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깨주의의 탄생 -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ㅣ 보리 인문학 3
김희교 지음 / 보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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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왜 추천했는지 알것 같은 책. 차별이 만연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중국에 대한 너무나도 편향된 시각에 매몰되어 그것의 치우쳐져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살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목차부터 굉장히 흥미로운데 특히나 '10부 한국 언론의 짱깨주의적 보도 테크닉'을 훑어보면 제목만으로도 얼마나 우리가 언론에 놀아났는지 눈에 보여 머쓱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유일한 단점을 꼽자면 두껍고 무겁다는 것 ... 흥미로운 목차와는 별개로 많은 내용이 담겨있다보니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을 뿐더러 일단 기본적으로 600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양이 많고 방대하다. 한번 슥 읽고 넘어갈 책이 아니어서 평소보다 인용이 많지만 이것도 거르고 거른 것이라는 것. 사실 마지막에 가서는 지구력이 달려서 한장 한장 읽는 게 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올해 꼭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책을 꼽겠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몰아치는 삶 속에서 문득 고개를 들고 질문할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쏟아지는 정보와 프레임의 홍수 속에서 무차별적인 수용적 자세를 살짝 비틀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 그런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책 아닐까 싶다.

키신저 협약은 구소련을 견제하고자 하는 정치권 전략이기도 했지만 전 지구를 단일 시장으로 묶어 미국 금융자본의 이익률을 제고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경제적 세계전략 중 하나였다. 중국은 국가 간 분업체계에 적합한 저임금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을 가지고 있어 미국 경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음 제공해 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닉슨은 "우리는 중국이 국제사회 밖에서 공상을 키우고, 미움을 품고, 이웃 국가들을 위협하도록 영원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 작 은 지구 위에 10억 명이나 되는 잠재적 유용한 사람들이 분노의 고립상태 속에서 살아갈 공간은 없다"고 외치며 중국을 그들의 체제 내로 끌어들였다.
키신저 협약에 가장 빨리 반응한 것은 누구보다도 중국시장이 필요했던 일본이었다. 1972년 일본은 중일수교를 체결했다. 미중수교보다 7년이나 빨랐다. - P51

한중수교는 중일수교가 이루어진 지 약 20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졌다. 분단체제가 만든 반공주의가 키신저 시스템에 늦게 탑승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키신저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샌프란시스코체제와 더불어 전후체제의 두 축이 완성되었다. - P51

키신저 시스템은 미국에게는 경제 위기에 처한 샌프란시스코체제 의 보완재였고, 중국에게는 문화대혁명 이후 난관에 봉착한 자립경제의 위기를 헤쳐 나갈 출구 중 하나였다. 일본과 한국에게는 거대한 중국시장과 저렴한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북한에게는 한국, 일본과 상대적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위기의 시대가 되었다. - P52

칭크는 그렇게 탄생했다. 짱깨주의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칭키즘(Chinkism)‘에 가깝다. 자본의 문제를 중국의 문제로 돌리고, 인종주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짱깨주의와 칭키즘은 차이가 있다. 짱깨주의는 ‘칭키즘‘에는 없는 신식민주의적 식민성이 들어 있다. 짱깨주의에는 민족이나 국가의 이익과 상관없는 종주국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복종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짱깨주의를 ‘반중감정‘이나 ‘혐중정서‘라고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만 아니라 대항담론조차 형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식민의 언어 사용이다. 반중감정은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여느 국가에서 볼 수 있다. 막연한 경계심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섞인 막연한 심리상태를 뜻한다. 혐중정서는 극대화된 반중감정의 일종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짱깨주의는 배타적 민족주의 정서뿐만 아니라 신식민주의적 유사인종주의가 들어 있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다. - P102

자본 앞에 국가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국의 론스타‘라고 부르지 않았다. 론스타가 미국회사라는 것을 알려면 인터넷에서도 검색을 몇 번 거쳐야 한다. 자본은 국적이 없는데 중국 자본에는 꼭 국가 이름을 붙인다. 그러려면 중국 정부는 중국의 자본을 완벽하게 통제한 다는 가설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피케티는 반성해야 한다. 그는 중국의 사적 자본이 70%에 달하고 그들은 이미 중국 정부의 통제선을 넘고 있으며, 앞으로 통제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한겨레》도 유달리 중국 자본에만 국적을 붙인다. 부채의 덫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할 때 《한겨레》는 중국이 사적 자본을 완전하게 통제하는 국가라는 가정을 동원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평소에 중국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에 완전히 장악당한 국가처럼 보도한다. - P200

