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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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냈던 긴긴밤을 떠올려본다.

- 탈수 오기 전에 대형병원으로 가보라고 소아과에서 소견서 받았을 때

- 어린이대공원에서 잠깐 쓰레기 버리다가 돌아봤더니 애 없어져서 찾았던 순간

- 다른 아이를 쳤다고 상대부모님이 화가 많이 나셨다는 전화를 어린이집에서 받았을 때

- 온몸이 벌거벗은 상태로 의식없이 링거만 맞고 있는 아이를 응급실에서 봤을 때

- 아무것도 안 보이는 'ㅇㅇ천'의 밤, 어둠이랑 내 아이 아닌 다른 사람들 밖에 안 보였을 때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긴긴밤'들이 있을 것에 비하면 고작 몇 가지일텐데 지금도 아찔하다. 앞으로의 '긴긴밤'을 나는 어떻게 견뎌낼 것이며, 견뎌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보내고 싶지 않아서 보내는 게 두려워 엄마는 마음 속이 아릿하고 찌릿하다.

이 책은 '노든'이라는 코뿔소가 자신을 성장하도록 돕는 이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가족이 되고 해체되고, 친구를 만났다 이별하고, 드디어 새 친구를 만났는데 상실과 함께 다른 친구가 생기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시선으로 코뿔소 노든의 한 생애를 바라보았고, 노든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던, 그래서 내가 살 곳 '바다'를 찾을 수 있었던 그 구구절절함에 코끝이 찡해진다.


'긴긴밤'을 함께 보낸 누군가가 있었고, '긴긴밤' 동안 외로히 분투하는 이가 있었다. 그렇게 그 긴긴밤을 보내기 위해 지지해주는 자와 견디는 자가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성장한다.


인간? 사람?

자신의 친구들을 앗아간 이들을 코뿔소 노든은 '인간'으로 본다. 그들에게선 사람 특유의 냄새가 난다. 바로 총 냄새다. 인간들은 코뿔소의 뿔을 자른다. 노든의 가족들을 죽였다. 그래서 노든은 인간이라면 다 들이받으려는 복수심에 불타있다.

하지만 모두가 나쁜 '인간'은 아니다. 노든을 병원으로 데려가 수술을 받게 하고, 영양주사를 맞게 한 '사람'도 있다. 나중에 노든은 친구 코뿔소 '앙가부'를 통해 세상엔 좋은 '인간'들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의심이 되는 '인간'들이었지만 모두가 그렇게 동물들을 공격하지만은 않았다.


친구는?

노든의 아내는 '우리'에서만 자라온 노든에게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준다. 평생을 동물원에서 자라온 앙가부(코뿔소)는 '노든'에게서 바깥세계에 대해 듣는다. 치쿠는 바다에서 동물원으로 들어온 펭귄 친구를 통해 '바다'가 무엇인지 알았고, 육지에서만 살았던 노든은 치쿠가 말해준 '바다'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접하게 됐다.

이렇게 친구는 내가 알지 못했던, 경험하지 못했던 다른 세상을 알려주는 존재와 같다.


다른 무리들과 자란 또 다른 존재

코뿔소 노든은 코끼리들의 무리에서 자라 '훌륭한 코끼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노든은 코뿔소였고, 코뿔소 답게 자라야 했다. 그래서 코끼리 무리를 떠났다. 훌륭한 코끼리처럼 자란 노든은 코뿔소로 성장해 간다. 이와 비슷하게 '나(펭귄)'는 처음 만나고, 성장하게 도와준 존재가 코뿔소였다. 노든처럼 훌륭한 코뿔소가 되고 싶었지만, '펭귄'으로 자라야했다. 그래서 훌륭한 코뿔소와 같이 자라 '나'의 세계 '바다'로 나아간다.

한 인간의 성장을 위해 '가족'만 필수요소일까? 생각이 든다. 다른 존재이고, 다른 환경일지라도 누군가의 충만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충분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노든처럼 그리고 '나'처럼 말이다.


