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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평점 :
얼마 전 '단순한 열정'을 읽었을 때도 느꼈는데,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내가 쓴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그의 작품을 자꾸 읽고 싶게 만드는 동시에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유성을 깨뜨리고, 사실 그것은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면 겪는, 어떤 보편적이고도 흔한 것이었다는 충격을 안겨 준다.
'여자아이 기억', Memoire de fille는 아니 에르노가 1958년과 1960사이 겪었던, 자신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그런 사건들에 대해 적은 글이다. 독특한 점은 일반적인 회고록이나 자서전과는 다르게 그가 과거의 자신을 마치 타자를 바라보듯이 적어 나갔다는 점인데 이것 또한 내가 일기를 쓸 때마다 느꼈던 부분이라 친숙하면서도 생소했다.
과거의 자신은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다.
나 자신은 이 순간만 존재할 뿐, 지나간 과거 속 자신은 현재의 나와 동일한 인물이기 보다는 기억으로 묘사되는 사람에 가깝다. 과거의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또한 기억은 회상할수록 왜곡되는데 종래에는 현실보다 뚜렷한 현실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성과 병치했을때 오히려 실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니 에르노의 이런 시각은 '여자아이 기억'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글쎄 무엇보다 현실적인 성교육의 중요성을 느꼈달까. 18살의 아니 에르노처럼,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모르는 채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에 뒤떨어진 제도는 이런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며, 사실 보호할 의지를 보이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사회가 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최소한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그들 앞에 어떤 종류의 삶이 놓여 있는지 자각이라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
타인이 겪은 일을 적는 것 마냥 당사자성을 배제한 채 담담히 서술해내는 필체 때문에 오히려 아니 D가 견뎌낸 삶이 참담한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어쨌든 우리들 대부분은 언젠가 부모님의 안락한 울타리를 떠나 홀로 서야한다. 홀로 서서, 홀로 집단을 마주하고 그 집단 속에서 살아 남을 방법을 필사적으로 배우고 강구해 나간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집단이라는 거대한 매커니즘 속에 부품으로써 (나름) 순조롭게 굴러가는 순간이 오지만, 누구나 융화되는 그 처음은 저마다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종종 순수한 영혼들에게는 너무나도 날것의 잔혹함을 드러낸다는 점이 참 서글프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아니 D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는 말하기도 지치고 지겨운 불균형한 운동장. 많은 이들과 잔 남자는 승리자가 되고, 많은 이들과 잔 여자는 창녀가 되는 현실. 여성에 대한 유린, 조롱. 철저히 여성을 타자화한 사회에서 자라 스스로를 상품화 하면서도 수치심을 모르는 삶. 이 모든 것이 책에 담겨있다. 50년 전 프랑스 사회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놀라우리만치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천천히 나아지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인간. 여성. 그래 그것이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책이다.
그녀는 그라는 사람에게 굴복하는 게 아니라, 명백하고 보편적인 법칙에 굴복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녀가 따랐어야만 했을 남성적 야만성의 법칙. 그 법칙이 거칠고 더러운 건, 원래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들을 한다. 외설적인 이야기를 은밀히 속삭이던 유쾌한 사춘기 소녀들의 세계로부터 남자들의 세계로 그녀를 데려가고, 정제되지 않은 성의 영역에 진입했음을 그녀에게 의미하는 이런 말들. 나 오늘 오후에 자위했어. 네가 있던 학교 애들은 다 레즈지, 아냐? - P58
매일매일, 세계 어디든 여자를 둥그렇게 둘러싸는 남자들이 있다. 여자에게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들. - P88
그녀는 비난이 조리사가 아니라 자신에게 쏟아진다는 사실에 놀라고,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이런 구역질나는 행위에 그들이 박수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그들이 막 넘어선 경계선은 그들이 그녀를 다른 여자 지도강사와 똑같이 여기지 않고, 그녀에 대해서라면 그들이 모든 권리를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동등하지 않다. 그녀는 그들만큼 가치 있지 않다. 너 같은 애랑은 친구 아니거든, 하고 모니크 C는 말했다. 무리 속 자기가 차지한 자리에 대해 그녀는 전처럼 태평하게 - 혹은 가볍게 - 생각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그 무리에 속해야 할 필요가 줄어든 건 아니다. - P89
그녀는 위협적이지만 보이지는 않는 우월함의 분위기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 자연스러운 일인 양 받아들이면서, 부모의 직업(도지사, 의사, 약사, 사범학교 행정직원, 교수, 교사)이나 루앙의 근사한 지역에 있는 그들의 집들과 곧바로 연관 짓게 될 우월함. 유일한 노동자 계급 출신 여자아이 - 콜레트 P, 생계장학금을 받는 학생으로 아버지가 벽돌공이다 - 가 말하는 방식 때문에 아이들이 짓는 연민 어린 미소 속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우월함. 어느 날은 도도한 학생이 어깨를 들썩이며 콜레트에게 알려준다. ‘이빨까다‘라는 건 우리 말에 없어. 그녀는 콜레트 때문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빨까다‘라는 말을 썼던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기도 했다. - P120
이런 것들을 읽으며 나는 감동을 받는다. 1958년 가을, 생로맹 장터의 아우성 속에서 이제르의 대로를 홀로 절망에 잠겨 걷던 열여덟 살 여자아이의 마음이 나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 거의 구원받기까지 한 것처럼. 절망을 느끼던 그 시기에 이 여성들이 - 당시에 나는 그들의 이름조차 몰랐지만 - 자기처럼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운 기억을 위로하고,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이 지닌 고유성과 고독을 산산조각 내러 상상력이 찾아올 때 느끼는 이 회고적 위안의 기이한 달콤함. - P127
하지만 그것이 단 하나일지라도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인 어떤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글을 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선입견에 근거한 생각이나 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로써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 무언가, 펼쳐진 이야기의 접혀 있던 모서리에서 흘러나오고, 앞으로 벌어질, 그리고 이미 저질러버린 일을 이해하는 데 - 견디는 데 - 도움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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