이크 없는 열차는 어디로 치닫고 있을까? 그 열차에 동승한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보고 느낀 공장식 축산을 한마디로 정의 내리면, 그것은 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무정한, 혹은 비정한 산업이다. 유정한 생명체를 자본의 논리와 인간의 탐욕으로 무정하고 비정하게 사육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p.94-95

그렇다. 누구나 자신이 먹을 음식을 선택할 권리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런 질문들이 따라왔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먹을 음식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받고 있나? 식당, 급식, 방송, 광고... 온통 육류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음식들은 정말 우리의 선택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강요하는 선택인가? 공장식 축산이 아닌 농장에서 인도적으로 기른 동물을 먹을 권리는 주어지는가? 또 동물을 먹지 않을 권리는 존중되는가? 다른 것을 먹을 선택권은 주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돼지들이 돼지답게 살 권리는 존중되는가? 인간의 욕망을 위해 고기 생산 기계로 취급받는 것에 돼지들은 동의했는가?

p.118-119

"늘 갈등이고 숙제지. 나도 거세하고 나면 정신이 없어요. 멍해져. 그런 갈등을 멍한 걸로 잠재우는 것뿐이지. 시간이 가면 나도 잊어버리고, 맞닥뜨리면 갈등하고...."

p.130

강제환우, 즉 강제 털갈이는 최대한 알을 많이 뽑아내기 위해 고안된 방식 중 하나다. 양계 교과서에도 나와있는 강제 털갈이 방법은 이렇다. 알 낳는 능력이 떨어지면 며칠 동안 물을 주지 않고 이후 며칠은 사료를 주지 않는다. 그 충격으로 암탉의 깃털이 빠지면, 다시 사료를 공급한다. 그러면 암탉은 다시 알을 낳고 이전보다 큰 알을 생산하게 된다. 그렇게 암탉의 생명을 쥐어짜서 생산된 달걀은 '왕란', '특란'으로 가판대에 오른다.

p.170-171

... 사람들은 "어떻게 닭 농장에 살충제를 뿌려댈 수 있나"라고 몸서리를 쳤지만, 나는 "어떻게 닭 농장에 살충제를 뿌리지 않을 수 있나?"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닭들을 배터리 케이지에 쑤셔 넣어 밀집 사육하면서 진드기와 이, 바이러스가 득실대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까?

조류독감과 살충제 달걀은 전혀 다른 사안 같지만 원인은 똑같다. 그 둘은 닭의 습성과 복지를 무시한 채 오로지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닭들의 생명을 쥐어짜는 공장식 축산이 만들어낸 샴쌍둥이인ㄱ 것이다.

p.172

대장균은 인간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다. 현재 사람의 몸과 대장균은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문제는 대장균이 병원성 대장균으로 변한 데 있다. 소와 돼지는 배설물을 묻힌 채 도축장에 온다. 시간당 수백 마리를 도축하는 과정에서 배설물이 고기에 섞이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햄버거 패티 등 분쇄육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수많은 동물들의 사체를 분쇄하고 섞어서 하나의 패티를 만들기 때문이다. 즉, 한 마리가 오염되면 수백 개의 패티가 오염될 수 있다.

옥수수가 햄버거병의 원인이라는 연구도 있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카길, 몬산토 등 거대 곡물회사에서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대량으로 생산해내고, 이것이 가축 사료가 된다. 곡물 산업과 축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싼 옥수수 사료의 대량 생산은 싼 고기의 대량 생산을 이끌었다.

p.178

'신종플루'의 원래 병명은 '돼지 독감'이었다. 2009년 2월, 멕시코 동부의 라글로리아 지역에서 집단 발열 증상이 발생했다. 보건 당국이 검사해보니 주민 1,800명 중 60%가량이 독감에 감염돼 있었다. 라글로리아 마을 근처에는 세계 최대 양돈기업인 스미스 필드의 가공 공장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문제의 바이러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이것이 돼지 독감 바이러스임을 확인했다. 즉, 돼지를 밀집 사육하는 공장식 축산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이된 것이다.