글과 그림 모두 루리작가님이

글과 그림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글과 그림 모두 한 작가님에게서 나왔으니 전달력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싶다. 코뿔소를 가둔 철조망이, 펭귄이 힘써 내려간 절벽이 그림을 통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다만, 코뿔소에게 모든 슬픔을 다 떠넘겨 주신 건 (어쩔 수 없으셨다 하더라도) 너무 슬펐습니다. ㅠㅠ


노든에게 '나'에게

노든! 너는 너에게 주어진 삶을 충분히 쏟아내고 살아냈어. '나'라는 펭귄이 적에게 똥을 찍찍 쏘아댈 수 있고, 재빨리 숨을 수 있는 생존능력을 갖춘 것보면, 넌 한 생명을 그에 맞게 잘 키워냈어.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말고 너에게 주어진 삶을 마저 살아냈으면 좋겠어. 감당할 수 없을만큼 슬픔은 가득하지만, 그래도 삶 속에 작은 행복 속에 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얼룩알의 펭귄!!('나') 당차게 야무지게 살아온 삶을 누군가에게 받았듯이 그 삶을 잘 살아주길 바라. 끝이 없는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고, 바다친구들 잘 사귀고, 맛있는 정어리도 실컷 먹고!! 특히 맹추위조심하고, 바다표범이랑 고래를 조심히 피해다니거라!


상실을 경험하거나, 긴긴밤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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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독립 : 부엌의 탄생 띵 시리즈 15
김자혜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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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분에 끌려 이 책을 선택했더라?

인터넷 서점에서 소개와 인용문장을 보고 선택했던 것 같다. 일단 '식탁', '음식'이란 단어가 '요리주체'가 되는 내겐 자주 흥미로운 소재였고, 그것들을 다룬 글이 뭔가 내 구미를 당기게 한 모양이다.


의류학을 전공하고 패션 매거진의 패션 에디터로 일하다가, 밥을 스스로 지어 먹는 '식탁독립!'이란 걸 하게 된 건, 과거 4년간 지리산 근처에 집을 마련하였을 때였다.(이유는 없지만, 숙박업도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네ㅇ치킨이나 교ㅇ치킨을 사려면 읍내까지 16km(차로 25분)의 거리이고, 배달도 불가능하며, 동네 마트는 8-9시면 닫는, 편의점도 자정이면 문을 닫는 곳(작가님 표현에 의하면 전혀 콘베니언트하지 않은 콘베니언스 스토어라고 함)이었다. 그렇게 본격적인 저자만의 독립된 식탁이야기가 공개된다.


초보요리사의 좌충우돌 요리 경험에 섬세한 감정을 담겨있어 공감이 된다. 주변이야기와 기존 경험 갖가지를 떠올리며 펼쳐나가는 그녀만의 에세이가 실소를 터뜨리게도 하고 재미도 있었다.


삼시세끼는 왜 이리 빨리 돌아오는지를 말하는데, 다른 처지임에도 '바로 그거다! 맞다!'하며 박수쳤다.

나도 처음 요리할 때 이런 심정이었지라는 추억을 떠올렸다.

오! 초보라며 이분이? 내 도전의식도 고취되었다.(라구소스와 매생이 부분에서 그랬음)

우리 남편도 나보다 요리 잘하는데부터 남편과 미묘한 신경전도 소소하게 이해됐다.

스텐팬부터 밥솥까지 '요리에 깊숙히도 들어가셨네' 라는 생각이 든다.

요리, 살림에서 배울 것도 쏠쏠히 있다.(아주 많다는 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오이지, 콩국수)에도 침이 고이는 게 만드는 표현!!


이사스토리, 고등학교때 경단만들기, 엄마를 향한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 등 누구나 겪고, 느껴봤을 소소한 경험인데도 무릎을 탁치게 하는 센스넘치는 문장들과 현실을 통쾌하게 콕콕 집어내는 표현력까지 더해 표지만큼이나 상큼하고 즐거운 에세이였다.


매 에세이 챕터가 끝나면 '오늘 배운 것'이라는 마무리 짓는 '결론 메시지'도 색달라 좋더라!

