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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ㅣ 한빛문고 6
박완서 글, 한병호 그림 / 다림 / 1999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자전거 도둑
수남이는 16살로, 전기용품 도매상의 점원이다. 야무지고 꼼꼼하며 성실하고 부지런한 수남이는 주인 영감님의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점원으로 일하고 있다. 물론 주인 영감님이 늘 좋은 건 아니지만, 자신을 높이 평가해주고 자랑스러워해주는 좋은 어르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런 수남이가 전기용품 배달을 다녀오다가 접촉사고가 생겼다. 자동차 주인은 자전거를 볼모로 5천원을 가져와야 돌려주겠다고 하지만, 수남이는 자물쇠가 잠긴 채로 자전거를 들고 돌아온다.
어리지만 순수하고 성실한 수남이가 처음엔 고아인 줄 알았다. 그런 수남이에게 가족이 있다.
어른들의 말에 마음이 좌지우지하면서도 작은 칭찬에도 기분 좋아지는 수남이다. 아빠가 도둑질만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라? 어르신은 자전거를 통째로 들고온 걸 잘했다고 한다. 도둑질이라는 게 주는 묘한 쾌감과 아버지의 당부 그리고 할아버지의 가당치 않은 칭찬 사이에서 수남은 고뇌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아직은 모든 일이 크게 부딪혀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사춘기청소년의 복잡다단한 마음이 잘 담겨있었다.
2.달걀은 달걀로 갚으렴
여기서 나온 선생님처럼 인내와 지혜로 똘똘 뭉친 선생님이 내 아이의 선생님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아이는 어떻게 계란 하나로 저리 깊은 생각을 할까?
'계란'하나만으로도 여러 시각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묘하고 신선했다.
도시 아이를 보며 열등감을 느낄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도시 아이들이 시골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들의 가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을 조곤조곤 말해주는 선생님의 말이 좋았다.
열등감만 집어먹으며, 남에겐 없고 내게 있는 건 볼 줄 모를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이야기겠다.
3. 시인의 꿈
'시'의 말을 모으기 위해 다니는 할아버지라니!
이렇게 낭만적인 할아버지가 있을까?
시에 대한 마음을 서로 공유하는 할아버지와 아이,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다.
4. 옥상의 민들레꽃
'아파트'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 그걸 우러러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어떻게 이렇게 예리하게 꿰뚫을 수 있을까?
어린 아이라고 무시하는 그 많은 어른들 가운데서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해서든 내보려는 아이,
누구보다도 제대로 된 답을 알고 있는 '나'란 아이.
왜 어른들은 '회장직'과 '아파트값'과 '모임명' 같은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걸까?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웠고, 판단을 멈추게 했나? 아이만도 못한 어른이라서 참 부끄럽다.
5.할머니는 우리 편
학군과 환경을 따라 자꾸 이사를 하는 우리집이지만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할머니는 우리편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손자사랑이, 손자의 할머니 사랑이 흐뭇하다.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건 꾸짖음이 아니라 아이의 편의 시각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걸 텐데 자꾸 잊어버린다. 마지막 할머니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주장이 참 멋졌다.
6.마지막 임금님
성경에 나오는 '욥'이란 인물이 생각난다. 끝까지 살아남는 그 사나이와 처한 상황이 비슷한 인물이다.
자식을 잃고, 재물을 잃고, 피부병으로 온갖 고생을 다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정신승리하는 사나이는 인물 자체가 현실적이진 않지만, 그가 말하는 한마디한마디에서 우리의 삶 속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보여준다.
어쩌면 탈무드 같고, 어쩌면 깊이있는 동화명작을 보는 것 같은 단편집이다.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한국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기도 하다.
문장에서 시의 운율이 랩의 라임이 느껴진다. 이래서 박완서 작가님의 문장이 좋다.
바람이 여전하다. 저만큼서 흙먼지가 땅을 한꺼풀 벗겨 홑이불처럼 둘둘 말아오는 것같이 엄청난 기세로 몰려온다. p.31
사회 현실과 인물의 속내를 꿰뚫는 예리함과 섬세하게 찌르는 날카로움의 정도가 좋다.
그러니까 궁전 아파트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나 봅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궁전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모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p.104
문장이 이토록 마음을 울릴 수 있나?
"시가 있었으면 지금보다 살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지금보다는 살맛이 있었을거야."
"살맛이 뭔데요? 그것은 초콜릿 맛하고 닮은 건가요? 바나나 맛하고 닮은 건가요?"
"그건 몸으로 본 맛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보는 살맛하고는 비교를 할 수가 없지. 살맛이란, 나야말로 남과 바꿔치기할 수 없는 하나뿐인 나라는 것을 깨닫는 기쁨이고, 남들의 삶도 서로 바꿔치기할 수 없는 각기 제 나름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껴주고 사랑하는 기쁨이란다."
p.94
잊혀진 한국미가 느껴져서 좋다. 바람의 유익을 말해주는 단락이, 나무의 종류를 쭉 읊어 내어주는 문장이 참 좋았다!
시골의 바람부는 날 풍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보리밭은 바람을 얼마나 우아하게 탈 줄 아는가, 큰 나무는 바람에 얼마나 안달맞제 들까부는가,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함께 사는 숲은 바람에 얼마나 우렁차고 비통하게 포효하는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이 골목에서 자기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수남을 고독하게 했다. p.23-24
"도시 아이들은 아마 토끼풀하고 괭이밥하고도 헛갈리는 애 천질걸. 한뫼야, 우리가 문명의 이기에 대해 모르는 건 무식한 거고, 도시 아이들이 밤나무와 떡갈나무와 참나무와 나도밤나무와 참피나무와 물푸레나무와 피나무와 가시나무와 은사시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전나무와 삼나무와 잣나무와 측백나무에 대해 모르는 건 유식하다는 생각일랑 제발 버려야 한다. 그건 똑같이 무식한 거니까, 너희가 특별히 주눅들 필요는 없지 않겠니."p.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