신식민주의 권력이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하는 한반도에서 과도한 유럽식 보편인권을 적용하여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진보적 결과를 이끌어 낼 가능성이 결코 높지 않다. 김누리 교수가 중국의 북한병합설에 동조하는 한 그가 한국의 중국 담론에서 할 수 있는 진보적 역할은 거의 없다. 한반도를 병합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와 할 수 있는 일은 싸우는 것이 전부이다. 신식민주의체제를 넘어서는 평화체제를 논할 수도 없다. 영토와 주권까지 병합하려는 중국보다 신식민주의를 운영하는 미국이 더 나은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동아시아는 중국의 조공책봉체제가 작동하는 시대가 아니라 미국의 신식민주의체제가 작동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지금 너도 나도 죽은 제갈공명과 싸우는 데 진심이다. 중국의 북한병합설도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상상된 중국‘과 싸우느라 신식민주의체제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 P213

이런 논지들의 주장은 한 가지 예측일 뿐이고 중국이 세계의 모델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한 가지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불분명한 미래의 일이라는 점이다. 설령 중국몽이 팽창주의 성격을 지닌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구현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
지금 중국의 외교적 지향을 평가하려면 중화도 아니고 패권도 아닌 전혀 다른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이 중화패권이라는 조악한 개념을 사용하여 중국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중국을 북한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악의 축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전쟁에 동원하려는 공포 마케팅이다. 중국몽은 그런 공포를 자극하는 좋은 소재이다. - P230

실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냉전체제로의 회귀가 국익이라는 경제적 이해관계로 따질 수 없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주권과 생존권, 그리고 삶의 질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해 한국의 보수언론이 미국 편에 서라고 주창한 시기에 SCMP는 "한국에서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재평가하고 한국이 군대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촉발"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의 관점이 아니라 한국의 관점에 서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바라보면 ‘미국 편에 서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언제든지 돌아설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대비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권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우리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우리의 주권이다.
문정인 세종문제연구소 소장은 "미국도 중국도, 그 어느 쪽도 당장은 우리 입장을 보면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데, 한국 보수언론들이 미국 편을 들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다. - P244

미국 환경단체 ‘198가지 방법‘이 지적한 대로 전 지구의 환경문제에 중국을 악마화시켜 대처하는 일은 실질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데는 아무 도음이 되지 않는다. ‘중국발 미세먼지‘는 중국을 악마로 만들어 놓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무산시키고 문제를 험오로 대체하여 문제를 덮는다. 자본의 문제를 외부화하는 최상의 프레임이다. - P265

한국 언론은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을 가릴 것이 없이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난 관점으로 보도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마크 셀던이 "새로운 지역적, 지구적 관점과 아래로부터의 관점을 바탕으로 현대의 갈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겠다며 만든 《아시아-태평양 저널: 재팬 포커스(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나 그가 추천하는 《아시아타임즈》,《글로벌포스트》뿐만 아니라 지넷(Z-net), 트루스아웃(Truthout), 커먼드림스(Common Dreams), 카운터펀치(Counterpunch), 트루스딕(Truthdig), 워인콘텍스트(War in Context), 위키리크스(Wikileaks), 허핑턴포스트(The Huffington Post)와 같은 대안언론을 인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 P327

대안언론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입장과 관점에서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24시간 영어로 방송하는 CCTV뿐만 아니라 CGTN, 알자지라, 러시아투데이, 텔레수르 들은 거의 참고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의 CIA와 연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소리(VOA, Voice of America), 자유라디오아시아(RFA, Radio Free Asia) 같은 매체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많다.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나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처럼 서구적 프레임에 선 단체의 입장도 여과 없이 보도한다. 한국 언론보도는 김성해 교수가 주장하듯 ‘정보 주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행정부, 군부, 싱크탱크, 학자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한국의 공론에 참여하고, 그들의 권위는 한국 언론이 높여 준다. 중국만 한정해서 살퍼보더라도 한국의 언론은 미국의 ‘중국 때리기‘ 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 P327

그러나 《환추스바오》의 이런 성향을 고려하더라도 한국 언론은 《환추스바오》의 목소리를 편집해서 활용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언론에 인용되는 《환추스바오》의 목소리는 지나칠 만큼 늘 분노해 있고, 누군가를 공격하며, 거칠게 말하며, 틀에 박힌 언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날마다 《환추스바오》를 구독해 보면 《환추스바오》는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다른 보도들이 많이 있고, 늘 공격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코로나19 때도 한국 언론이 《환추스바오》에 비난을 퍼부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환추스바오》는 "한국 힘 내"라는 응원 메시지를 신문에 실었다. - P338

