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순찰대 고딱지 1 : 도형과 연산 - 수학으로 우주를 구하라! 우주순찰대 고딱지 1
고호관 지음, 최진규 그림, 염지현 콘텐츠 / 리틀포레스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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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동화에서 인기 동화라고 봤는데, 아이가 이 책 보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려가네요. 인기를 실감하겠어요. 수학도 수학이지만, 아이가 책에 빠져 재밌게 읽는 것도 대만족인 책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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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4 - 박경리 대하소설, 1부 4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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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김훈장은 아내와 아들들을 진즉에 잃고, 자신의 제사를 차려주고 대를 이어줄 후자를 찾으러 다녔었다. 드디어 양자를 구하는데 성공하고 그를 집안에 들인다. 그의 이름은 한경. 뜸하던 용이는 월선에게 다시 마음을 붙이고, 두만이(김이평아들)는 윤보와 함께 목수 일을 배우러 서울로 간다. 병수(조준구 아들)은 서희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 보기와 달리 생각과 마음이 깊어, 서희에 대한 자신의 마음에도 절대 서희랑 결혼하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삼수는 조준구에게 (조준구가 실컷 즐기다 내어준) 삼월이를 아내로 받은 게 억울하고 아쉬워서 빨래하러 나오는 두리를 노려 그를 강간한다. 시기는 조선이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겨서 실상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때다. 이를 들은 김훈장은 조준구에게도 가서 군자금 도움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고 김훈장은 유생 몇 과 함께 마을을 떠난다. 서희 모는 죽고, 환이는 이곳저곳을 돌다 큰 아버지가 연곡사로 간다. 김서방네는 조준구의 부인 홍 씨 앞에서 입을 잘 못 놀린 탓에 집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김훈장은 결국 평사리로 돌아왔다. 윤보도 (두만이는 서울에 두고) 평사리로 돌아왔는데, 이를 안 삼수가 자신이 겪게 된 조준구로부터의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낸다. 그리고 조준구를 잡아 망하게 하자고 윤보에게 제안한다. 그렇게 다들 날을 잡아 밤에 조준구를 잡으러 갔지만, 그는 집안에 숨어 찾지 못했고, 삼수만이 조준구의 숨은 걸 알아서 협박 겸 그를 살려둔다. 그러나 조준구가 삼수의 협박보다 앞서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삼수를 고발한다. 초반부터 맘에 안 들었던 한조까지 이 일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해 일본군의 손에 죽게 한다. 이로 조준구 가족을 쫓아내지 못한 서희는 용이와 길상의 비밀 계획에 따라 용이네 가족, 봉순이, 월선네 등과 함께 최 참판 댁에서 탈출해 간도로 가려는 데에 동참한다.





후사를 구하려고 다수의 세월을 보내고도, 손자를 보고자 하는 김훈장의 열망에 더해 그것도 삼 형제를 바라는 모습에서 유교사상이 깊이 뿌리박힌 양반네 고집이 보인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렇게 양자 한경은 진짜 아버지를 섬기듯 김훈장을 대하는지. 유교사상의 그것을 체면만 차리는 데만 급급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동학은 반란이고, 자신들이 일으키는 유생들을 모아 뜻을 알리는 건 '의'라고 주장하는 김훈장의 모순된 모습도 우습고, 시대상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자신의 바랄대로 시대를 해석하는 것도 이 책에서 당시 양반들의 모습을 비틀어 보인 것 같아 씁쓸했다.


