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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발매일을 보니 생각보다 꽤 오래된 책이다.
여행서는 현실에서 내가 갈 수 없는 상황을 뛰어넘어 작가의 눈과 내 상상력을 동원한 여행을 할 수 있게끔 한다.
그게 여행책의 큰 매력이다.
그런데다가 좋은 작가의 곱디고운(?) 혹은 매력있는 필력으로 적은 여행서라면 그 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몇 작가에게 꽂혀서 될 수 있으면 모아 읽으려고 하는 찰나에
그리고 한 해를 반을 넘기고 달려온 이 시점에서 한번 쯤 쉬어가고픈 때가 온 이 시점에
발견하게 된
맛깔나는 필력을 소유한 작가의 여행서이다.
대여해 온 다른 책들을 쭉 반납일에 맞춰 나열해두었지만
유독 눈이 가고 빨리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손에 들어오길 기다린 이 책!
나는 시칠리아에 대해 잘 모른다.
얼핏 들은 듯 하지만 아프리칸가? 지중해 어딘가?? 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 책에서 그 위치와 매력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관광지로 서로 사진찍기 바쁘거나 한정된 스케줄에 맞추어 한번쯤은 찍고 가야할 곳이 아니라
잘 알려지진 않았어도 은은한 매력이 있는 곳, 그 안에 삶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난 유명한 그 어느 곳보다도 더 의미가 있는 곳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더 좋았다.
작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하다.
본인도 그런 자신의 소유를 인정한다.
가진 것으로, 명예로움으로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할 삶이었지만,
정작 그 이후 자신에게 밀려오는 고독과 허함이 그에게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본인이 가고 싶었던 시칠리아를 방송을 위하여 가게 되고
이후에 다시 아내와 찾아간다.
그러면서 그 안에 있던 추억과 기쁨과 열정들을 하나하나 여행에서 끄집어낸다.
이 책은 그렇게 여행하듯 그의 생각을 통해 우리의 지친 감성들과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무엇을 끄집어내기 위해 의식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작가와 함께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것 같은 편안함과 여유를 갖고 책을 읽어내려갔다.
하지만 그 와중에 겪게 되는 이태리의 열차사정은 정말 어이없고 황당함의 연속이다.
우리나라같으면 상상도 못할 연착과 취소가 연이어 발생한다.
그러한 황당한 일들이 한국에서 있어도 기가막힐 상황이지만, 그 안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그 안에서 다른 케이스들을 통해 기어코 목적지를 가게 되는 그런 게 여행의 모험이고 추억이겠다.(물론 내가 당하면.... ㅠㅠ)
그런 것들을 직접 당해서 괴로움을 직접 맛보지 않고
책으로 유연하게 '그럴 수 있지'라고 받아들이며
여행정보를 얻는 건 어찌보면 그냥 얻어먹는 것 같지만,
그것을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하지 않은 들 그 여행의 진미는 당사자만하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위해 고생하고 수고한 작가에게는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여행에서 직접 누리는 여행자를 볼 때 결론은 부러워진다.
이 책에서 작가가 나누어주는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칠리아가 그러한 신화의 근거지였어? 그런 전설이 여기서 비롯된거라고?
라고 놀라움과 함께
지금까지 건설되어지고 유지되어온 시칠리아의 이야기는 그의 책을 통해 다시끔 되짚어진다.
또한 그러한 이야기에서 다져진 듯한 시칠리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인간적인 모습들과 또 다른 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다름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이 책은 설명하는 것을 사진에서 충분히 보충해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많은 부분 사진에서 받쳐주지 않아서 아쉽기도 했지만,
그만큼 이 섬에 대해 상상력을 펼치며 궁금증을 자아내서 여행하고 싶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아!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게 있다면
작가의 여행순서를 따르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하지 않더라도 그와 함께 지도가 있었더라면 좋았겠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내내 나같은 무지한 이는 핸드폰으로 지명을 찾아내느라 결국 책에서의 집중도가 흐트러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이둘을 키우면서 극한 체력소모로 여행은 더이상 내게 꿈이 되지 않았다.
호기심도, 의욕도, 간절함도 사라져 현실을 절절거리며 살아가는 내게 여행은 그냥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이고 악세서리같았다.
그리고 현재 이미 지쳐있는데 여행으로 인한 고생을 굳이 사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작가와 아내가 책 마지막 부분에서 주고받는 이야기처럼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나도 너무 힘든 사람이지만,
삶이란 별거없더라 하는 그들의 여유있는 대화에서
나도 여행에서 그런 여유를 충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언가 생겨난 열매를 맺어보고 따먹어 보고 싶은 기대가 살짝 생겼다.
팍팍해지고 여유없는 일상에서 여행을 통해 좀더 나은 유연함을 발견하고 싶고,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이 여행에서 들었다.
나와 같지 않은 다른 세계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환상과 기대도 살짝 감돌며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십대의 나는, 자연이 만든 것보다 인간이 만든 것에 더 끌린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들고 다녔다. 나는 미술관들을 돌아다녔고 인간이 그린 그림과 인간이 지은 책과 음악, 건축물에 매료되곤 했다. 자연? 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아요.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요. 나보다 연배가 대여섯은 위인 한 시인이 나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봐, 그런말 너무 부도덕하잖아." 무슨 소린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에 취해 떠드는 헛소리인가? 그런데도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뇌리에 남았다. 인간이 만든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더 부도덕하단 말인가? 그것은 태도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가 아닌가?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인은 아마도 내가 오만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에 대해 품어야 할 마땅한 경외를 결여한 것, 그것에 대해 취해야 할 마땅한 예의를 생략한 것, 인간이 만든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욥의 오만함에 대해 화를 내는 구약의 야훼 같은 태도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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