신기하리만치 한국 진보진영에서 중국공산당을 바라보는 눈은 냉전시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비판의 틀도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대의제가 곧 민주주의라는 형식적 민주주의 논리에 빠져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란 자본주의와 민주의 타협이다.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곧바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제도 속에는 늘 자본의 논리와 지배 엘리트들의 권력이 작동한다. 자본가나 지배 엘리트의 권력이 대의제를 장악할 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마이클 샌델이 쓴 책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는 엘리트와 엘리트주의가 장악한 대의제가 어떻게 비민주주의적으로 바뀌는가를 말하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자본의 대변인이 어떻게 대의제 민주주의를 붕괴시켜 나가는지를 보여 준다. - P423

중국의 일당제가 비민주주의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유럽중심주의적 판단이다. 물론 일당제가 더 나은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니다. 둘 다 결과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진보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중국은 지금 일당제 내에서도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논의의 핵심은 결과적 민주주의에 있다. 결과적으로 더 나은 민주주의를 낳을 수 있다면 일당제든 다당제든 상관없다. 지식계 내부에서는 어떤 정당 형태가 중국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가장 유리할지 논쟁이 한창이다. - P424

《시사인》의 김동인 기자는 2019년 2월 초 <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이라는 르포 기사를 썼다. 학술적으로는 조선족 문제를 둘러싼 한국의 짱깨주의 문제를 지적해 온 논문이 몇 편 있지만 기자가 기사로 우리 안의 짱깨주의와 싸움을 벌인 것은 처음 보았다. 이 기사는 한국의 진보가 중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이었다. - P429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는 미국의 IT 전문 인터넷 신문인 지디넷(ZDNet)의 한국지사이다. 이 매체는 다른 신문과 매우 다른 중국 보도 방식을 가졌다. 우선 《뉴욕타임스》나 SCMP식의 해설 기사가 거의 없다. 단순한 사실 보도를 중심으로 기사를 내보낸다. 해외 언론을 거의 베껴 보도하는 이른바 ‘복붙‘ 기사도 많지 않다. 스스로 어젠다를 찾고 취재하여 기사를 쓴다. 지금 한국의 언론 지형에서 볼 때 위와 같은 기사 작성의 기본 원칙만 지키더라도 상당히 좋은 기사가 나올 것이다. - P432

현재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는 대략 네 가지 층위의 민주로 구성되는 다면적 민주이다. 다면적 민주의 제1층위는 보편적 가치 층위이다. 국가와 인종을 넘어서 구현되어야 할 인간의 보편가치 영역이다. 두 번째는 주권의 층위이다. 국민국가 시대의 보편인권은 대개 국가 단위로 구현된다. 국가는 주권이라는 권력을 행사하며 보편권리를 보호하는 한편 국가 간의 폭력이나 구조적인 적폐를 청산해야 할 임무를 가진다. 세 번째 층위는 국가 간 체제의 층위이다. 대개 세계는 각각 다른 수준의 국가 권력과 다양한 주권의 형태를 가진 국가들이 양국 또는 지역으로 체제를 결성하여 국가 간 체제를 구성한다. - P462

UN과 같은 국제 규범 기구일 수도 있고, 식민지 시기 인도-영국처럼 지배 -피지배 관계일 수도 있고, 미일 동맹이나 한미동맹처럼 수직적 동맹체제일 수도 있고, 아세안이나 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처럼 다자협력체이거나 EU처럼 다자주의적 관계일 수도 있다. 네 번째는 글로벌 체제 층위이다.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자본주의체제의 영역이다. 부등가 교환 체계하의 노동 문제, 자본과 국가의 관계 문제, 글로벌 분업체계하의 환경문제 들이 이 영역의 문제에 속한다. - P462

자유주의 보편가치가 전유되면 모든 가치가 등질화된다. 보편가치 우선주의의 전유가 일어나면 일상의 가치와 주권의 문제, 국가 간 체제 의 문제, 글로벌 보편가치의 문제가 평면으로 나열되어 등질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키신저 시스템에서 한국은 내부의 정치 민주화에 너무 빨리 축배를 든 채 보편가치의 극대화에 치중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손흥민이 넣은 한 골이 한미군사훈련과 등질화된다. 조국 자녀의 표창장 문제가 이재용 삼성회장의 뇌물보다 더 큰 죄가 될 수도 있다.
등질화된 자유주의 보편가치가 중국에 적용될 때 발생하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유럽중심주의 경향을 띤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는 로베르토 웅거가 개념화한 ‘제도적 물신숭배‘이다. ‘대의민주제, 시장경제, 자유로운 시민사회‘와 같은 틀을 구축하면 민주가 완성된다고 보는 제도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탈식민주의 싸움은 미뇰로의 주장대로 ‘보편성의 신화‘를 깨부수는 데서 시작 해야 한다. -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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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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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적이면서도 가볍고 과감하면서도 재미있는 소설.