그 당시는 종으로 여자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운명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 권에서 또한 여성의 위상은 비참하게 다가온다. 삼수에게 조준구에게 그저 당하는 게 전부였던 삼월이와 두리는 같은 여자로 너무 안타깝다. 삼월은 조준구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다 삼수에게 버려지고, 그런 삼수와 조준구의 처 홍 씨 부인에게 구타를 당하며 살아간다. 마지막에 자기가 낳은 아이까지 죽는데, 이는 삼월의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진 셈이다. 그저 '죽지 못해 산다'라는 말은 삼월이의 생 대부분을 설명하는 것 같다. 또한, 두리도 두 번 중 한번 자기 혼자 물길어 나왔다가 자신을 노리던 삼수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는데, 그 장면에선 내가 삼수에게 당한 듯 소름이 돋았다. 딸이 그렇게 당하고 쓰러지는 듯 집으로 온 것을 심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바라볼 볼 수밖에 없는 부모, 혹여나 딸이 시집 못 갈까 봐 삼수에게 따지지도 못하는 억울함, 그 억울함을 왜 말로 못 하냐며 삼수가 두리네 앞에서 비아냥 거리는 장면은 정말 가슴을 절로 치게 했다. 당시에 태어나지 않은 걸 그나마 감사하게 되는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할까? 세계의 흐름을 따라 승기를 잡고만 일본에 어떻다 대응 한번 못하고 당하게 된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등, 이 상황들은 삼월이나 두리 그리고 평사리 사람들이 당한 일들을 오버랩 되어 같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이들과 반대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서희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넘보거나 괄시하지 못하게 자신의 할 바를 꼿꼿하게 하며 주변에 무관심한 듯 보인다. 슬픔도, 기쁨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하인과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긋는다.

그렇게 잠자코 있었지만, 그녀 나름의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묵인했고 참고 버텨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그 분노와 억울함을 삭히지 못한 채 질러대기도 했다. 당당했고 자신의 속내를 쏟아내려면 시원하게 뱉어내고야 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 씨 부인도 조준구도 함부로 서희를 쫓아내지 못했다. 어린 서희를 종들 또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모든 이유를 불문하고 평사리 사람들은 그저 당하기만 하는데 그 억울함을 함께 고스란히 느껴야 했던 독자에게 서희의 대사가 사이다와 같다.

하나도 잊지 마라! 다 하나씩 기억하고, 곱씹어 갚아줘라! 서희 하고픈 대로 다해!!!


"정말 그렇다면 나는 귀신하고 싸울 테야! 신령님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골백번 그래 봐야 아무도 살려주진 않던걸. 구구하고 치사스러워."

놀라며 봉순이 쳐다본다.

"모조리, 다아 잡아가라지. 하지만 나는 안 될 걸. 우리 집은 망하지 않아. 여긴 최씨, 최참판댁이야! 홍가 것도 조가 것도 아냐! 아니란 말이야! 만의 일이라도 그리 된다면 봉순아? 땅이든 집이든 다 물속에 쳐넣어버릴 테야. 알겠니?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내 원한으로 불살라서 죽여버릴 테야.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찢어 죽이고 말리어 죽일 테야. 내가 받은 수모를 하난들 잊을 줄 아느냐?" p.168-169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조준구에게 빼앗겨 당할 수 밖에 없던 서희에게도 할머니 윤씨 부인이 남긴 것이 있었다. 남들은 눈여겨 보지 않은 것, 남들은 그저 거기에 있겠거니 하는 것...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할머니와 서희의 연결고리는 남아있었다. 그가 간도로 가서 떳떳하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을 세울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이 된다.


작가가 읽어내는 각 사람의 마음은 깊이가 있다. 김훈장의 속내, 용이의 속내, 길상의 마음 그리고 삼수의 속 깊은데서 단단히 박혀있는 악의 씨앗까지도 훑어낸다. 특히 삼수의 '악'을 다루는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포악한 악이 헤어나올 수 없는 그 우둔함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정말 이분! 뭘 아시는 분이다!


...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찰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약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잇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p.405


이제 다음은 평사리가 아닌 간도에서의 이야기가 나올터라 다른 분위기가 기대(?)된다.

서희와 주변인물들이 일제치하라는 시대적인 상황에도 어떻게 자신들의 위기의 인생을 견디고 버텨나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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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5
에밀리 브론테 지음, 이신 옮김 / 앤의서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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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소설, 처음 읽었는데 우와! 강렬하네요! 책표지도 예쁘고 소장하고 싶은 앤의 서재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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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5
에밀리 브론테 지음, 이신 옮김 / 앤의서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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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폭풍의언덕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 <테스>, <폭풍의 언덕> ...