띵시리즈 답게 소소하고 유쾌하면서 애정이 갈만한 에세이였다!^^




... 이 책은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세 끼니를 지어 먹게 된 사람의 분투기다. 조리대 앞에 서서 느꼈던 솔직한 마음을 썼다. 무력감과 외로움, 피로와 분노, 그리고 사랑과 자부심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 밥을 짓는 일이란 깊이 침전된 기억들을 휘젓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p.11


.... 나는 별 볼 일 없이 빈들빈들 살아보려 여기까지 왔는데, 끼니는 쉼 없이 찾아와 간섭한다. 그래서 이봐, 오늘 점심은 뭐 먹을 거야? 냉장고 비었던데, 저녁은 어쩌려고? 매일매일 나의 나태를 꾸짖는 끼니. 그 근면이 끔찍할 정도다. p.21


내가 먹고 싶다는 걸 죄다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두 번째 엄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요리하는 행위 자체를 즐거워해싿. 가장 신기한 건 검색이나 계량은 하지 않고 가끔씩 간을 보며 뚝딱뚝딱 요리한다는 것. 어느 날 "그 양념 비율은 어떻게 아는 거야? 외운 거야?" 물었더니 그가 답했다. "예전에 먹었던 맛을 생각하면서 하나씩 넣어보는 거야. 해보면 다 알게 돼." 어. 그래. 멋지다. 근데 좀 얄밉네? p.31


오늘 배운 것: 랩이고 물안경이고 다 소용없다. 파를 썰 때는 광광 우는 수밖에. p.39

... 제로 레벨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우선 사온 재료를 모두 적는다. 다른 종이에는 그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적는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이에는 다음번에 사야 할 것을 적는다. 세 개의 리스트는 끼니가 지날 때마다 수정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메모 1

냉장: 절단 닭고기, 국거리 소고기, 돼지고기 앞다리살과 ....양송이 버섯, 사과, 단감, ....

냉동:만두, 손질 고등어, 식빵, 어묵

실온: 참치캔, 홀토마토캔, 파스타면 ....

메모2

간장찜닭, 제육볶음,,,,,(메모 1재료로 할 수 있는 음식을 뜻하는 듯)

규칙 같은 건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적어둔다. 저 많은 메뉴를 내가 다 만들 수 있는지 고려하지 않고 일단 적는다. 우리 팀엔 구원투수 J가 있으니 만약의 경우 그를 등판시키면 된다. ...

두 개의 메모가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 메모 3이 채워진다. 다음번에 장 보러 가서 사야할 것들의 목록이다. ...

p.43-44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을 떄, 내가 처음 한 일은 글쓰기와 관련된 책을 읽는 거였다. 구매한 책이 스무 권쯤 되고, 빌려서 본 책도 그쯤 된다. 남들의 실패담과 성공담, 조언과 책망을 듣는 것마저 즐거웠다. 그만큼 커다란 열망이 었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필사였다. 너무 사랑해서 세 번 네 번 읽은 소설을 똑같이 타이핑했다. 필사한 파일을 따로 모아 읽고 또 읽고 다시 필사하고. 집착에 가까운 일이었다.

.... 이 시점에서 나는 글쓰기와 요리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책(만) 읽는 건 만고 쓸데없다는 사실. p.75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도, 안 멋진 말만 쓰더라도 책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글쓰기의 첫 원칙이다. 버티고 앉아 읽고 생각하다 보면 뭐라도 쓰게 된다. 써지지 않을 떈 써지지 않는다고 쓴다. 음식도 마찬가지. 되도록 자주 주방에 서서 이것저것 만들어봐야 자기 것을 갖게 된다. p.77

오늘 배운 것: 해감할 떈 물 1리터에 굵은 소금 한 숟가락을 넣어 녹인 뒤 두 시간 이상 두어야 한다. 숟가락을 함께 넣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p.82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중에서 p.106


사민 노스랏의 책 <소금, 지방, 산, 열>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내용은 "맛을 보고, 맛을 보고, 또 맛을 보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맛을 잘 보고 냄새를 잘 맡느냐에 따라 요리의 수준이 정해진다."고 했다. 감각을 훈련하고 감각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파스타 삶을 물을 맛보라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맛보기'와 '간보기'를 같은 표현으로 알고 있던 나는 그저 짜고 싱거운 정도만을 확인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 그녀는 "요리는 재즈 음악가의 귀처럼, 맛을 많이 접할 수록 감각은 더욱 섬세해지고, 다듬어지고, 즉흥적인 변화에도 능숙하게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라면서. p.126-127