p.192-193

조류독감도 마찬가지다. 원래 '고병원성 조류독감'으로 불리던 전염병은 어느 순간 AI로 불리고 있다. 원래 '고병원성 조류독감'으로 불리던 전염병은 어느 순간 AI로 불리고 있다. AI는 조류독감의 영어인 'Avian Influenza'의 첫 글자를 딴 약자다. ... '고병원성 조류 독감'이라는 표현으로 닭고기 소비가 위축될 것을 염려하는 업계의 요구 때문이다.

p.193

의학 인류학자들은 인류가 경험한 질병을 크게 세 가지 시기로 나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시기는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1만 년 전. 야생에서 살던 동물들을 소유하고 길들이기 시작하면서 질병도 같이 들어왔다. 소와 양을 가축화할 때 홍역 바이러스가, 야생돼지를 가축화할 때 백일해가, 낙타를 가축화할 때 천연두가 같이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닭을 가축화하면서 장티푸스를 얻었고, 오리를 가축화하면서 독감에 걸렸고, 나병은 물소에게서, 일반 감기는 말에게서 왔다고 한다.

p.199

"거꾸로 보면 바이러스는 살고자 노력하는 것일 뿐이에요. 인간이 악독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변하는 겁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악독한 바이러스나 병원체는 오히려 인간입니다. 신종플루든 구제역이든 그 바이러스들은 생명체로서 자신들이 살기 위해 열심히 생활하는 겁니다. 항생제 내성균도 마찬가지예요. 수많은 인수공통전염병들이 새롭게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우리가 만들고 있고, 그러면서 방지하겠다고 인간 위주의 시각으로 독한 소독약을 뿌리며 방역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바이러스나 세균은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거고요. 새로운 질병의 등장은 인간에 대한 경고예요. 인간이 매우 진지하고 겸손하게 생각해야 될 시점이에요. 인수공통전염병을 만들어내는 균과 신종 인플루엔자를 만든 것이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바라봐야 될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아니겠습니까.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공장식 축산이고요. 공장식 축산이 수많은 질병을 만들어내고 불러들이는 문고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값싼 제품을 소비하겠다는 우리의 욕망이 결국 새로운 인수공통전염병을 만들고 그로 인한 피해는 우리가 받게 되는 거죠.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어요."

p.201-202

그렇다면 분뇨가 퇴비가 되면 괜찮을까? 가축에 투여된 항생제가 분뇨를 통해 빠져나가 퇴비가 되고, 토양에 뿌려지고, 거기서 재배된 작물을 인간이 먹는다. 그러니까 항생제->가축->토양->식물->인간의 사슬을 통해 항생제는 결국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인간에게 돌아온다. 지금 세계에서 사용되는 항생제의 약 80%는 사람이 아니라 가축에게 투여되고 있다. 이에 따라 여러 항생제를 써도 듣지 않는 슈퍼박테리아, 즉 다제 내성균이 많아졌다.

p.222

공장식 축산은 비생산적인 시스템인데 마치 생산적인 시스템인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 비용을 숨기고,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것을 숨김으로써 그렇게 보이는 것이죠. 공장식 축산은 엄청난 보조금이 있기에 가능해요. 불행히도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규모 축산업이 보조금의 지급 방향을 조작해서, 유기농 축산 농가에 가야 할 보조금이 대형 공장식 축산으로 가고 있어요. 덤핑 행위와 불공정한 보조금 지원 때문에 돈이 많이 드는 시스템이 싸 보이는 거죠.

다큐멘터리 영화 <러브미텐더> 中

p.269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이 먹는 고기의 근원과 식탁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돼 있어요. 우리는 우리가 먹는 고기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직접 동물을 죽이지 않고, 그들이 도살되는 장면을 볼 기회도 없습니다. 그런데 고기 소비량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우리가 동물을 쉽게 먹을 수 있는 건 축산 현장이 철저히 격리, 은폐되었기 때문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직접 기르고 직접 죽여서 먹는다면, 고기 한 점의 무게가 훨씬 크게 다가올 겁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먹게 되겠죠. 저도 상품이 된 고기만을 먹다 보니 평생 아무런 생각 없이 고기를 먹어오다가, 영화를 만들면서 돼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고 그들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들도 감정이 있고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된 이상, 저는 살생의 고리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굳이 고기를 먹겠다면, 최소한 그 과정을 알고 먹는 것이 책임 있는 육식이라고 생각합니다."