중고등학교 시절 책을 읽는다는 친구들은 이런 책들을 읽고 있었어요. 그 당시엔 책의 두께에, 작은 글씨까지 저는 선뜻 시도하지 못한 책들이었는데요. 한참 후가 된 지금에서야 이런 책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아무리 그래도 예스러운 말투와 시대, 배경에서 선뜻 집어지지는 않긴 하죠. 그래도 '이런 고전들을 이제는 좀 읽어봐야겠다' 시도하게 되는 건, 고전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추어 번역과 표지로 독자들을 유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앤의 서재'에서 나온 이 책 <폭풍의 언덕> 또한 고풍스러운 배경색에 세련된 핑크색이 조화를 이루는 책 표지가 눈길을 끄는데요. 500여 페이지나 되는 줄은 생각하지도 않고 충동적으로 제가 이 책에 달려들게 된 이유기도 합니다.


'1801년. 방금 집주인 댁에 다녀왔다.'

이 책의 첫 문장입니다. 에밀 브론테가 태어나기도 20여 년 정도 전이되겠네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인 그 해의 이야기를 써 낸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어디에서 저 시기의 배경을 알 수 있었을까요?


줄거리


록우드는 히스클리프의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를 빌려 살기로 합니다.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에 살고 있는데요, 록우드는 인사차 그 집을 방문합니다. 집안 분위기가 뭔가 이상합니다. 손님인 록우드에게 쌀쌀맞고 예의 없으며, 손님에 대한 배려조차 이들은 모르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히스클리프, 그의 며느리 캐서린, 헤어턴, 조지프, 질라가 그렇습니다. 그 집안의 상황을 궁금해하며 알고 있을만한 사람을 찾던 차에 록우드는 자기가 머무는 집에서 딘 부인을 찾아냅니다. 몇 차례의 딘 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워더링 하이츠'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을 듣게 되죠.

(딘 부인, 넬리가 일하는 집의) 주인 언쇼는 리버풀로 갔다가 한 집시 소년을 데려오며 폭풍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그저 그가 갈 곳 없어 불쌍해 보인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히스클리프예요. 히스클리프가 들어온 이후, 이 집의 장남인 힌들리는 아버지로부터 신뢰를 잃어요. 반대로 히스클리프는 신뢰와 보호를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힌들리는 억울해 하고 히스클리프한테도 당하죠. 그 와중에 히스클리프와 힌들리의 여동생 캐서린 언쇼는 굉장히 친밀한 사이가 되어갑니다. 아버지 언쇼와 어머니가 죽고, 집의 주인이 된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이때다 싶어 종처럼 부립니다. 그동안 아들로서 자신의 사랑을 앗아갔다고 보는 히스클리프에게 못되게 굴죠. 캐서린도 히스클리프와 친하긴 하지만, 자신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에드거 린턴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에드거의 프러포즈를 수락한 캐서린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조건을 선택해서 결혼하는 데에 혼란을 느끼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넬리(딘 부인)에게 토로해요. 그 대화를 히스클리프가 듣고 집을 나갑니다.

힌들리는 결혼을 했지만, 사랑하는 부인이 아기(헤어턴)을 낳고 죽었어요. 캐서린은 에드거와 결혼해서 시누이 이사벨라와 함께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히스클리프가 돌아오며 다시 폭풍의 전조가 보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는지 몰라도, 히스클리프는 돈을 벌어 자신의 복수의 대상인 힌들리 언쇼의 집으로 세를 살겠다며 들어가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린턴에게 돌아와 자신의 모습을 보입니다. 가출해서 소식을 알 수 없던 히스클리프가 돌아오자, 병에 걸려 아팠던 캐서린은 활기를 찾게 돼요. 하지만, 둘의 만남, 그게 너무 과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주 캐서린을 찾아오려 했고, 그게 캐서린의 남편인 린턴은 맘에 들지 않았죠. 그리고 그 상황에서 린턴의 여동생인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를 짝사랑하고요.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는 아내가 죽고 망상과 알코올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재산을 탕진해갑니다.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와 결혼하지만, 그건 캐서린의 남편 에드거 린턴을 도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캐서린이 오랜 병과 함께 정신병으로 아기(딸 이름도 캐서린)을 낳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녀의 오빠 또한 머지않아 세상을 떠납니다.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됩니다. 이사벨라는 그(히스클리프)로부터 도망쳐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죽습니다. 결국 그 아이를 히스클리프가 키우게 됩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아들과 에드거 린턴의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계략과 협박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데요. 그들은 결혼할 수 있을까요? 히스클리프의 잔행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


제가 생각하는 <폭풍의 언덕>이란 책은요, 그 책의 가장 정점은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정말 <폭풍의 언덕>을 하나도 몰랐으며 대단한 착각을 했던 거지요. 제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리다면 어릴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사랑은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어요.