아니 무엇보다 너무 재밌다. 재밌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제목에서 짐작가다 시피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가부장제를 살짝 비틀어 父가 있어야 할 자리에 女, 즉 딸을 집어 넣어 전개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사실, 주인공 이슬아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문득 이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만약 아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 형태였다면 ? 재미있지 않다. 아니, 우린 너무 아들만을 숭배하고 쩔쩔매는 가족 형태를 익숙히 봐 왔다. 그것은 차기 가부장을 떠받드는 형태로 가부장제 그자체이며 예로부터 끊임없이 무한히 숨막히게 반복되고 있는 그것이다. 만약 母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 형태였다면? 이건 좀 재미있어 보인다. 가족 내 위계서열 2위 내지는 3위(아들이 있을 경우 아들에게 2위 자리를 내어주므로)인 어머니가 위계의 정점에 서 있는 형태 또한 사회질서의 전복으로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면 딸은 가족의 위계서열에서 대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딸을 권력의 최정점에 놓아두고 전개되는 이 소설이 그저 가족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과감하고 전복적이며 독자들은 자꾸만 통쾌함을 느끼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딸이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녀장 이슬아는 자신의 모부 복희와 웅이를 직원으로 고용한다. 직장모드 일 때 그들은 서로 존대한다. 아주 낯설고 신선하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은 父인 웅이가 슬아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사용하는 부분이다.



그는 딸을 존경한다. 



딸을 존경하는 아빠. 30년이 넘는 평생 가부장제에 뇌가 절여진 나에게 아주 낯선 문장이다. '아내를 존경하는 남편' 보다 더 과감하고 낯설고 조금은 불경한 느낌도 주는 문장이다. 하지만 더욱이 그래서 한편으론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나도 존경받을 수 있다는, 그동안 나 스스로조차 자신에게 제대로 된 존중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듯한 충격을 준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이 새로운 가족 형태는 오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 자꾸만 어딘가에 실존 할 것만 같다. 거짓인 걸 알면서도, 사실을 쓴 것만 같다. 꼭 마술적 리얼리즘 같다. 또 한편으론 가부장제와 가녀장의 차이점을 직시하게 한다. 가부장제에는 뚜렷한 위계질서와 그를 유지하기 위한 억압과 피지배가 존재하지만 가녀장은 아니다. 쓰는 언어의 형태부터가 다르다. 가녀장제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대한다. 물론 그 사이에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호 존중과 배려로 유지된다. 가녀장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호존중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 더 나아가 자연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들은 식당 종업원을 존중하며 육식을 지양한다.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복회는 음식을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 슬아는 복희의 재능을 사서 누린다. 복희는 가장 잘하는 일로 돈을 번다. - P40

한 고생이 끝나면 다음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 어떻게 자라야겠다고 다짐할 새도 없이 자라버리는 시간이었다.
고단한 생로병사 속에서 태어나고 만난 당신들. 내 엄마를 낳은 당신들. 해가 지면 져녁상을 차리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당신들. 계속해서 서로를 살리는 당신들.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명력이 그들에게서 엄마를 거쳐 나에게로 흘러왔다.
알 수 없는 이 흐름을 나는 그저 사랑의 무한반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이 나의 수호신들 중 하나였음을 이제는 알겠다. 기쁨 곁에 따르는 공포와, 절망 옆에 깃드는 희망 사이에서 계속되는 사랑을 존자씨와 병찬씨를 통해 본다 - P108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겼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 P109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만오천 원을 천오백 원으로... ..."
공식적으로 띨띨이가 된 슬아가 회한 속에서 스티커를 붙이며 변명한다.
"같은 책을 계속해서 편집하다보면 뭐가 뭔지 모르게 돼... ...눈이 낡아서... ..." - P169

웅이가 잠자코 들으며 못을 박는다. 그는 문득 호시절을 지나고 있음을 느낀다. 딸에겐 젊음과 능력이 따르고 자신에겐 체력과 연륜이 따르는 이 시절. 별다른 슬픔 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이 시절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영원할 리 없다. 딸과 함께 흘러온 삼십 년이 웅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찰나 같은 과거와 도통 모르겠는 미래를 생각하다가 웅이가 입을 연다.

"남자를 만날 거면, "

나사를 조이며 덧붙인다.