끼니를 챙겨 먹는 일은 자라나는 동안 자신을 먹인 사람을 생각해보게 하는 일이다. 먹이는 자의 일상을 헤아려보는 일이다. 열심히 저녁을 만들어 한 상 차리고 마침내 식구들이 둘러 앉았을 때, 엄마는 왜 자주 입맛을 잃은 표정이었는지. 뾰로통한 사춘기 딸들과 무심한 남편에게 왜 자꾸만 짜냐고 안 짜냐고 맛있냐고 맛이 없냐고 물어보았는지. p.178


자혜야 간 좀 봐, 라는 말은 엄마의 세계로의 초대였을 텐데 나는 번번이 귀찮음을 표현했다. 콩나물 심부름을 시켰을 떄, 엄마는 왜 만날 나만 시켜? 미리 사다두지 않고서 귀찮게! 소리를 지르면서 발에 신을 꿰었던 일, 입맛이 없다며 우리 먹는 걸 지켜만 보는 엄마에게 한 번 더 권하지 않았던 일, 국이 시원하다 찌개가 맛있다 오늘 고기반찬이 최고다 그 한마디 할 줄 모르고 아 귀찮아 왜 자꾸 물어봐 뺵뺵거렸던 일. 그런 장면들이 저 멀리서 되돌아 달려와 내 가슴을 쾅쾅 친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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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한빛문고 6
박완서 글, 한병호 그림 / 다림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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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자전거 도둑

수남이는 16살로, 전기용품 도매상의 점원이다. 야무지고 꼼꼼하며 성실하고 부지런한 수남이는 주인 영감님의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주인 영감님이 늘 좋은 건 아니지만,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고 자랑스러워해주는 좋은 어르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런 수남이가 전기용품 배달을 다녀오다가 접촉사고가 생겼다. 자동차 주인은 자전거를 볼모로 5천원을 가져와야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수남이는 자물쇠가 잠긴 채로 자전거를 들고 돌아온다.


어리지만 순수하고 성실한 수남이가 처음엔 고아인 줄 알았다. 그런 수남이에게 가족이 있다.

어른들의 말에 마음이 좌지우지하면서도 작은 칭찬에도 기분 좋아지는 수남이다. 아빠가 도둑질만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라? 어르신은 자전거를 통째로 들고온 걸 잘했다고 한다. 도둑질이라는 게 주는 묘한 쾌감과 아버지의 당부 그리고 할아버지의 가당치 않은 칭찬 사이에서 수남은 고뇌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아직은 모든 일이 크게 부딪혀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사춘기청소년의 복잡다단한 마음이 잘 담겨있었다.


2.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여기서 나온 선생님처럼 인내와 지혜로 똘똘 뭉친 선생님이 내 아이의 선생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아이는 어떻게 계란 하나로 저리 깊은 생각을 할까?

'계란'하나만으로도 여러 시각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묘하고 신선했다.

도시 아이를 보며 열등감을 느낄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도시 아이들이 시골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들의 가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조곤조곤 말해주는 선생님의 말이 좋았다.

열등감만 집어먹으며, 남에겐 없고 내게 있는 건 볼 줄 모를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이야기겠다.


3. 시인의 꿈

'시'의 말을 모으기 위해 다니는 할아버지라니!

이렇게 낭만적인 할아버지가 있을까?

시에 대한 마음을 서로 공유하는 할아버지와 아이,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다.


4. 옥상의 민들레꽃

'아파트'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 그걸 우러러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어떻게 이렇게 예리하게 꿰뚫을 수 있을까?

어린 아이라고 무시하는 그 많은 어른들 가운데서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해서든 내보려는 아이,

누구보다도 제대로 된 답을 알고 있는 '나'란 아이.