p.282

무엇을 먹느냐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다. 무엇을 먹느냐는 사적인 일 같지만 공적이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일이다. 내가 어떤 세상, 어떤 가치를 지지하는지를 놓고 참여하는 '투표'다. 이 투표가 중요한 이유는 하루 세 번, 인류 전체가 참여하는 투표이기 때문이다. 매일 전 지구적으로 이루어지는 이 거대한 투표에 따라, 지구라는 배에 동승한 모든 승객들의 삶의 질과 생존 여부가 달라진다. 모든 지구인이 유권자인 이 투표에서 채식을 지지하는 것은 비폭력, 평화, 생명의 편에 서는 일이다.

p.320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엘리 비젤(작가, 노벨평화상 수상자)

동물에 대한 억압과 여성에 대한 억압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축산 동물들이 인간의 필요나 판단에 따라 이용되고 운명이 결정되는 것처럼,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자신의 삶의 결정권을 스스로 가질 수 없다. 여성 돼지들은 출산과 임신을 반복 당하며 새끼 낳는 '성적'을 높여 국민 총생산과 축산 경제 성장과 고기 생산량 증가에 이바지하도록 이용된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 혈통 유지를 위해 출산에 복무하도록 요구받아온 여성들은 이제 고령 사회를 맞이해서는 '출산율'을 높여 '노동인력'을 생산해서 국가 경제와 '애국'에 이바지하도록 주문받는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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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이는 특별하다 - 박혜란의 창의적인 아이 키우기 박혜란 자녀교육
박혜란 지음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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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으면 되요. 내가 하려고 하는 거 그건 절대 옳은 게 아니라는 것만 알고 아이를 키우면 돼요.”

남들 좋다고 평하는 대학에 아이 셋을 막힘없이 보낸 어떤 인생의 선배가 내게 신신당부했다. 만난 지 두 번 밖에 안 되었음에도 아이를 절대 내 방식으로 키우질 말라신다. 아마도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시키는 부모들을 보시고 하신 이야기 같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다. 솔직히 나는 내 방식이라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다. 특히 교육적인 면에서...

 

나는 박혜란 선생님이 그런 면이 조금 나랑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책이, 그의 글이 참 좋다. 군더더기나 과장없는 담백함이 좋다. 그리고 글에 담긴 여유와 위트도 좋다. 그의 글을 읽으면,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안도감이 든다. 분명 사회 속의 많은 이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달리는데, 그들은 내 옆을 지나 앞질러 가며 힐끗 나를 돌아본다. ‘넌 안 뛰고 뭐해?’라듯 경각심 가득한 시선을 던진다. 선생님의 글을 보면 나보다 뒤에서 여유 있게 따라 걸어오면서 ‘괜찮아! 가던대로 가!’라고 외치는 누군가를 보는 것 같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 육아 계발에서 주장하는 바와 다르다. 대부분의 육아계발서는 최근에 육아, 교육을 경험한 부모나 전문가의 이야기가 많다. 대체로 구체적이고 단편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육아를 이야기하기엔 멀게만 느껴지는 70대, 손주들을 본 할머니(물론 여성학자)다. 그의 글은 구체적이진 않다. 어쩌면 포괄적이다. 하지만 그는 뭣도 모르고 시대의 흐름에 쫓기다시피 무언가를 쫓는 부모의 불안과 염려를 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다. 눈앞의 산 넘기도 바빠 허덕거리는 젊은 부모에게 그 너머 넓은 그림을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멀리서는 보이는 젊은 부모들은 놓치고 있는 지혜들을 전수한다.

그의 글을 보면 우리가 쥐고 있는 팽팽한 긴장의 고무줄을 끊어야 할 것 같다. 육아를 하는 처지에서는 난 꼭 그리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때론, 아이들이 싸우는데 내가 껴서 중재하려 들것이고, 아이한테는 늘 미안해 죽겠다며 온갖 죽상을 지을 것이다. 왜 우리 애는 하고 싶은 게 없을까 걱정을 붙들어 매고 살 것이고, ‘남들은 다 하는데 우리 애만 안 시키는 거 아냐?’라며 조바심 칠거다. 하지만 안다. 내가 하려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아이는 나의 분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 없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p.160) 그래서 그의 육아 조언을 붙들려고 한다. 틈틈이 흔들리는 관점을 단단히 고정하고, 지혜와 여유를 갖고 아이들을 키우려고 말이다.

