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은 자발적으로 고립되어 세 끼니를 지어 먹게 된 사람의 분투기다. 조리대 앞에 서서 느꼈던 솔직한 마음을 썼다. 무력감과 외로움, 피로와 분노, 그리고 사랑과 자부심이 뒤섞인 복잡한 마음. 밥을 짓는 일이란 깊이 침전된 기억들을 휘젓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p.11
.... 나는 별 볼 일 없이 빈들빈들 살아보려 여기까지 왔는데, 끼니는 쉼 없이 찾아와 간섭한다. 그래서 이봐, 오늘 점심은 뭐 먹을 거야? 냉장고 비었던데, 저녁은 어쩌려고? 매일매일 나의 나태를 꾸짖는 끼니. 그 근면이 끔찍할 정도다. p.21
내가 먹고 싶다는 걸 죄다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두 번째 엄마를 만난 기분이었다. 심지어 그는 요리하는 행위 자체를 즐거워해싿. 가장 신기한 건 검색이나 계량은 하지 않고 가끔씩 간을 보며 뚝딱뚝딱 요리한다는 것. 어느 날 "그 양념 비율은 어떻게 아는 거야? 외운 거야?" 물었더니 그가 답했다. "예전에 먹었던 맛을 생각하면서 하나씩 넣어보는 거야. 해보면 다 알게 돼." 어. 그래. 멋지다. 근데 좀 얄밉네? p.31
오늘 배운 것: 랩이고 물안경이고 다 소용없다. 파를 썰 때는 광광 우는 수밖에. p.39
... 제로 레벨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우선 사온 재료를 모두 적는다. 다른 종이에는 그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적는다. 그리고 또 다른 종이에는 다음번에 사야 할 것을 적는다. 세 개의 리스트는 끼니가 지날 때마다 수정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메모 1
냉장: 절단 닭고기, 국거리 소고기, 돼지고기 앞다리살과 ....양송이 버섯, 사과, 단감, ....
냉동:만두, 손질 고등어, 식빵, 어묵
실온: 참치캔, 홀토마토캔, 파스타면 ....
메모2
간장찜닭, 제육볶음,,,,,(메모 1재료로 할 수 있는 음식을 뜻하는 듯)
규칙 같은 건 없이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적어둔다. 저 많은 메뉴를 내가 다 만들 수 있는지 고려하지 않고 일단 적는다. 우리 팀엔 구원투수 J가 있으니 만약의 경우 그를 등판시키면 된다. ...
두 개의 메모가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면 메모 3이 채워진다. 다음번에 장 보러 가서 사야할 것들의 목록이다. ...
p.43-44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을 떄, 내가 처음 한 일은 글쓰기와 관련된 책을 읽는 거였다. 구매한 책이 스무 권쯤 되고, 빌려서 본 책도 그쯤 된다. 남들의 실패담과 성공담, 조언과 책망을 듣는 것마저 즐거웠다. 그만큼 커다란 열망이 었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필사였다. 너무 사랑해서 세 번 네 번 읽은 소설을 똑같이 타이핑했다. 필사한 파일을 따로 모아 읽고 또 읽고 다시 필사하고. 집착에 가까운 일이었다.
.... 이 시점에서 나는 글쓰기와 요리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책(만) 읽는 건 만고 쓸데없다는 사실. p.75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도, 안 멋진 말만 쓰더라도 책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글쓰기의 첫 원칙이다. 버티고 앉아 읽고 생각하다 보면 뭐라도 쓰게 된다. 써지지 않을 떈 써지지 않는다고 쓴다. 음식도 마찬가지. 되도록 자주 주방에 서서 이것저것 만들어봐야 자기 것을 갖게 된다. p.77
오늘 배운 것: 해감할 떈 물 1리터에 굵은 소금 한 숟가락을 넣어 녹인 뒤 두 시간 이상 두어야 한다. 숟가락을 함께 넣으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고 한다. p.82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중에서 p.106
사민 노스랏의 책 <소금, 지방, 산, 열>에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내용은 "맛을 보고, 맛을 보고, 또 맛을 보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맛을 잘 보고 냄새를 잘 맡느냐에 따라 요리의 수준이 정해진다."고 했다. 감각을 훈련하고 감각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파스타 삶을 물을 맛보라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었다. '맛보기'와 '간보기'를 같은 표현으로 알고 있던 나는 그저 짜고 싱거운 정도만을 확인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 그녀는 "요리는 재즈 음악가의 귀처럼, 맛을 많이 접할 수록 감각은 더욱 섬세해지고, 다듬어지고, 즉흥적인 변화에도 능숙하게 대처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라면서. p.126-127
끼니를 챙겨 먹는 일은 자라나는 동안 자신을 먹인 사람을 생각해보게 하는 일이다. 먹이는 자의 일상을 헤아려보는 일이다. 열심히 저녁을 만들어 한 상 차리고 마침내 식구들이 둘러 앉았을 때, 엄마는 왜 자주 입맛을 잃은 표정이었는지. 뾰로통한 사춘기 딸들과 무심한 남편에게 왜 자꾸만 짜냐고 안 짜냐고 맛있냐고 맛이 없냐고 물어보았는지. p.178
자혜야 간 좀 봐, 라는 말은 엄마의 세계로의 초대였을 텐데 나는 번번이 귀찮음을 표현했다. 콩나물 심부름을 시켰을 떄, 엄마는 왜 만날 나만 시켜? 미리 사다두지 않고서 귀찮게! 소리를 지르면서 발에 신을 꿰었던 일, 입맛이 없다며 우리 먹는 걸 지켜만 보는 엄마에게 한 번 더 권하지 않았던 일, 국이 시원하다 찌개가 맛있다 오늘 고기반찬이 최고다 그 한마디 할 줄 모르고 아 귀찮아 왜 자꾸 물어봐 뺵뺵거렸던 일. 그런 장면들이 저 멀리서 되돌아 달려와 내 가슴을 쾅쾅 친다. p.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