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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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소리 없이 닥치는 고통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아픔과 충격을 난 가능한 한 덜 받고 싶어 몸을 추슬렀다. 그러려면 고통을 이해해야 했다. 내게 고통의 의미를 알게 해주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극복할 수 있게 도운 건 종교였다. 고통을 두 손 벌려 환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내겐 없을 리가 없는 고통을 받아들이기 조금 더 쉬웠고 견딜 수 있었다. 한순간 평안이 오더라도 언젠가 닥칠 고통을 순간순간 대비하고 싶어 기회만 된다면 '고통'을 이렇게 수시로 접하려고 한다. '고통'을 바라보고 '고통'을 조금 더 이해하면 '고통'에 조금 익숙할 수 있을진 않을까?


이 책은 2022년 부커 상 인터내셔널 부문에 최종 후보로 오른 작품 <저주 토끼>를 쓴 '정보라'작가의 4년 만에 낸 장편 신작이다. 초등학교 때 공포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저주 토끼> 단편만 읽었었다. 그다음 작품에서는 속이 거북해져서 이후 작품까지는 이어 읽지 못했다. <저주 토끼>에서의 단단한 문장, 거침없는 진행, 그리고 묵직한 내용만큼은 인상적이었다. 그때 받은 '정보라'작가의 작품 스타일을 기억하며, '고통'의 의미를 헤아려보고 싶었다.


간단한 줄거리


한 남자가 드론을 띄워 보내 제약회사를 폭발시켰다. 제약회사의 폭발로 그(태)는 범죄자가 되어 평생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태'는 교단의 지시를 따라 회사 건물 폭발을 주도했지만, 그는 범죄 이후 교단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범죄를 시작으로 탈세, 테러까지 온갖 혐의로 교단도 해체됐다. 그의 앞에 자신을 수사하던 형사들이 12년 만에 나타났다. 두 명의 남녀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남녀에게서 제약회사의 약물이 검출되어 '경'에게도 형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형사들과 의사, 그리고 태, 현, 경 은 회사에서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폐쇄된 제약회사 실험실로 간다. 이 사건,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 고통... 무슨 관계가 될까? 그리고 고통은... 고통은 무엇인가?


특이한 인물 이름, 구성

등장인물의 이름이 다른 작품과 달린 외자다. '륜'(綸), 순(盾),,, 한자의 뜻에 걸맞게 인물의 성품이나 특징이 드러난다. 외자가 주는 강렬함과 멋스러움에 지면에 효율적이기까지 해서 새로운 시도라고도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한자의 뜻이 떠올라 어떤 사람일지 파악하는데 조금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걸 꺼려 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작품 속 대사에서도 살짝 엿보인다), 이름에서 성별의 판단이 쉽지 않고, 2자 혹은 3자의 인물명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이라면 이런 외자 이름이 살짝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들은 왜 고통을 다루고 있나?


사람이 가장 연약해질 수 있을 때는 언제일까? 어떤 외부의 강한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할 때, 그것이 개인에게 주어질 때일 것이다. '고통'이란 게 인간에게 가해질 때, 사람은 가장 연약해지게 되지 않을까? 인간이 연약해지면 의지할 곳을 찾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에는 '약'이 해결책이고, 감정 정서에 가해지는 고통을 겪은 이라면 '종교'가 의지가 될 것이다. 고통의 통로를 지나기 위해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제약회사는 부작용을 최대한 줄인 진통제를 개발하고, 단계별로 교인들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교단에선 고통을 극복하라고 하며,'구원'이란 희망을 제시한다. 왜 이들(제약회사, 교단)은 고통을 다루고 있을까? 왜 이리 사람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들이 발 벗고 나섰는가?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제약회사나 교단이나 이득이 있다. 인간에게 고통이 있어야 그들에게 사람이 몰려온다. 그리고 돈이 들어온다.


설마 했던 이 책에!!! 그의 존재의 의미는?


중간중간 외계인과 일루미나티(계몽주의가 대두되던 1776년 프로이센에서 조직된 비밀 결사 조직으로, 신 중심의 중세 질서에 반대하고 가톨릭 체제의 불평등에 저항했다. 이후 정부와 교황의 탄압으로 해산됐으나 현대에 와서 세계 정치와 경제 등을 조종하고 있다는 음모론에 등장한다.[네이버 지식백과])란 단어가 등장해서 난 의아했다. 이는 교단에서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시나 이 책에서도 나온다!!! 그 존재가!!!

우리가 의지하는 정보나 지식은 인간이 관찰하고 분석하고 계획한 것들이다.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고 예측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이다. 과연 이 관점이 인간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데 도움이 될까? 인간을 바라볼 때, 객관적이려면 인간이 아닌 존재가 그들을 관찰해야 한다. 인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봐 줄 이가 필요하다. 신본주의 시대가 아닌 인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은 이미 그 신뢰를 잃었다. 아마 그 잃은 신뢰를 말하기 위해 이 작품에 '종교'인 교단도 끌여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신'보다는 '외계인'이 더 나았을 거다. 하지만, 외계인도 아는 걸 우리는 모르고, 그러기에 내 권력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이고 있다. '신'과 같이 '외계인'이 그들을 징계했다.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

- 사람들이 스스로 원했기 때문에 나에게 찾아와 구원을 바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나는 실험을 계속했을 뿐입니다. p.284