왜 어른들은 '회장직'과 '아파트값'과 '모임명' 같은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웠고, 판단을 멈추게 했나? 아이만도 못한 어른이라서 참 부끄럽다.


5.할머니는 우리 편

학군과 환경을 따라 자꾸 이사를 하는 우리집이지만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할머니는 우리편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손자사랑이, 손자의 할머니 사랑이 흐뭇하다.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건 꾸짖음이 아니라 아이의 편의 시각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걸 텐데 자꾸 잊어버린다. 마지막 할머니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주장이 참 멋졌다.


6.마지막 임금님

성경에 나오는 '욥'이란 인물이 생각난다. 끝까지 살아남는 그 사나이와 처한 상황이 비슷한 인물이다.

자식을 잃고, 재물을 잃고, 피부병으로 온갖 고생을 다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정신승리하는 사나이는 인물 자체가 현실적이진 않지만, 그가 말하는 한마디한마디에서 우리의 삶 속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보여준다.


어쩌면 탈무드 같고, 어쩌면 깊이있는 동화명작을 보는 것 같은 단편집이다.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한국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기도 하다.


문장에서 시의 운율이 랩의 라임이 느껴진다. 이래서 박완서 작가님의 문장이 좋다.


바람이 여전하다. 저만큼서 흙먼지가 땅을 한꺼풀 벗겨 홑이불처럼 둘둘 말아오는 것같이 엄청난 기세로 몰려온다. p.31


사회 현실과 인물의 속내를 꿰뚫는 예리함과 섬세하게 찌르는 날카로움의 정도가 좋다.


그러니까 궁전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나 봅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모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p.104


문장이 이토록 마음을 울릴 수 있나?


"시가 있었으면 지금보다 살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지금보다는 살맛이 있었을거야."

"살맛이 뭔데요? 그것은 초콜릿 맛하고 닮은 건가요? 바나나 맛하고 닮은 건가요?"

"그건 몸으로 본 맛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보는 살맛하고는 비교를 할 수가 없지. 살맛이란, 나야말로 남과 바꿔치기할 수 없는 하나뿐인 나라는 것을 깨닫는 기쁨이고, 남들의 삶도 서로 바꿔치기할 수 없는 각기 제 나름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껴주고 사랑하는 기쁨이란다."

p.94


잊혀진 한국미가 느껴져서 좋다. 바람의 유익을 말해주는 단락이, 나무의 종류를 쭉 읊어 내어주는 문장이 참 좋았다!


시골의 바람부는 날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보리밭은 바람을 얼마나 우아하게 탈 줄 아는가, 큰 나무는 바람에 얼마나 안달맞제 들까부는가,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함께 사는 숲은 바람에 얼마나 우렁차고 비통하게 포효하는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이 골목에서 자기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수남을 고독하게 했다. p.23-24


"도시 아이들은 아마 토끼풀하고 괭이밥하고도 헛갈리는 애 천질걸. 한뫼야, 우리가 문명의 이기에 대해 모르는 건 무식한 거고, 도시 아이들이 밤나무와 떡갈나무와 참나무와 나도밤나무와 참피나무와 물푸레나무와 피나무와 가시나무와 은사시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전나무와 삼나무와 잣나무와 측백나무에 대해 모르는 건 유식하다는 생각일랑 제발 버려야 한다. 그건 똑같이 무식한 거니까, 너희가 특별히 주눅들 필요는 없지 않겠니."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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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컬링 (양장) - 2011 제5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최상희 지음 / 비룡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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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베이징 올림픽 경기들 중 '컬링'을 보며 평창 올림픽 때 '영미영미!!'하고 열광했던 그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컬링 경기를 봤다. 양궁의 과녁과도 같은 원 안에 손잡이가 있는 빨간색 혹은 노란색 스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해설을 해 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봐도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컬링'을 지식백과에서 찾았다. 거기서 인용된 글들에 구미가 당겨졌는데, 바로 이 책 '그냥, 컬링'의 내용이었다.


