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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평점 :
심윤경 작가님이 쓴 에세이 신간이라고 해서 집어 들었다. 그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읽고 싶은 책이었다.
이 책은 할머니와 동거하며 12손자녀의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은 심윤경 작가의 할머니와의 삶을 고찰(?) 하며 쓴 에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데, 사랑을 어떻게 분량으로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초반부터 글이 마음을 콩콩 두드린다.
나는 친척들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셨던 아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다. 열두 손자녀들 중에 내가 가장 막내였으니까 원래부터 풍성했던 그분 사랑의 잔여분을 내가 모두 털어 받았던 것 같다. 양으로 따지자면 그것은 3~4인분은 충분히 되었을지도 모른다. ... 할머니의 사랑은 뭐랄까. 어린 나에게 '쌀 한 말' 같은 느낌으로 들렸다. 많고 풍성하고 좋은 것이겠지만 그래서 그걸로 뭘 어쩌란 소리인가 싶은 기분이었다.p.19
소설가의 글이라지만 글이 찰지달까? 읽으면서도 감칠맛 나는 글이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무리 소설가여서라지만, 탁월한 비유와 섬세한 캐치를 글로 변환한 표현력은 정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만하다. 소설가 특유의 관찰력과 해석, 재치와 센스 넘치는 단어 선택에 있어 소설 <설이>에 이어 이번에도 반했다. 그러니 인덱스 테이프가 촘촘하게 페이지를 채우고도 남지!!
실은 그런 혼란스러움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육아에 답을 알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정답이라고 누가 정해주기만 하면 힘들더라도 참고 꾸역꾸역 할 텐데. 낯가림 때문에 몸과 마음이 힘든데 내가 지금 잘하는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심지어 아이를 망치는 중일 수도 있다니. 그건 너무 가혹했다. 젊고 경험이 없던 나에게는 어딘가 믿고 의지할 확실한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아이를 키우는 문제에는 확실함이라는 게 아예 없다시피 했다. 몸이 힘든 것 이상으로 그런 혼란들이 더 괴로웠다. p.46
... 산소로 향하는 야트막한 오솔길을 천천히 오르며 나는 속으로 일행들의 나이를 계산해보았다. 큰고모 94세, 둘째고모 91세, 아버지 87세, 막내고모 82세, 할머니의 직계 자손 네 사람의 나이를 합하니 354세였다. 79세 엄마까지 합하면 433세. 사촌언니와 내 나이까지 더하니까 548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이만하면 심벤저스라고 부를만한데.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p.87
"늦었어요?"
아이가 드디어 벌새 같은 엄지질을 멈추었다. 늦었어요?라니. 다 알아서 한다던 그 아이의 머릿속에는 최소한의 시간 가늠조차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사춘기 아이다. 알아서 하지 않을 자에게는 알아서 하겠다는 말의 사용을 법으로 금해야 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발바닥부터 솟구쳐오르는 용암이 입 밖으로 뿜어나오지 않도록 애를 썼다. p.133
... 나는 또 "알아서 한다며! 네가 다 알아서 한다며!!"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차 열쇠를 챙겨 들고 번개보다 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사춘기 아이의 엄마다. 우리는 서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주고받으며 서로 이해하지 못해 미쳐 돌아가는 환상의 짝꿍들이다. p.133
할머니가 사용한 단어들은 참 매력적이었다. 작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나 심플하고 단순하며 거창할 것 없없으나, 상대를 안도하게 할 수 있고 안정감을 주는 '할머니어(외국어, 외계어.. 같은 표현)'를 한눈에 알아볼 수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심윤경 작가님의 할머니는 작가님의 책을 통해 다시 살아나신 듯했는데, 그 생생한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도 따뜻하게 한다.
이렇게 책에 쓰인 다른 집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니 우리 할머니들(친할머니와 외할머니)도 생각이 났다. 친할머니는 유아시절의 내가 당신한테 달려가면 자신의 치맛자락이 더러워질까 저리가라고 했던 까칠하고 자기 중심의 할머니였다. 내가 5살 때 돌아가셨고, 뭘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따라 엉엉 울었던 기억이 지금까지 있기는 하다.
대학시절 집이 학교와 멀어 그나마 가까운 외할머니댁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가 외할머니와의 관계가 있던시기였다. 그때의 우리 할머니도 손녀에게는 (작가님의 할머니처럼) 많은 단어를 쓰거나 말이 많은 할머니가 아니었다. 외향적인 할머니의 바쁜 스케줄과 대학의 자유로움에 빠진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아침 일찍 혹은 늦은 밤이었다. 어렸던 나는 할머니의 연약한 잔소리를 듣기 싫어했고, 살가운 손녀딸 스타일은 아닌지라 할머니와 마주침이 어색해 방안에 틀어박힐 때가 많았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LA갈비를 챙겨오시고, 두부는 자주 사두셨던 외할머니, 텁텁하지만 자신만의 사랑으로 자신의 사랑을 꿋꿋이 표현했던 분이었다. 작가님처럼 세심하게 시선으로 할머니의 사랑과 캐릭터를 언어화하진 못하지만, 작가님의 할머니 덕에 나 또한 할머니 두 분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작가님의 할머니의 주언어 였던 '뒤야쓰(됐어~)', '저런!', '장하다!' 이런 표현의 단어는 나도 아이한테 틈틈이 사용해 보려고 되뇌고 있다. 짧지만 아이의 행동에 대응하기에 적확한 단어 같다. 잔소리의 맥시멈함을 줄이고, 짧고 간결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단어로 아이를 무한정으로 받아들이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 할머니의 육아는 분명 세련되지도 육아전문가의 것처럼 학문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온전한 용납과 사랑만이 담겨있을 뿐이다. 엄마의 육아에서 이런 부분이 발현되기는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육아에는 역시나 답이란 없고, 아이에게 줄 수 있는 한 최고는 '수용과 이해, 즉 사랑'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서 또 한 번 깨닫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라는 말이 기억이 남는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할머니의 심플하고 적합한 육아 스타일에서 그 어떤 육아서보다도 나은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
섬세하고 감칠맛나는 표현력과 공감할만한 내용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겐 선물이라도 해서 들려주고 싶은 책이다!
** 자신을 키워낸 할머니만의 육아 이야기를 돌이켜보면서 작가님의 양육 세계에 대입해 보고, 또 자녀를 키워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니멀해도 절제되어 적절했던 할머니의 단어와 손녀를 향한 온전한 사랑이 담겨있는 이 에세이는 '아름다운 할머니 이야기'이기에 틀린 제목은 분명 아니다. 다소 심심하고 아쉬운 제목에 살짝 망설여질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심윤경 작가님의 책이 잘 팔렸으면 하기 때문에 그걸 기대한다면 조금은 감성을 자극할 제목이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출판을 위해 애쓰신 분들껜 죄송합니다.) 한편으론 작가님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란 소설에서 비롯된 제목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