"너랑 에드거가 내 심장을 찢어놓았어, 히스클리프! 그래놓고 둘 다 되레 불쌍한 건 자기들이라는 듯 나한테 와서 한탄을 하네? 천만에, 난 네가 불쌍하지 않아. 넌 날 죽였어. 나를 죽여 네가 살았나 보지. 네 목숨은 참 질겨! 내가 죽고 나서 얼마나 더 사시려고?"

그녀를 안으려고 한쪽 무릎을 꿇었던 히스클리프가 일어서려 하자 아씨는 그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억지로 앉혔어요. ...

"이렇게 널 잡아두고 싶어! 우리 둘 다 죽는 그날까지 이렇게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네가 얼마나 괴롭든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네 고통 따위 내가 알 바 아니지. 왜 너는 괴로우면 안 돼? 난 괴로운데! 너는 날 잊을 셈이구나? 내가 땅에 묻히면 넌 행복할까?...."

...

"그만해! 나까지 너처럼 미쳐야겠어?" p.276-277


주고받는 말은 또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한지요.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너는 몰라주지? 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걸? 내가 이러는 건 순전히 너 때문이야!' 이게 그들의 사랑의 주된 표현이었어요. 물론 평생 서로를 못 잊고, 각자에겐 세상에 오직 유일한 사랑이기도 했다는 점만은 감동적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들이 만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과연 결실을 이룰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열정적이며 한결 같긴 했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잔혹하고 끔찍했어요. 마치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같았죠.



사랑에 미친 광기의 아이콘,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리고 폭력적인 모습에 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마치 요즘 말하는 죄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1800년대 판 '소시오패스'를 보는 듯했죠. 로맨스 소설로만 알았는데, 이 책은 '히스클리프'란 인물 하나 때문에 공포 스릴러를 보는 듯했어요. 히스클리프가 사람을 폭행하고, 억압하며, 감금하는데 제가 마치 당하는 것인 것처럼 두렵고 끔찍했어요. 물론 그를 상대하는 이들 또한 괴기스럽고, 상식을 벗어난 듯한 행동과 말들이 많이 보이긴 했는데요. 그들은 히스클리프처럼 '악'에 집요하거나 집착하진 않았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지켜나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와는 분명 다른 점이예요. 네! 유독 '악'을 향해 앞서 나가는 인물이 바로 '히스클리프'였어요. 사랑받지 못한 상처와 짐승처럼 취급받으며 당한 멸시가 한 사람의 분노를 어디까지 치닫게 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신랄하고 다듬어지지 않았을까?


위에서 말했듯이 (말과 행동에서) 히스클리프만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몇 인물(딘 부인, 에드거 린턴, 캐서린 린턴(딸)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자신에게 주어진 충격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듯 보였어요. 물론 '정신병'도 큰 이유에 속하죠. 그들의 말과 행동에선 어떠한 필터도 없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보였어요. 인간의 내면과 욕망,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유로 인물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거침없이 말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사회화' 교육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기도 했어요. 예의와 매너를 배우는 사회에서는 교육된 말과 행동으로 인간의 속내가 많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와 '워더링 하이츠'라는 그 좁은 사회에서 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교육이 제공되었을까요? 그들만의 사회에서 '예의'와 '배려'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가왔을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좁은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거침없이 발설한 건 아닐까요? (작가의 의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저 혼자 생각해 본 것이니 이런 견해도 있구나 하고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초라한 결말이야, 그렇지? 내 맹렬한 분투가 참으로 우습게 끝나버렸어! 두 집안을 박살 낼 쇠지레와 곡괭이를 구하고 헤라클레스 같은 능력을 갖고자 나 자신을 단련하는데, 막상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힘이 생겼을 때는 어느 집이고 간에 지붕의 돌판 하나 들어낼 의욕조차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 거야! 난 옛 원수들에게 지지 않았어. ... 지금이야말로 그 후손들에게 직접 복수하기 알맞은 때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무엇도 날 막을 수 없고. 한데 다 무슨 소용이지? 난 관심도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아! 이러니까 마치 내가 관용이라는 멋진 자질을 과시하려고 이제껏 그리 용을 쓴 것처럼 들리는군. 그건 절대 아니고..... 이제는 그들을 무너뜨리는 게 통쾌한지도 모르겠고, 쓸데없이 누굴 무너뜨리려 하기엔 내가 너무 게을러. ... " p.558