"너를 존경할 줄 아는 애를 만나." - P279

그렇게 말해놓고 웅이는 생각에 잠긴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자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웅이가 알기로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남자는 잘 없다. 웅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다. 웅이는 불현듯 지난 동창회를 떠올린다.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다 맞춰준다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슬아가 대꾸한다.

"보통은 나보고 존경하라고 하던데, 남자를요."
"너는 누구든 잘 존경하잖아."

웅이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실은 내가 너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 P279

밤이 깊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수호신임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들은 종교의 근처를 배회한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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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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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 속삭이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마저도 결코 오지 않을 그 무엇인가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착각.

 

그렇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죽음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린 소스라치게 놀라고,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거쳐 몰아치는 후회의 파도에 잠식된다. 

 

사실, 30살이 넘어선 어느 순간부터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잠자다가 죽는 삶. 고통없이 내쉬는 숨결 한번에 떠나는 삶. 무엇보다도 이루기 어려운 것,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있는 그 끝이, 사실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내 소망이다. 

 

책에서 보부아르는 말한다. 어머니와 자신은 삶을 사랑했다고.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퇴근길에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는 누구일까? 아마도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아닐까? 괴로움과 우울, 힘듦에 허덕이는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만큼은 죽음은 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고. 구원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휴식 처럼 다가오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책 말미에서 보부아르가 했던 말처럼, 죽음은 우리 모두가 거쳐가야 하는 것이지만 혼자서 겪어내야 한다는 점이 무섭고 또한 두렵다. 인생의 어느 부분, 내가 죽음을 마주할 때 이런 두려운 감정을 포용할 수 있기를 그로인해 죽음이 나를 덮쳐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몸이 혐오스러움과 신성함이라는 이중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 즉 금기에 해당한다는 점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불쾌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엄마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이는 걸 태평스럽게 승낙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더 불쾌하게 했다. 엄마가 평생 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금지 사항이나 지시 사항을 벗어던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엄마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벗어던진 결과 엄마의 몸은 한낱 몸뚱이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결과 시체와 다를 바 없어져 버린 셈이었다. - P26

마구 만지고 마음대로 다루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내맡겨진, 의지할 데라곤 하나없는 가련한 몸뚱이. 거기에서 생명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관성적인 상태로만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 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라고 말했을 때, 그건 내가 했던 다른 수많은 말처럼 빈말에 붙과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산송장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 P26

그런데 또 다른 모순적인 측면 중 하나로 엄마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기는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엄만 감언이설에 우쭐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교태를 부리면서 대답하곤 했다. 아버지의 친구들 중 한 명에게서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님께, 당신의 인생에 경의를 표하며"라는 헌사가 적힌, 자비로 출간한 책 한 권을 받았을 때는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애매모호한 헌사였는데도 말이다.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존재감 없이 살아 온 덕분에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P50

게다가 엄마는 내가 신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의 의견을 존중했다. 마찬가지로 동생과 리오넬의 의견까지도 존중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자신이 "바보"처럼 비춰질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머릿속을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면서 절대로 놀라는 법 없이 모든 말에 "응, 응" 하고 대답 하곤 했다. 엄마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게 된 것은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희로애락 속에서 인생의 가장 거친 풍파를 겪어야 했던 시절의 임마에게는 자기 삶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견도, 생각도, 언어도 없는 상태였다. 엄마가 질겁하면서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 P58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 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 P58

심지어 죽음이 이기고 있을 때조차도 가증스러운 기만이 벌어지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가 자기 곁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녀와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타고난 나는 내막을 알아차렸다. 엄마가 아무도 없는 저편에서 홀로 애쓰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낫고자 하는 집념, 인내심, 용기,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엄마는 기만 당하고 있었다. 엄마가 겪는 고통 중 그 무엇 하나도 보상받지 못할 테니 말이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나한테 좋은 거니까.

나는 절망적으로 내가 저지른 잘못을 감내하고 있었다. 비록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내 탓이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없는 잘못을. - P80

그말에 나는 다시 화가 난 척했다.

"엄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서 있는 거예요. 제가 있어서 걱정되신다면 저는 갈게요."
"아니다, 아니야."