 

한 아이를 책임진다는 데서 상당한 무게감을 느낀다. 그 누구도 그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찌되었든 내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코 내 삶과 뗄레야 떼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장한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노력한다. 그런데 그게 답이 아니기도 하단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흔들리고 또 흔들려 꿋꿋이 가는 게 엄마가 되는 길인 것 같다. 이 책은 그렇게 흔들리고 흔들리며 엄마의 길을 가는 이들이 읽어볼만하다.

‘창의적인 아이 키우기’가 이 책의 컨셉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이의 창의성이나 특별함말고 나 자신이 육아하면서 흔들리는 것이나 내 육아의 방식에 더 초점을 맞춰 읽었네? 그래도 내가 이 책을 잘 읽었고, 내 나름 건진 게 있다면 그걸로 됐다.

하여간에(?) 난 박혜란 선생님이 좋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남과 다르게 사는 것도 두렵고 남이 나와 다르게 사는 것도 두려워 한다.

p.22

 

 

물론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아이도 혼자 키울 수 없다. 남과 더불어 사는 게 세상이고 누구나 서로 도와 가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부모다. 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할지는 부모가 제일 잘 안다, 아니 알아야만 한다.

p.23

 

 

.. 얼마 전 작고한 영국의 유명한 그림책 작가 존 버닝햄이 늘 강조한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어른보다 덜 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경험이 부족할 뿐이다.'

p.30

 

 

좀 심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한국의 많은 엄마들이 아이의 성적에 매달리는 가장 큰 이유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지나치게 남의 시선에 얽매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아이를 어떤 사람을키우고 싶다는 자기만의 그림 없이 그저 '남 보란 듯이' 키우고 싶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p.42

 

 

그런데 좀 이상하다. 조상때부터 워낙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비슷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부의 목표치를 '남부러울 것 없는'데다 설정하는 건 참으로 비정상적이며 동시에 불가능한 목표가 아닐까.

p.43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면서 나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이 키우기의 목표이자 재미이지, 남에게 너 참 아이 잘 키웠다는 말을 듣고 그의 부러움을 사는 게 목적이 아니다.

p.44

 

 

결국 문제는 언제나 부모의 불안감이다. 모든 아이들은 다 나름의 적성이 있고 맘속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 다만 그걸 언제 드러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떤 아이는 조금 빠르게, 어떤 아이는 조금 느리게 그것을 밖으로 표출한다.

p.58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의 창의성을 키워 줄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냥 살던 대로 살자라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진다. 왜냐하면 창의성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대신 성적은 확실하게 보이니 시대에 뒤질망정 우선 그거라도 착실히 확보해 놓는게 그나마 안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젠가 '한 가지만 하면 대학 갈수 있다'는 정부의 말에 속았던 선배들의 쓰라린 과거를 되풀이하긴 싫다.

p.70

 

 

... 무엇보다 부모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공감능력이 있는지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 나와 다른 사람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며 살았는지, 아니면 선을 그어 놓고 살았는지 돌아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아이의 공감능력을 키워 주려면 부모부터 마음을 열어야 하는 이유다.

p.78

 

 

... 창의력은 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꾸준히 쌓아올린 자산 위에서만 꽃이 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창의력을 키우려면 '거인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창의력을 키우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

p.100

 

 

...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공부는 이전처럼 학교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주입식 공부가 아니라 미래의 꿈을 위해서 '하고 싶은' 공부, 남보다 앞서가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공부'여야 한다.

p.101

 

 

어떤 아이는 부모와 함께 떠난 한옥마을 여행에서, 또 어떤 아이는 로마 유적에서, 또 어떤 아이는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에서 건축가가 되고 싶은 자신의 꿈을 확인할 수도 있다. 부모가 아이의 꿈을 대신 꾸어줄 수는 없다. 다만 아이가 마음 놓고 꿈을 꿀 수 있도록 편한 분위기만 마련해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p.115