복수의 끝을 치닫고 있는데 히스클리프는 어느 순간 멈춰버립니다. 앞뒤 없이 휘두르던 칼날이 이렇게 멈추는 걸까요? 복수가 우리에게 남기는 결말은 무엇일까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어떻게 넘겼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잘 읽었습니다. 히스클리프 집에 살던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된 건가 하나도 알 수 없었는데, 딘 부인을 통해 하나하나 타래가 풀리는 듯 이해가 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이리도 복잡한 몇 가정 속 서사의 폭풍에 제가 다 휘말려있다가 빠져나온 느낌이에요. 다 읽고 나니, 폭풍이 휘몰아치는 날씨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던 '워더링 하이츠'가 한 고비를 넘기고 굳건하게 서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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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9-08 0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광기와 폭력이 난무하는...그럼에도 완전 멋진 소설이죠! 에밀리 브론테... 어쩜 이런 글을 쓸수 있었을까요. 저도 완전 애정하는 작품입니다.
소장욕구 뿜뿜이네요^^

렛잇고 2023-09-08 18:41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좋아하시는 작품인가봐요!!! 그러게요. 광기와 폭력 그럼에도 정말 멋지고 강렬한 느낌이 아직 남아있어요. 여리여리해 보이는 에밀리 브론테의 초상화와 너무 달라요. ㅎㅎㅎ 네 책이 예뻐서 시리즈로 수집욕구가 들죠.^^
 
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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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소리 없이 닥치는 고통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아픔과 충격을 난 가능한 한 덜 받고 싶어 몸을 추슬렀다. 그러려면 고통을 이해해야 했다. 내게 고통의 의미를 알게 해주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극복할 수 있게 도운 건 종교였다. 고통을 두 손 벌려 환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내겐 없을 리가 없는 고통을 받아들이기 조금 더 쉬웠고 견딜 수 있었다. 한순간 평안이 오더라도 언젠가 닥칠 고통을 순간순간 대비하고 싶어 기회만 된다면 '고통'을 이렇게 수시로 접하려고 한다. '고통'을 바라보고 '고통'을 조금 더 이해하면 '고통'에 조금 익숙할 수 있을진 않을까?


이 책은 2022년 부커 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최종 후보로 오른 작품 <저주 토끼>를 쓴 '정보라'작가의 4년 만에 낸 장편 신작이다. 초등학교 때 공포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저주 토끼> 단편만 읽었었다. 그다음 작품에서는 속이 거북해져서 이후 작품까지는 이어 읽지 못했다. <저주 토끼>에서의 단단한 문장, 거침없는 진행, 그리고 묵직한 내용만큼은 인상적이었다. 그때 받은 '정보라'작가의 작품 스타일을 기억하며, '고통'의 의미를 헤아려보고 싶었다.


간단한 줄거리


한 남자가 드론을 띄워 보내 제약회사를 폭발시켰다. 제약회사의 폭발로 그(태)는 범죄자가 되어 평생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태'는 교단의 지시를 따라 회사 건물 폭발을 주도했지만, 그는 범죄 이후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범죄를 시작으로 탈세, 테러까지 온갖 혐의로 교단도 해체됐다. 그의 앞에 자신을 수사하던 형사들이 12년 만에 나타났다. 두 명의 남녀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남녀에게서 제약회사의 약물이 검출되어 '경'에게도 형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형사들과 의사, 그리고 태, 현, 경 은 회사에서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폐쇄된 제약회사 실험실로 간다. 이 사건,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 고통... 무슨 관계가 될까? 그리고 고통은... 고통은 무엇인가?