엄마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부당하게 차가운 태도로 엄마를 대하고 나니 내 마음 역시 좋지 않았다. 진실이 엄마를 짓누르고 있던 그 순간, 그래서 말로나마 그로부터 벗어나는 게 필요했을 그 순간, 우리는 엄마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했던 셈이다. 불안한 내색을 감추길, 가급적 의구심을 드러내지 말길 엄마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일평생 그래 왔듯, 여전히 엄마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느낌과 자신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달리 선택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 P94

나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지금 여기에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배, 부스럼, 거기서 나오는 고름, 푸르스름한 피부색,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등 엄마는 몸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기란 불가능했고,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머리가 뒤로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울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위독한 상태에 놓인 자신의 얼굴을 보는 건 엄마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가 늘어놓는 거짓말에 둘러싸여 회복될 거라는 간절한 희망을 가득 안고서는, 썩어 가는 육신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 상태로 가만히 누워 몽상에만 잠겨 있었다. 나는 귀찮기만 할 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들을 엄마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 P109

"이제 이 약은 안 드셔도 돼요."
"먹는 게 더 나을 텐데" 라고 말하면서 엄마는 석회 색깔의 물약을 삼켰다. 하지만 먹는 걸 힘들어했다.

"애쓰지 마세요,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만 드세요."
"그러냐?"라며 엄마는 약그릇을 살피면서 망설였다. - P109

"의사들 말로는 촛불이 꺼지듯이 돌아가셨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동생은 흐느끼며 말했다. 간병인이 답했다.

"하지만 보호자분, 제가 보증하건대 어머니께서는 아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어요." - P127

사실 엄마는 비교적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나를 바보같은 사람들에게 말겨 놓지 마라.

이렇게 호소할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는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무심한 의사들과 과로에 지친 간호사에 의해 좌우되는 일개 환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느낄 때 그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공포가 엄습할 때 이마에 손을 없어 줄 이 하나 없을 때, 고통이 휘몰아칠 때 고통을 달래 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죽음의 정적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이라도 늘어놓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 그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말이다. - P137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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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씨의 죽음 -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는 어떻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는가
김영선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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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쓰인 목적성이 뚜렷하고 그 해결방안 또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책의 목적은 현대 한국사회에 만연한 과로죽음(과로사 및 과로자살)에는 "과로" 라는 구조적인 원인이 있으며 이것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성과중심체제의 현대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법제도, 기업, 개인, 문화측면에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므로 시간이 없다면 첫장과 마지막 장만 읽어도 괜찮다고 본다.


과로와 죽음과의 거리는 멀고도 가까운데, 왜냐하면 과로로 인한 죽음이 명백해 보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과로에 익숙해져버린 사회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 둘의 연관관계가 정치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과로로 유발된 우울증이 과로죽음의 개별화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과로와 죽음간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일이 상당히 요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로사는 만연하다. 너무나 만연한 것이 문제다. 무엇보다 열받는 지점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논리를 대변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로를 당연시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를 묵살한다. '의지가 약해서', '나때는 말이야', '근성이 없어서' 등의 말로 노동의 불합리한 구조적 원인을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우스운 점은 이런 말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또한 노동자라는 점이다. 그저 죽어가는 이들보다 조금 더 안전한 지대에 있다는 점이 다를 뿐. 어리석고 이기적인 그들에게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다음 시를 바치고 싶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마지막 장에서 과로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소비지향주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더 더 더 일하는 것,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그 끝은 더 더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고 추구하는 소비지향주의 문화에 있다. 사회구조 차원에서의 법제도화와 기업문화 개선 또한 이런 문제해결의 핵심이지만 현대의 미친 듯한 소비지향주의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과로죽음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혔는데 그 상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과실치사라고 부른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이 입힐 상해가 치명적일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살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 명을 제 수명보다 훨씬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즉 칼이나 총알 못지않은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몰 때, 수천 명에게 생활필수품을 빼앗고 그들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위치로 몰아넣을 때, 법의 완력을 이용해 그들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묶어둘 때, 이 희생자 수천 명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허용할 때, 그럴 때 사회의 행위는 앞에서 말한 한 사람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살인이다. - P15

그 살인은 실상을 감춘 악의적인 살인, 아무도 막아낼 수 없는 살인, 아무도 살인자를 볼 수 없는 데다가 작위보다 부작위에 가까운 범행이라서 희생자가 자연스럽게 죽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이다. 그렇지만 살인은 엄연히 살인이다. - P15

과로사회에서 우리는 시간 빈곤time poverty에 허덕이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과로의 악취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 거기서 얼마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알지 못하는 저인지 상태, 무감각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과로죽음에서 과로를 읽지 못하는 상태다. 죽음의 무게가 큰 탓만은 아니다. ‘(과로를) 읽지 못하게 하는‘ 이란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과로는 탈정치화되어 있다. 저인지는 탈정치화의 산물이다. 이런 샅애는 착취와 폭력이 아주 손쉽게 작동되는 상태와 같다. 과로+성과체제가 재생산될 여지가 높아진다. - P29