난 2018년 평창올림픽으로 처음 '컬링'을 알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또한 그랬을거다. 그런데 이 책은 2011년에 출판됐다. 무엇이 작가님을 '컬링'에 관심을 갖게 했을지, 어떻게 이런 '비인기 종목'(?, 지금은 인기종목이에요!! 적어도 제게는!!)을 콕 집어 이렇게 자신의 작품에 소재로 사용하게 되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물론 끝내는 알 수 없었다는 게 비극이지만 말이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컬링 경기가 멈추기 전까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설책임에도 '컬링에 대한 지식들이 틈틈히 들어있었고, 따로 컬링 규칙을 알아보니 이번 베이징 올림픽 속 컬링경기가 상당히 재밌어졌다. 빙판계 스포츠 선수들 등장과 함께 주인공인 차을하의 동생, 차연화가 '피겨스케이팅 꿈나무'라 이또한 (미비하지만) 베이징 올림픽 속 피겨 경기와 맞물려서 반가웠다. '그냥, 컬링'팀이 강원도에 가서 매일 감자캐고, 자고 밥먹고, 일하며 하체 근육을 키우는 장면은 강렬하고 뜨거운 여름방학의 모습이 상상됐다. 힘겨워도 추억이 될만한 이야기. 수박에, 물속에 풍덩까지!!

재치있는 문장과 비유, 표현만으로도 책장 넘기기 바쁜데, 컬링이야기에, 스토리 전개도 시원시원해 읽기 좋았다.


청소년들에게 가해지는 학교 내 체벌이 지금의 시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일 수 있겠다.

이 책이 나온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권력 앞에서 '약자'는 '약자'로 답이 되어버리는 서민들의 현실은 비슷해서 씁쓸하다.


누군가의 관심 밖인 비주류이면서, 아직은 성인이 안 된 미성년자들이 자신이 즐거워하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니, 난 중고등학교 시절에 뭘 했나를 떠오르기도 하고, 이렇게 노는 이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싶기도하고, 이 아이들의 미래는 한국 사회 속에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11년 전이라 참 오래된 책인 건 맞는데, '컬링'을 애초에 알아봐주시고 이렇게 멋진 소설을 만들어주신 작가님께 감사하다. 덕분에 재밌게 컬링을 알았고, 책 또한 재밌게 읽었다.^^


컬링 한번 보셨으면, 이 책에서 스톤(stone) 나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해설위원분들도 친절하게 말해주시긴 했지만, 글로 읽는 컬링 이것 또한 묘한 매력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으면 밥상의 그릇들이 컬링 스톤으로 생각!까지는 안 날지라도 '그런 상상 가능하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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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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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는 아니었지만, 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잘 키울 거라 생각했는데, 계획하고 예상한 대로 내 아이를 잘 키워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는 몇이나 될까?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던 그 아이였는데, 지금은 내 눈을 똑바로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다. 아이가 어릴 때, 이런 사이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여러 질문을 내게 던져내던 책! 바로 이 책 '다섯째 아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둘째 아이) 응급실과 아이를 수차례 잃어버린 일들을 겪느라 1년을 보낸 후, 어린이집에서 문제아로 찍힌 지 몇 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책인데도, 2020년대를 지나고 있는 엄마인 나에게도 관통하는 것이 있었다. '한 아이를 키워내는 일은 조금도 쉽지 않다'는 것. 그 사실을 소름끼치도록 극에 치닫게 알려주는데, 또 위로와 격려라는 묘한 감정도 주는 아이러니한 책이었다.


보수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있던 남녀(데이비드, 해리엇)가 서로를 알아보고 결혼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도시 런던이 아닌 변두리의 대저택을 구입한다. 그곳에서 많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꿈꿨다. 행복을 추구했고, 행복하기 위해 그들이 꾼 꿈을 따라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5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4명의 아이를 낳기까지 경제적인 문제나 육아의 버거움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했고, 그들과 더불어 매년 특별한 날(부활절, 크리스마스 등)을 보내며 그들의 꿈은 성취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섯째아이가 태어나고 달라졌다. 사람들은 떠났고, 가족 다른 구성원들은 공포에 떨었다. 아이는 시설에 보내어져서 이 책에서 사라지는 듯 했지만, 엄마인 해리엇을 통해 구출되고, 다시 한 가정의 중심부에 서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그 집을 떠난다. 다섯째 아이만 빼고. 다섯째아이, 벤 그의 어떤 면이 그 모든 것을 해체되도록 만든 걸까?