특이한 인물 이름, 구성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른 작품과 달린 외자다. '륜'(綸), 순(盾),,, 한자의 뜻에 걸맞게 인물의 성품이나 특징이 드러난다. 외자가 주는 강렬함과 멋스러움에 지면에 효율적이기까지 해서 새로운 시도라고도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한자의 뜻이 떠올라 어떤 사람일지 파악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걸 꺼려 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작품 속 대사에서도 살짝 엿보인다), 이름에서 성별의 판단이 쉽지 않고, 2자 혹은 3자의 인물명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이라면 이런 외자 이름이 살짝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들은 왜 고통을 다루고 있나?


사람이 가장 연약해질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 어떤 외부의 강한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할 때, 그것이 개인에게 주어질 때일 것이다. '고통'이란 게 인간에게 가해질 때, 사람은 가장 연약해지게 되지 않을까? 인간이 연약해지면 의지할 곳을 찾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에는 '약'이 해결책이고, 감정 정서에 가해지는 고통을 겪은 이라면 '종교'가 의지가 될 것이다. 고통의 통로를 지나기 위해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제약회사는 부작용을 최대한 줄인 진통제를 개발하고, 단계별로 교인들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교단에선 고통을 극복하라고 하며,'구원'이란 희망을 제시한다. 왜 이들(제약회사, 교단)은 고통을 다루고 있을까? 왜 이리 사람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들이 발 벗고 나섰는가?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제약회사나 교단이나 이득이 있다. 인간에게 고통이 있어야 그들에게 사람이 몰려온다. 그리고 돈이 들어온다.


설마 했던 이 책에!!! 그의 존재의 의미는?


중간중간 외계인과 일루미나티(계몽주의가 대두되던 1776년 프로이센에서 조직된 비밀 결사 조직으로, 신 중심의 중세 질서에 반대하고 가톨릭 체제의 불평등에 저항했다. 이후 정부와 교황의 탄압으로 해산됐으나 현대에 와서 세계 정치와 경제 등을 조종하고 있다는 음모론에 등장한다.[네이버 지식백과])란 단어가 등장해서 난 의아했다. 이는 교단에서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나 이 책에서도 나온다!!! 그 존재가!!!

우리가 의지하는 정보나 지식은 인간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계획한 것들이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고 예측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다. 과연 이 관점이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데 도움이 될까? 인간을 바라볼 때, 객관적이려면 인간이 아닌 존재가 그들을 관찰해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 이가 필요하다. 신본주의 시대가 아닌 인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은 이미 그 신뢰를 잃었다. 아마 그 잃은 신뢰를 말하기 위해 이 작품에 '종교'인 교단도 끌여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신'보다는 '외계인'이 더 나았을 거다. 하지만, 외계인도 아는 걸 우리는 모르고, 그러기에 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이고 있다. '신'과 같이 '외계인'이 그들을 징계했다.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

- 사람들이 스스로 원했기 때문에 나에게 찾아와 구원을 바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나는 실험을 계속했을 뿐입니다. p.284


-나는 그들이 교단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빼앗아 자신들의 권력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상당히 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감옥에서 나와서 똑같은 짓을 또다시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모아서 자신들이 그 사람들의 고통 위에 서려 했습니다. p.287


역시나 다뤄지는 소수자

최근 작품들에서 단 하나라도 주어지는 '소수자'의 등장은 이제 낯선 것도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소수자'들의 행동과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이 더러 보인다. 요즘 문학에선 그렇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작품에서도 있을지까진 예상 못 해서 흠칫했다. 외자의 이름으로 성별을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이름으로 성별을(성별 뿐 아니라 그 존재가 누구인지까지도) 함부로 추측하는 걸 방지하고자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선 생각지도 못하게 트랜스젠더도 있고, 레즈비언도 있다. 그들은 결혼도 하고, 아기도 갖는다. 그들의 애정 행동,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생명 등이 내 가치와는 반해서 이런 것들이 편하게 다가오지 만은 않았다. (소수자에 대해 관대한 시선도, 주장도 최근 많이들 인정하듯, 나 같은 시선과 비슷한 사람도 있을 거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썼다.)