논문을 세 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과로죽음의 원인 에 대한 문화적 설명과 개인 차원의 설명은 권력 장치technology of power의 지배 효과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개인환원론은 권력 작용을 탈각시키고 문화적 설명은 권력 작용을 모호하게 흐려버린다.
②완벽주의 성향 같은 개인적 특성이나 소속감 같은 문화적 태도 모두 사실은 통치 기술로서의 작업장 장치에 의해 형성된 산물이다.
③그렇기에 그 장치에 스며들어 있는 통치 기술을 드러내고 이에 대항하는 집합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 P137

존버씨가 자살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려 했던 바는 야만적인 일터에 대한 분노이자 그 야만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는 점이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그만두지 못했을까?‘처럼 문제의 원인을 개인 탓으로 환원하는 질문이 아니라 ‘망인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었을까?‘ ‘무엇에 대한 분노였을까?‘ 남겨진 우리에게 보내려 한 신호는 무엇일까‘라고! - P153

쇼어는 일-소비 악순환을 "카드로 레저 용품을 사들이고 카드빚을 메꾸기 위해 추가노동을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추가 노동 때문에 쪼그라든 여가를 보상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더욱더 미친 듯이 소비하는 형국"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소득이 증가하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선택하는 비율이 늘어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장시간 노동이 재생산되는 현실적인 이유를 집어낸다.
일-소비 악순환이라는 문제제기는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대안적 소비 실천(윤리적 소비, 지속 가능한 소비, 생태적 소비, 탈소비)과 함께 고려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늘어나는‘ 소비 항목, ‘빨라지는‘ 소비 속도, ‘높아지는‘ 소비 규범, ‘경쟁적인‘ 소비 행동, ‘무제한적인‘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주의의 압력과 거리를 두는 방식의 대안적인 실천은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노동시간 단축 방법론 가운데 하나다. - P248

과노동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모리오카 고지는 개인, 노동조합, 기업, 법제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선 법제도를 어떻게 개선할까?
① 8시간제를 무력화시키는 36협정을 페지하고 1일 잔업시간의 상한을 원칙적으로 새롭게 설정한다.
② 연차휴가의 완전 사용을 장려하고 연속 휴가 제도를 도입한다.
③ 영업 시간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설정해 무제한 연장을 제한한다. - P249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할까?
① 노동자의 일-생활 균형에 유의한다.
② 업무량에 따른 인원 계획을 책정하고 적절한 인원을 배치함으로써 항시적 잔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
③ 서비스 잔업과 휴일노동을 지양한다.
④ 과중노동에 따른 건강 문제를 방지하는 데 힘쓴다.
⑤ 국제노동기준을 준수한다. - P250

노예는 여가/시간 없는 사람을 뜻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빌려 시간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이야기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 에 파르면, 과로+성과체제에 속한 우리 대부분은 노예의 범주에 들 것이다. 그는 주위 사물들에 귀 기울이게 하고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존귀한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물적 토대로서의 시간, 여가, 관상contemplation을 강조한다. - P270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은 사회에 여가, 자유시간이 있어야 한다. 여가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합의를 하고 정치에 참가하는 데 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한 틈이 없으면 정치는 불가능하다. 여가가 있어야 정치를 하고 문화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철학을 한다. ……노동시간 이외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로운 공공영역을 만드는 것이 가능 하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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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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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단순한 열정'을 읽었을 때도 느꼈는데,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내가 쓴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그의 작품을 자꾸 읽고 싶게 만드는 동시에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유성을 깨뜨리고, 사실 그것은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면 겪는, 어떤 보편적이고도 흔한 것이었다는 충격을 안겨 준다.


'여자아이 기억', Memoire de fille는 아니 에르노가 1958년과 1960사이 겪었던, 자신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그런 사건들에 대해 적은 글이다. 독특한 점은 일반적인 회고록이나 자서전과는 다르게 그가 과거의 자신을 마치 타자를 바라보듯이 적어 나갔다는 점인데 이것 또한 내가 일기를 쓸 때마다 느꼈던 부분이라 친숙하면서도 생소했다. 



과거의 자신은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다. 