전통적이고 이상적인 가정이 '다섯째아이'라는 한 존재를 통해 파괴되어버렸다. 경제적인 흔들림 속에서 (데이비드 아빠 찬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극복했다. 계속 태어나는 네 아이를 육아해야 하는 상황도 가족(친정엄마찬스)의 도움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섯째아이란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하고, 괴기하며, 희망이 없어보이는 아이다. 더이상 부부는 그들의 꿈과 이상을 끌고 갈 수 없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놓인 각자의 인물들, 그들의 선택을 보며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혼을 한 부모님 중 누구를 따라갈까? 네 아이를 돌보는데 나는 누구의 도움을 받을까? 나는 런던(도시)를 따라 변두리(시골)에 갈 의향이 있을까? 여러 질문을 해보았는데, 무엇보다도 '다수(네 아이)를 위해 벤(다섯째아이)을 집밖으로 쫓아낼지, 소수(벤)을 품어내기 위해 그에게 집중할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데에 가장 관심이 갔다. 대부분의 부모 아니 특히 엄마라면 아픈 손가락을 먼저 붙들지 않을까 싶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고민이 된다. 내가 해리엇의 입장이라도 (몇년 전도 나도 그랬듯이), 그녀처럼 벤을 찾아 수용소에서 나오게 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까진 못해도) 책임지려했을 것 같다. 네 명의 아이도 내겐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많은 반면 벤을 사랑해줄만한 사람은 나(엄마) 외에는 아무도 없다. 회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만은 없는 사람이 바로 '엄마'니까, 그게 어쩌면 엄마로써의 본능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변두리에 집을 사고, 많은 자녀들을 거느리는 꿈을 꾸게 했던 건 무엇일까?

데이비드는 행복을 추구했다고 책에 나왔다. 그의 목표는 가정이었다. 아마 많은 자녀들과 풍족하게 살아가는 걸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루에 2시간이 소요되는 출퇴근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많은 자녀를 갖고 싶어했다. 해리엇 또한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왔고, '가정 생활'을 행복한 인생의 기본으로 여긴 해리엇의 부모의 영향을 받아 데이비드와 비슷한 꿈을 꾸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가정은 그들에게 기반이었고, 그게 곧 행복이지 않았을까?


행복을 위해 나는 무얼하고 있나?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행복을 위해 집을 사고, 아이를 낳는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꾸준해보였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꾸준하고 일관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을 위해 무얼 하고 있을지 나 자신에게 질문해봤다. 딱히 '행복'하기 위해 삶을 산다기 보다는 나이가 들다보니 '내게 편(안)한 것'을 많이 찾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독서취향찾기, 치고 싶을 때 피아노치기 등 취미)을 편하게 내키는 대로 하려 하고, 또 '관계'에 굳이 목매지 않으려고 마음을 내려놨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라고 되내이며 그동안 완벽하려고 애쓴, 끊임없이 이상적인 이들과 비교하며 나를 자책했던 모습을 내려놓기로 했다. 아마 이게 행복을 위해 하고 있다면 하고 있는 것들일 거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어내는 소리를 듣는 듯 소름돋게 하고, 더이상의 최악은 없다라고 말하는 듯 극단으로 몰아넣고, 계속 '너라면 어쩔껀데?'라는 질문을 쏟아내는 책이었다. 다시 꺼내 읽으며 (몇 년 전) 처음 읽던 때와 비슷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기도 하고, 또 내 아이도 크면 저런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암담한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애키우는 건 부모의 '노오력'이나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는데서 묘하게 공감했고, '내 아이가 다섯째아이만큼의 최악은 아니다'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했다.


경악하고 벼랑끝에 몰리는 느낌을 주는 책이라 또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질문하게 하고, 답이 없어 생각을 유도하는 책이 좋은 책이고, 이 책도 그런 책이라는 점에서 재독하길 잘했다며 읽었다. (물론 자발적이지 않고, 타의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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