그 밖에도 ...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경(여)'이 '태(남)'에게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태도인 데에는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지 난해했다. 또한, 물론 '태'가 피의자이고, '경'은 피해자의 가족이기도 하지만, '태'에게 조금 지나치다 싶게 우위에 있는 모습은 왜 그럴까 싶었고, '경'의 주도하에 둘이 섹스를 나누는 장면도 나로선 이해가 어려웠다. 반대로 '현'앞에서 '경'은 왜 그렇게 소심하고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인지 그런 '경'의 이중적인 태도와 모습은 무엇인지 이 책을 읽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부분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욱을 떠났다. 욱의 곁을 떠났다가 돌아온 온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욱의 곁을 계속 지킨 사람들도, 욱이 겪은 것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욱의 투병과 회복을 경험할 수 없었으므로 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욱을 더욱 깊이 고립시켰다. 질병과 싸우고 있을 때 욱에게는 통증을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온전하게 표현하여 전달할 언어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을 칼로 긁어내는 것 같은', '온몸의 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몸이 끓는 것 같은' 등의 비유와 비교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유와 비교는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흔히 그 의미가 왜곡되었다. 신체의 고통이 그러할진대 마음의 절망을 표현할 언어는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의 발달도 지식의 진보도 제아무리 충실한 의료 지원체계도 인간이란, 생물이란 결국 죽는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사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는 채로, 죽음을 언제나 똑바로 바라보는 채로 하루하루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p.127


고통을 받는 이들의 깊은 아픔과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을 글로 잘 표현된 것이 읽으면서 좋았다. 그 고통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경험. 혹 그 고통이 같은 것일지라도 당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제약회사의 '약'도 '종교'의 고행도 그 고통을 완벽하게 해결해 줄 수 없다. 시작(가정)부터 잘못된 자신의 고통에서 도피하기도 했고, '태'와 같은 고통이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경'이 탐색을 포기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절대적이고 큰 믿음을 갖도록 길러졌는데, 그건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커다란 의미를 찾도록 교육받았고, 그것 역시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길러지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지만, 그게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춰진 상태로 저에게 주어졌는데 이제 와서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p.196


'태'의 경우, 잘못된 믿음으로 길러져 죄를 짓고 난 후에나 교단을 향한 믿음을 버렸다. 죽음만이 남은 그에겐 더 이상 인생에 있어 희망이 없는 점이 안타까웠다. 이런 삶에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에게 '당신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나에게도 선택이 아닌 믿음이 생긴 것은 무엇이 있는지 돌아 봤다. 내게는 '신앙'이 그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는데, 이것이 만약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한다면? 내게 신앙은 무엇이고, 난 왜 그걸 갖고 있는지 고려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고통에 관하여, 사회적인 여러 모습에 대하여, 어떤 선택에 대하여...

내가 알고, 내가 보고, 내가 진리라 여기는 것들과는 역시 많이 달랐다. 요즘 가치 흐름과 나는 분명 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과 다르다면 (이 책과 이 시대에) 당연한 것이 나에게 있어서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곰곰이 되짚어 보게 되었다. 내용이 어려운 만큼 생각해 보고, 이해하려고 몇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동의하는 것은 있다. 고통은 나만 알 수 있는 나만의 것이고, 반드시 나만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다.


탐색은 실패했다. 이제 경은 그 사실을 이해했다.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비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강렬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즉각적인 유대감을 맺기는 불가능했다. 고통과 고통의 탐색은 오히려 경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p.302


초반에 말한 대로 이 책을 읽고 난 후, 난 '고통'이란 것에 더 익숙해졌을까?

아니~~! 여러 가지 부분(몸이든 영이든 정서 감정이든)에서 고통이 오고, 사람마다 처하고 경험하는 고통이 각기 다른 데다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한계가 있다는 점만 알았지, 고통은 여전히 내게 익숙하지 않아 내 인생에 찾아올 때면 많이 놀라고 또, 많이 아플 것 같다.

#사전서평단

#고통에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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