나 자신은 이 순간만 존재할 뿐, 지나간 과거 속 자신은 현재의 나와 동일한 인물이기 보다는 기억으로 묘사되는 사람에 가깝다. 과거의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또한 기억은 회상할수록 왜곡되는데 종래에는 현실보다 뚜렷한 현실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성과 병치했을때 오히려 실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니 에르노의 이런 시각은 '여자아이 기억'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글쎄 무엇보다 현실적인 성교육의 중요성을 느꼈달까. 18살의 아니 에르노처럼,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모르는 채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에 뒤떨어진 제도는 이런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며, 사실 보호할 의지를 보이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사회가 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최소한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그들 앞에 어떤 종류의 삶이 놓여 있는지 자각이라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 


타인이 겪은 일을 적는 것 마냥 당사자성을 배제한 채 담담히 서술해내는 필체 때문에 오히려 아니 D가 견뎌낸 삶이 참담한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어쨌든 우리들 대부분은 언젠가 부모님의 안락한 울타리를 떠나 홀로 서야한다. 홀로 서서, 홀로 집단을 마주하고 그 집단 속에서 살아 남을 방법을 필사적으로 배우고 강구해 나간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집단이라는 거대한 매커니즘 속에 부품으로써 (나름) 순조롭게 굴러가는 순간이 오지만, 누구나 융화되는 그 처음은 저마다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종종 순수한 영혼들에게는 너무나도 날것의 잔혹함을 드러낸다는 점이 참 서글프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아니 D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는 말하기도 지치고 지겨운 불균형한 운동장. 많은 이들과 잔 남자는 승리자가 되고, 많은 이들과 잔 여자는 창녀가 되는 현실. 여성에 대한 유린, 조롱. 철저히 여성을 타자화한 사회에서 자라 스스로를 상품화 하면서도 수치심을 모르는 삶. 이 모든 것이 책에 담겨있다. 50년 전 프랑스 사회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놀라우리만치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천천히 나아지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인간. 여성. 그래 그것이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책이다.


그녀는 그라는 사람에게 굴복하는 게 아니라, 명백하고 보편적인 법칙에 굴복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가 따랐어야만 했을 남성적 야만성의 법칙. 그 법칙이 거칠고 더러운 건,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들을 한다. 외설적인 이야기를 은밀히 속삭이던 유쾌한 사춘기 소녀들의 세계로부터 남자들의 세계로 그녀를 데려가고, 정제되지 않은 성의 영역에 진입했음을 그녀에게 의미하는 이런 말들.
나 오늘 오후에 자위했어.
네가 있던 학교 애들은 다 레즈지, 아냐? - P58

매일매일, 세계 어디든 여자를 둥그렇게 둘러싸는 남자들이 있다. 여자에게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들. - P88

그녀는 비난이 조리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쏟아진다는 사실에 놀라고,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이런 구역질나는 행위에 그들이 박수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들이 막 넘어선 경계선은 그들이 그녀를 다른 여자 지도강사와 똑같이 여기지 않고, 그녀에 대해서라면 그들이 모든 권리를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동등하지 않다. 그녀는 그들만큼 가치 있지 않다. 너 같은 애랑은 친구 아니거든, 하고 모니크 C는 말했다. 무리 속 자기가 차지한 자리에 대해 그녀는 전처럼 태평하게 - 혹은 가볍게 -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그 무리에 속해야 할 필요가 줄어든 건 아니다. - P89

그녀는 위협적이지만 보이지는 않는 우월함의 분위기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 자연스러운 일인 양 받아들이면서, 부모의 직업(도지사, 의사, 약사, 사범학교 행정직원, 교수, 교사)이나 루앙의 근사한 지역에 있는 그들의 집들과 곧바로 연관 짓게 될 우월함. 유일한 노동자 계급 출신 여자아이 - 콜레트 P, 생계장학금을 받는 학생으로 아버지가 벽돌공이다 - 가 말하는 방식 때문에 아이들이 짓는 연민 어린 미소 속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우월함. 어느 날은 도도한 학생이 어깨를 들썩이며 콜레트에게 알려준다. ‘이빨까다‘라는 건 우리 말에 없어. 그녀는 콜레트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빨까다‘라는 말을 썼던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기도 했다. - P120

이런 것들을 읽으며 나는 감동을 받는다. 1958년 가을, 생로맹 장터의 아우성 속에서 이제르의 대로를 홀로 절망에 잠겨 걷던 열여덟 살 여자아이의 마음이 나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 거의 구원받기까지 한 것처럼. 절망을 느끼던 그 시기에 이 여성들이 - 당시에 나는 그들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 자기처럼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위로하고,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이 지닌 고유성과 고독을 산산조각 내러 상상력이 찾아올 때 느끼는 이 회고적 위안의 기이한 달콤함. - P127

하지만 그것이 단 하나일지라도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인 어떤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선입견에 근거한 생각이나 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써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무언가, 펼쳐진 이야기의 접혀 있던 모서리에서 흘러나오고, 앞으로 벌어질, 그리고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이해하는 데 - 견디는 데 -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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