 

 

실제로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서 학부모가 되면 그때부터 엄마들의 고민은 한층 더 깊어진다. 아이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게 소원인데 주위를 둘러보면 자신이 현실감각이 없는 엉뚱한 꿈을 꾸는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대다수의 엄마들이 가는 길로 따라가자니 도무지 내키지 않고 그렇다고 나 혼자 다른 길로 가자니 겁이 더럭 난다. 저 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길이 옳다는 확신도 서지 않는다.

p.134

 

 

,,, 그러니 아이들이 싸우면 일단 그 자리를 피해버리라고 했다. 그 엄마는 자기가 피하면 아이들이 더 싸우지 않냐고 반문했다. 싸우다 지치겠죠 뭐, 그때가서 왜 싸웠는지 차분하게 들어주면 돼요. 그리고 엄마 자신부터 이런 사소한 일에 눈물 흘리지 말고 좀 대범해지라고 덧붙였다.

p.137

 

 

아무튼 자식으로부터 원망 듣지 않을 방법을 모색하는 대신 어차피 부모는 원망 받을 운명의 직업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면 속이 편하다. 그런데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부모가 약간 부족하게 키운 자녀들보다 부모가 너무 넘치게 키운 자녀들이 나중에 원망의 강도가 더 큰 것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은 나의 의도된 착각일까.

p.144

 

 

"아이를 잘 키우고 싶으면 무엇보다 절대로 아이를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부부가 싸우세요. 피 터지게 싸우세요. 그렇다고 아이 앞에서 싸우면 안 돼요. 아이 없는 데서 싸우세요. 끝까지 싸워서 어느 쪽이든지 한쪽으로 방향을 정하세요."

p.156

 

 

.. 내 경험에 따르면 모든 엄마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아이를 키운다. 그 엄마가 겪은 고충은 그 엄마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다. 하릴없이 다른 엄마의 고충을 지레 느끼고 지레 걱정할 게 뭐가 있담.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 역시 엄마가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쉬운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p.160

 

 

아이에게 엄마는 나를 사랑하며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믿음만 주면 된다. 아이에게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이 아니라 힘들지만 행복하다는 얼굴을 보여 주면 된다.

p.167

 

 

지금까지 제가 아이들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너희들이 나한테 손님으로 와 줘서 너무 고맙다'라는 거예요. 이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부모들 가운데서 바로 나에게, 이처럼 못나고,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욕심 많고, 심술 많고, 그러면서 잘난 척하고, 게으른 그런 엄마한테 와 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p.215

 

 

내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아이에게 무얼 해줄까 공연히 무얼 쓸 필요 없이 먼저 엄마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엄마가 할 일은 그저 아이에게 행복한 엄마를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당장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행복한 엄마가 되는 가장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 있다. 다름 아니고 아이에 대한 내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네가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할 거다'라는 생각 대신 '네가 있기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먼 미래에 행복하게 살 너로 인해 나도 비로소 행복해질 것이 아니라 현재의 너로 인해 난 이미 충분히 행복한 엄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객관적 상황이 아무리 열악해도 엄마는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말 행복하다는 믿음을 아이에게 준다면, 행복한 사람의 표정을 보여준다면 아이는 엄마 얼굴만으로도 행복이 무언지 배울 수 있고 저절로 행복해질 수 있다.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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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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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읽자마자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당연히 바닷가에선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겠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육지에 파묻혀 사는 내겐 설레는 일인데, 바닷가에 작업실이 있으면 얼마나 황홀할까? 한 달전 통영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통영을 통해서 본 남해안은 확실히 다른 방향의 바다와는 달랐다. 끝이 없어 보이는 바다가 펼쳐진 동해안, 드러난 갯벌이 떠오르는 서해안. 남해안은 다른 바다와 달리 초점이 허공에 뜨지 않았다. 바다 가운데 드문드문 있는 섬들로 시선이 머물만해서 아련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 바다를 바라보는 작업실에선 분명히 다른 시간이 흐를 것이다.

