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사를 구하려고 다수의 세월을 보내고도, 손자를 보고자 하는 김훈장의 열망에 더해 그것도 삼 형제를 바라는 모습에서 유교사상이 깊이 뿌리박힌 양반네 고집이 보인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렇게 양자 한경은 진짜 아버지를 섬기듯 김훈장을 대하는지. 유교사상의 그것을 체면만 차리는 데만 급급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동학은 반란이고, 자신들이 일으키는 유생들을 모아 뜻을 알리는 건 '의'라고 주장하는 김훈장의 모순된 모습도 우습고, 시대상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자신의 바랄대로 시대를 해석하는 것도 이 책에서 당시 양반들의 모습을 비틀어 보인 것 같아 씁쓸했다.
그 당시는 종으로 여자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운명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 권에서 또한 여성의 위상은 비참하게 다가온다. 삼수에게 조준구에게 그저 당하는 게 전부였던 삼월이와 두리는 같은 여자로 너무 안타깝다. 삼월은 조준구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다 삼수에게 버려지고, 그런 삼수와 조준구의 처 홍 씨 부인에게 구타를 당하며 살아간다. 마지막에 자기가 낳은 아이까지 죽는데, 이는 삼월의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진 셈이다. 그저 '죽지 못해 산다'라는 말은 삼월이의 생 대부분을 설명하는 것 같다. 또한, 두리도 두 번 중 한번 자기 혼자 물길어 나왔다가 자신을 노리던 삼수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는데, 그 장면에선 내가 삼수에게 당한 듯 소름이 돋았다. 딸이 그렇게 당하고 쓰러지는 듯 집으로 온 것을 심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바라볼 볼 수밖에 없는 부모, 혹여나 딸이 시집 못 갈까 봐 삼수에게 따지지도 못하는 억울함, 그 억울함을 왜 말로 못 하냐며 삼수가 두리네 앞에서 비아냥 거리는 장면은 정말 가슴을 절로 치게 했다. 당시에 태어나지 않은 걸 그나마 감사하게 되는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할까? 세계의 흐름을 따라 승기를 잡고만 일본에 어떻다 대응 한번 못하고 당하게 된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등, 이 상황들은 삼월이나 두리 그리고 평사리 사람들이 당한 일들을 오버랩 되어 같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이들과 반대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서희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넘보거나 괄시하지 못하게 자신의 할 바를 꼿꼿하게 하며 주변에 무관심한 듯 보인다. 슬픔도, 기쁨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하인과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긋는다.
그렇게 잠자코 있었지만, 그녀 나름의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묵인했고 참고 버텨왔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그 분노와 억울함을 삭히지 못한 채 질러대기도 했다. 당당했고 자신의 속내를 쏟아내려면 시원하게 뱉어내고야 마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 씨 부인도 조준구도 함부로 서희를 쫓아내지 못했다. 어린 서희를 종들 또한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모든 이유를 불문하고 평사리 사람들은 그저 당하기만 하는데 그 억울함을 함께 고스란히 느껴야 했던 독자에게 서희의 대사가 사이다와 같다.
하나도 잊지 마라! 다 하나씩 기억하고, 곱씹어 갚아줘라! 서희 하고픈 대로 다해!!!
"정말 그렇다면 나는 귀신하고 싸울 테야! 신령님네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골백번 그래 봐야 아무도 살려주진 않던걸. 구구하고 치사스러워."
놀라며 봉순이 쳐다본다.
"모조리, 다아 잡아가라지. 하지만 나는 안 될 걸. 우리 집은 망하지 않아. 여긴 최씨, 최참판댁이야! 홍가 것도 조가 것도 아냐! 아니란 말이야! 만의 일이라도 그리 된다면 봉순아? 땅이든 집이든 다 물속에 쳐넣어버릴 테야. 알겠니? 난 그렇게 할 수 있어. 내 원한으로 불살라서 죽여버릴 테야.난 그렇게 할 수 있어. 찢어 죽이고 말리어 죽일 테야. 내가 받은 수모를 하난들 잊을 줄 아느냐?" p.168-169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조준구에게 빼앗겨 당할 수 밖에 없던 서희에게도 할머니 윤씨 부인이 남긴 것이 있었다. 남들은 눈여겨 보지 않은 것, 남들은 그저 거기에 있겠거니 하는 것...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할머니와 서희의 연결고리는 남아있었다. 그가 간도로 가서 떳떳하게 자신의 뜻대로 자신을 세울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이 된다.
작가가 읽어내는 각 사람의 마음은 깊이가 있다. 김훈장의 속내, 용이의 속내, 길상의 마음 그리고 삼수의 속 깊은데서 단단히 박혀있는 악의 씨앗까지도 훑어낸다. 특히 삼수의 '악'을 다루는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포악한 악이 헤어나올 수 없는 그 우둔함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정말 이분! 뭘 아시는 분이다!
...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찰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약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잇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p.405
이제 다음은 평사리가 아닌 간도에서의 이야기가 나올터라 다른 분위기가 기대(?)된다.
서희와 주변인물들이 일제치하라는 시대적인 상황에도 어떻게 자신들의 위기의 인생을 견디고 버텨나갈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