-나는 그들이 교단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그 고통의 의미를 빼앗아 자신들의 권력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그들은 타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하여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상당히 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감옥에서 나와서 똑같은 짓을 또다시 시작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모아서 자신들이 그 사람들의 고통 위에 서려 했습니다. p.287


역시나 다뤄지는 소수자

최근 작품들에서 단 하나라도 주어지는 '소수자'의 등장은 이제 낯선 것도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소수자'들의 행동과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이 더러 보인다. 요즘 문학에선 그렇지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작품에서도 있을지까진 예상 못 해서 흠칫했다. 외자의 이름으로 성별을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이름으로 성별을(성별 뿐 아니라 그 존재가 누구인지까지도) 함부로 추측하는 걸 방지하고자 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작품에선 생각지도 못하게 트랜스젠더도 있고, 레즈비언도 있다. 그들은 결혼도 하고, 아기도 갖는다. 그들의 애정 행동,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생명 등이 내 가치와는 반해서 이런 것들이 편하게 다가오지 만은 않았다. (소수자에 대해 관대한 시선도, 주장도 최근 많이들 인정하듯, 나 같은 시선과 비슷한 사람도 있을 거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럽게 썼다.)


그 밖에도 ...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경(여)'이 '태(남)'에게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태도인 데에는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지 난해했다. 또한, 물론 '태'가 피의자이고, '경'은 피해자의 가족이기도 하지만, '태'에게 조금 지나치다 싶게 우위에 있는 모습은 왜 그럴까 싶었고, '경'의 주도하에 둘이 섹스를 나누는 장면도 나로선 이해가 어려웠다. 반대로 '현'앞에서 '경'은 왜 그렇게 소심하고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인지 그런 '경'의 이중적인 태도와 모습은 무엇인지 이 책을 읽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부분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욱을 떠났다. 욱의 곁을 떠났다가 돌아온 온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욱의 곁을 계속 지킨 사람들도, 욱이 겪은 것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욱의 투병과 회복을 경험할 수 없었으므로 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하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욱을 더욱 깊이 고립시켰다. 질병과 싸우고 있을 때 욱에게는 통증을 자신이 느끼는 그대로 온전하게 표현하여 전달할 언어가 없었다. 그저 '머릿속을 칼로 긁어내는 것 같은', '온몸의 신경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몸이 끓는 것 같은' 등의 비유와 비교를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유와 비교는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흔히 그 의미가 왜곡되었다. 신체의 고통이 그러할진대 마음의 절망을 표현할 언어는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과학의 발달도 지식의 진보도 제아무리 충실한 의료 지원체계도 인간이란, 생물이란 결국 죽는 존재라는 사실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 서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사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인간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는 채로, 죽음을 언제나 똑바로 바라보는 채로 하루하루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p.127


고통을 받는 이들의 깊은 아픔과 어쩌지 못하는 답답함을 글로 잘 표현된 것이 읽으면서 좋았다. 그 고통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경험. 혹 그 고통이 같은 것일지라도 당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제약회사의 '약'도 '종교'의 고행도 그 고통을 완벽하게 해결해 줄 수 없다. 시작(가정)부터 잘못된 자신의 고통에서 도피하기도 했고, '태'와 같은 고통이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경'이 탐색을 포기하게 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절대적이고 큰 믿음을 갖도록 길러졌는데, 그건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삶에서 커다란 의미를 찾도록 교육받았고, 그것 역시 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길러지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지만, 그게 좋은 일이었는지 나쁜 일이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춰진 상태로 저에게 주어졌는데 이제 와서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하시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p.196


'태'의 경우, 잘못된 믿음으로 길러져 죄를 짓고 난 후에나 교단을 향한 믿음을 버렸다. 죽음만이 남은 그에겐 더 이상 인생에 있어 희망이 없는 점이 안타까웠다. 이런 삶에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에게 '당신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나에게도 선택이 아닌 믿음이 생긴 것은 무엇이 있는지 돌아 봤다. 내게는 '신앙'이 그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겠는데, 이것이 만약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라고 한다면? 내게 신앙은 무엇이고, 난 왜 그걸 갖고 있는지 고려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고통에 관하여, 사회적인 여러 모습에 대하여, 어떤 선택에 대하여...

내가 알고, 내가 보고, 내가 진리라 여기는 것들과는 역시 많이 달랐다. 요즘 가치 흐름과 나는 분명 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과 다르다면 (이 책과 이 시대에) 당연한 것이 나에게 있어서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곰곰이 되짚어 보게 되었다. 내용이 어려운 만큼 생각해 보고, 이해하려고 몇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동의하는 것은 있다. 고통은 나만 알 수 있는 나만의 것이고, 반드시 나만이 지나가야만 하는 길이다.


탐색은 실패했다. 이제 경은 그 사실을 이해했다.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비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강렬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즉각적인 유대감을 맺기는 불가능했다. 고통과 고통의 탐색은 오히려 경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p.302


초반에 말한 대로 이 책을 읽고 난 후, 난 '고통'이란 것에 더 익숙해졌을까?

아니~~! 여러 가지 부분(몸이든 영이든 정서 감정이든)에서 고통이 오고, 사람마다 처하고 경험하는 고통이 각기 다른 데다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한계가 있다는 점만 알았지, 고통은 여전히 내게 익숙하지 않아 내 인생에 찾아올 때면 많이 놀라고 또, 많이 아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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