 

교수로, 심리학자로, 방송인으로 활발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지만, 그 안에서도 공간에 대한 욕심(공간충동)을 인지했고, 슈필라움을 찾아 나섰다. 2년간 여수 바닷가 작업실에서 지내보고, 그는 여수 남쪽 섬 ‘미역창고’를 저자는 자신의 공간인 슈필라움로 확보했다. 주변의 반대, 비싸게 지불한 창고구입비, 섬으로 들어가는 배에서 홀로됨 여러 가지 코스트를 지불하고 자신의 본능, 공간충동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 결국 미역창고로 들어갔다. 이 책 속의 미역창고를 본 대부분의 독자들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 병원과 마트가 가까운 곳이 집 조건 1순위라서 그렇지, 그의 집을 가득 메운 책장 그리고 책들 그리고 바다풍경을 보니 나도 저런 작업실 겸 집 갖고 싶다.

 

이 책은 여수에서 지내면서 느끼고, 헤아리고, 통찰한 것들을 나눈 글이다. 또한, 그가 미역창고를 슈필라움으로 갖기까지 슈필라움을 구체화한 과정들을 다뤘다. 내가 읽어본 저자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다소 도발적이기까지 한 그의 기존 책제목들을 보며 난 선뜻 그의 책을 집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바다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래서 아득하면서도 그리움이 느껴지는 바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공간과는 다른 그 곳이 궁금하다. 슈필라움이란 단어 또한 굉장히 매력적인 단어다.

저자는 참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전 책들의 제목이 심상치 않았던 것만큼 그의 솔직함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이 책에서도 노골적이다. 자신이 산 배의 이름을 ‘오리가슴’이라고 했는데, ‘오르가즘’의 한국식 표현이란다(p.258) 정신적 지적 오르가즘이 있지 않냐며 거론한 ‘오르가즘’이란 단어는 우리가 쉽게는 생각해도, 쉽게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단어다. 그런 단어 그리고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정직하게 글로 표현했다. 예쁜 여인을 보면 말 걸고 싶고, 눈길이 가는 자연스러운 현상도 솔직히 이야기 한다. 흔히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암묵적인 동의하에 드러내지 않는 생각에도 그는 자유로웠다.

그래서 재밌었다. 허위허식이나 지적인 척 하지 않고 편하게 투덜거리는 느낌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나도 어느새 깔깔대며 웃고 있다. 유시민 작가와 자신의 외모를 비교하며 자신에게 승리의 손을 올려주고, 이상순의 부드러움을 질투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게임 끝 ‘이효리’를 거론한다. 목욕탕에서 만난 남자를 묘사하며 불쾌감을 쏟아내는 장면에서 저자는 분노하지만, 독자는 웃느라 뒤로 나자빠진다. 눈 작은 사람치고 만만했던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외모에 대한 생각들을 은근히 쏟아낸다. ^^;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예상을 뛰어넘는 재치와 기발함이 담겨있다. 이미 여수 섬 앞에 작업실을 짓고, 책을 몽땅 옮겨오는 행위자체가 그렇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침을 바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책을 사려고 여행한다. 자신의 빈 책장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책이 잘 팔려야 한단다. 물론 이런 위트는 그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인생의 지혜와 통찰이 담긴 그의 사유를 더욱 몰입하게하기 위함이다.(그건 아래 인용참고^^)

 

규칙적이고 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 정적인 면에서 그와 조금은 비슷하다과 애써 말해보지만, 나는 보통의 삶을 사는, 평범한 생각을 하는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여행하듯 이것저것에 새로운 시선을 틔우게 해주었다. 또, 서울의 높은 건물과 수많은 차선을 덮는 차들만 보다가 통영으로 가서 본 바다에서 느낀 탁 트인 구도를 그의 글과 그림에서 발견했다. 그가 보낸 바닷가의 전혀 다른 시간이 책을 읽는 내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슈필라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겐 주체적인, 놀이의 공간이 있었나? 잠깐이라도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고, 음악을 듣고, 스트레칭을 할 만한 공간? 그런 거?

