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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최고는 아니었지만, 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잘 키울 거라 생각했는데, 계획하고 예상한 대로 내 아이를 잘 키워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는 몇이나 될까?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던 그 아이였는데, 지금은 내 눈을 똑바로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모습으로 마주하고 있다. 아이가 어릴 때, 이런 사이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여러 질문을 내게 던져내던 책! 바로 이 책 '다섯째 아이'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둘째 아이) 응급실과 아이를 수차례 잃어버린 일들을 겪느라 1년을 보낸 후, 어린이집에서 문제아로 찍힌 지 몇 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책인데도, 2020년대를 지나고 있는 엄마인 나에게도 관통하는 것이 있었다. '한 아이를 키워내는 일은 조금도 쉽지 않다'는 것. 그 사실을 소름끼치도록 극에 치닫게 알려주는데, 또 위로와 격려라는 묘한 감정도 주는 아이러니한 책이었다.
보수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자신의 기준을 갖고 있던 남녀(데이비드, 해리엇)가 서로를 알아보고 결혼까지 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도시 런던이 아닌 변두리의 대저택을 구입한다. 그곳에서 많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꿈꿨다. 행복을 추구했고, 행복하기 위해 그들이 꾼 꿈을 따라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5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4명의 아이를 낳기까지 경제적인 문제나 육아의 버거움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했고, 그들과 더불어 매년 특별한 날(부활절, 크리스마스 등)을 보내며 그들의 꿈은 성취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섯째아이가 태어나고 달라졌다. 사람들은 떠났고, 가족 다른 구성원들은 공포에 떨었다. 아이는 시설에 보내어져서 이 책에서 사라지는 듯 했지만, 엄마인 해리엇을 통해 구출되고, 다시 한 가정의 중심부에 서게 된다. 그리고 모두가 그 집을 떠난다. 다섯째 아이만 빼고. 다섯째아이, 벤 그의 어떤 면이 그 모든 것을 해체되도록 만든 걸까?
전통적이고 이상적인 가정이 '다섯째아이'라는 한 존재를 통해 파괴되어버렸다. 경제적인 흔들림 속에서 (데이비드 아빠 찬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극복했다. 계속 태어나는 네 아이를 육아해야 하는 상황도 가족(친정엄마찬스)의 도움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다섯째아이란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하고, 괴기하며, 희망이 없어보이는 아이다. 더이상 부부는 그들의 꿈과 이상을 끌고 갈 수 없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 놓인 각자의 인물들, 그들의 선택을 보며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혼을 한 부모님 중 누구를 따라갈까? 네 아이를 돌보는데 나는 누구의 도움을 받을까? 나는 런던(도시)를 따라 변두리(시골)에 갈 의향이 있을까? 여러 질문을 해보았는데, 무엇보다도 '다수(네 아이)를 위해 벤(다섯째아이)을 집밖으로 쫓아낼지, 소수(벤)을 품어내기 위해 그에게 집중할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데에 가장 관심이 갔다. 대부분의 부모 아니 특히 엄마라면 아픈 손가락을 먼저 붙들지 않을까 싶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고민이 된다. 내가 해리엇의 입장이라도 (몇년 전도 나도 그랬듯이), 그녀처럼 벤을 찾아 수용소에서 나오게 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까진 못해도) 책임지려했을 것 같다. 네 명의 아이도 내겐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들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많은 반면 벤을 사랑해줄만한 사람은 나(엄마) 외에는 아무도 없다. 회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만은 없는 사람이 바로 '엄마'니까, 그게 어쩌면 엄마로써의 본능이 아닐까 싶다.
그들이 변두리에 집을 사고, 많은 자녀들을 거느리는 꿈을 꾸게 했던 건 무엇일까?
데이비드는 행복을 추구했다고 책에 나왔다. 그의 목표는 가정이었다. 아마 많은 자녀들과 풍족하게 살아가는 걸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루에 2시간이 소요되는 출퇴근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많은 자녀를 갖고 싶어했다. 해리엇 또한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왔고, '가정 생활'을 행복한 인생의 기본으로 여긴 해리엇의 부모의 영향을 받아 데이비드와 비슷한 꿈을 꾸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가정은 그들에게 기반이었고, 그게 곧 행복이지 않았을까?
행복을 위해 나는 무얼하고 있나?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행복을 위해 집을 사고, 아이를 낳는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꾸준해보였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꾸준하고 일관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을 위해 무얼 하고 있을지 나 자신에게 질문해봤다. 딱히 '행복'하기 위해 삶을 산다기 보다는 나이가 들다보니 '내게 편(안)한 것'을 많이 찾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하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것(독서취향찾기, 치고 싶을 때 피아노치기 등 취미)을 편하게 내키는 대로 하려 하고, 또 '관계'에 굳이 목매지 않으려고 마음을 내려놨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라고 되내이며 그동안 완벽하려고 애쓴, 끊임없이 이상적인 이들과 비교하며 나를 자책했던 모습을 내려놓기로 했다. 아마 이게 행복을 위해 하고 있다면 하고 있는 것들일 거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어내는 소리를 듣는 듯 소름돋게 하고, 더이상의 최악은 없다라고 말하는 듯 극단으로 몰아넣고, 계속 '너라면 어쩔껀데?'라는 질문을 쏟아내는 책이었다. 다시 꺼내 읽으며 (몇 년 전) 처음 읽던 때와 비슷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기도 하고, 또 내 아이도 크면 저런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암담한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애키우는 건 부모의 '노오력'이나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는데서 묘하게 공감했고, '내 아이가 다섯째아이만큼의 최악은 아니다'라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했다.
경악하고 벼랑끝에 몰리는 느낌을 주는 책이라 또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질문하게 하고, 답이 없어 생각을 유도하는 책이 좋은 책이고, 이 책도 그런 책이라는 점에서 재독하길 잘했다며 읽었다. (물론 자발적이지 않고, 타의적(?)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