가능하다면, 먼저 나같은 엄마, 여자, 주부에게는 아이와 집안일로 해방될 시간과 상황부터 줘라! 그렇다. 주위를 둘러보면 내 공간이랄 건 딱히 없다. 책장은 방에, 책은 거실에, 책상은 수시로 접었다 폈다 하는 좌식 캐릭터 책상뿐이다. 그래서 책 한 권 들고 매일 내게 가능한 슈필라움을 찾으러 간다. 의자, 탁자, 책,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린티프라프치노가 있는 까페로...

 

 

 

 

 

 

 

 

시선은 곧 마음이다. 내 시선이 내 생각과 관심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 눈의 흰자위가 그토록 큰 이유는 시선의 방향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흰자위와 대비되어 시선의 방향이 명확해지는 검은 눈동자를 통해 인간은 타인과 대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함께 보기'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함께 보기'에 기초한다. 다른 동물들은 시선의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눈 전체가 거의 같은 색이거나 흰자위가 아주 작다. 소통이 아니라 사냥하기 위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시선의 방향이 드러나지 않아야 사냥에 더 유리하다.(이제까지 살면서 '눈 작은 사람'이 만만했던 적은 없다. 흰자위가 다 드러나는 '눈 큰 사람'은 대개 참 편안했다. 뭐, 내 개인적 편견이다.)

p.34

 

'물때'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살다 보면 '물때'와 같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이 들 때가 있고, 나갈 때가 있다. 잘 될 때가 있으면 안 될 때가 당연히 있다. 이 '물때'와 같은 시간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조급함'이다. 항상 잘 되어야 하고, 안되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조급함 때문에 참 많은 이가 불행해졌다.

p.44

 

...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날아다니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의 고리를 의식할 수 있는 '자기 성찰'에 인간 창조성의 본질이 있다.

p.52

 

중요한 결정일수록 서글프다. 혼자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p.56

 

사회는 '담론적'이어야 하고 삶은 '단언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다.

p.69

 

'공연한 불안'에 대처하는 내 나름의 해결책은 걱정거리의 내용을 노트에 구체적으로 적는 일이다. 제목을 붙여 적다 보면 걱정거리는 '개념화'된다. 내 걱정거리의 대부분은 아무 '쓸데없는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된다....

p.79

 

행복 혹은 '좋은 삶'에 좀 더 실천 가능한 방식으로 접근하자는 이야기다. '싫은 것', '나쁜 것', '불편한 것'을 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하나씩 제거해나가면 삶은 어느 순간 좋아져 있다. '나쁜 것'이 분명해야 그것을 제거할 용기와 능력도 생기는 것이다. '나쁜 것'이 막연하니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참고 견딘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아주 구체적으로 애쓰지 않으면 '좋은 삶'은 결코 오지 않는다. 아무도 내 행복이나 기분 따위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계란을 삶는다.

p.115

 

책을 읽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의미'의 생성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 사건과 경험들에 대한 기억은 주체적 관심에 따라 서로 연결되며 의식의 차원으로 올라온다. 인간의 의식 또한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다. '입자'와 같은 개별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행위가 바로 '의미 부여'다. 개별 사건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단순한 '팩트'에 불과한 사건들을 연결하는 그 '의미 부여'가 의식의 본질이다.

p.130

 

공연히 불안하면 미술관, 박물관을 찾아야 한다. 그곳은 불안을 극복한 인류의 '이야기'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하는 느닷없는 질문으로 조급해진다면 음악회를 찾는 게 좋다. 몸으로 느껴지는 음악은 삶의 시간을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p.144-145

 

그래서 자동차 안이 그렇게 행복한 거다. 한 평도 채 안 되지만 그 누구도 눈치 볼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다. 밟는 대로 나가고, 서라면 선다. 살면서 이토록 명확한 '권력의 공간'을 누려본 적 있는가? 그러니 도로에서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면 그토록 분노하는 거다.

p.202

 

은은하게 조명을 밝히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도 쭉 늘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이 있어야 '자기 이야기'가 생긴다. '자기 이야기'가 있어야 자존감도 생기고, 봐줄 만한 매력도 생기는 거다. 한 인간의 품격은 자기 공간이 있어야 유지된다. 아, 자기 전에 그 공간에서 하루를 성찰하며 차분히 기도도 드려야 한다. 자다가 아예 영원히 잠들 수도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위에 이미 여럿 그렇게 갔다.

p.206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그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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