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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씨의 죽음 - 갈아넣고 쥐어짜고 태우는 일터는 어떻게 사회적 살인의 장소가 되는가
김영선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1월
평점 :
책이 쓰인 목적성이 뚜렷하고 그 해결방안 또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책의 목적은 현대 한국사회에 만연한 과로죽음(과로사 및 과로자살)에는 "과로" 라는 구조적인 원인이 있으며 이것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성과중심체제의 현대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법제도, 기업, 개인, 문화측면에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므로 시간이 없다면 첫장과 마지막 장만 읽어도 괜찮다고 본다.
과로와 죽음과의 거리는 멀고도 가까운데, 왜냐하면 과로로 인한 죽음이 명백해 보이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과로에 익숙해져버린 사회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 둘의 연관관계가 정치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과로로 유발된 우울증이 과로죽음의 개별화에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과로와 죽음간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일이 상당히 요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로사는 만연하다. 너무나 만연한 것이 문제다. 무엇보다 열받는 지점은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구성원이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논리를 대변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로를 당연시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를 묵살한다. '의지가 약해서', '나때는 말이야', '근성이 없어서' 등의 말로 노동의 불합리한 구조적 원인을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우스운 점은 이런 말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또한 노동자라는 점이다. 그저 죽어가는 이들보다 조금 더 안전한 지대에 있다는 점이 다를 뿐. 어리석고 이기적인 그들에게 마르틴 니묄러 목사의 다음 시를 바치고 싶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마지막 장에서 과로죽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소비지향주의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더 더 더 일하는 것,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그 끝은 더 더 더 많은 소비를 조장하고 추구하는 소비지향주의 문화에 있다. 사회구조 차원에서의 법제도화와 기업문화 개선 또한 이런 문제해결의 핵심이지만 현대의 미친 듯한 소비지향주의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과로죽음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혔는데 그 상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과실치사라고 부른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이 입힐 상해가 치명적일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살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 명을 제 수명보다 훨씬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즉 칼이나 총알 못지않은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몰 때, 수천 명에게 생활필수품을 빼앗고 그들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위치로 몰아넣을 때, 법의 완력을 이용해 그들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묶어둘 때, 이 희생자 수천 명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허용할 때, 그럴 때 사회의 행위는 앞에서 말한 한 사람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살인이다. - P15
그 살인은 실상을 감춘 악의적인 살인, 아무도 막아낼 수 없는 살인, 아무도 살인자를 볼 수 없는 데다가 작위보다 부작위에 가까운 범행이라서 희생자가 자연스럽게 죽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살인이다. 그렇지만 살인은 엄연히 살인이다. - P15
과로사회에서 우리는 시간 빈곤time poverty에 허덕이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됐다. 과로의 악취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 거기서 얼마나 고약한 냄새가 나는지 알지 못하는 저인지 상태, 무감각 상태에 놓여 있을 뿐이다. 과로죽음에서 과로를 읽지 못하는 상태다. 죽음의 무게가 큰 탓만은 아니다. ‘(과로를) 읽지 못하게 하는‘ 이란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과로는 탈정치화되어 있다. 저인지는 탈정치화의 산물이다. 이런 샅애는 착취와 폭력이 아주 손쉽게 작동되는 상태와 같다. 과로+성과체제가 재생산될 여지가 높아진다. - P29
논문을 세 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과로죽음의 원인 에 대한 문화적 설명과 개인 차원의 설명은 권력 장치technology of power의 지배 효과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는다. 개인환원론은 권력 작용을 탈각시키고 문화적 설명은 권력 작용을 모호하게 흐려버린다. ②완벽주의 성향 같은 개인적 특성이나 소속감 같은 문화적 태도 모두 사실은 통치 기술로서의 작업장 장치에 의해 형성된 산물이다. ③그렇기에 그 장치에 스며들어 있는 통치 기술을 드러내고 이에 대항하는 집합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 P137
존버씨가 자살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려 했던 바는 야만적인 일터에 대한 분노이자 그 야만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는 점이다.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그만두지 못했을까?‘처럼 문제의 원인을 개인 탓으로 환원하는 질문이 아니라 ‘망인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었을까?‘ ‘무엇에 대한 분노였을까?‘ 남겨진 우리에게 보내려 한 신호는 무엇일까‘라고! - P153
쇼어는 일-소비 악순환을 "카드로 레저 용품을 사들이고 카드빚을 메꾸기 위해 추가노동을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추가 노동 때문에 쪼그라든 여가를 보상하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더욱더 미친 듯이 소비하는 형국"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소득이 증가하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선택하는 비율이 늘어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장시간 노동이 재생산되는 현실적인 이유를 집어낸다. 일-소비 악순환이라는 문제제기는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대안적 소비 실천(윤리적 소비, 지속 가능한 소비, 생태적 소비, 탈소비)과 함께 고려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늘어나는‘ 소비 항목, ‘빨라지는‘ 소비 속도, ‘높아지는‘ 소비 규범, ‘경쟁적인‘ 소비 행동, ‘무제한적인‘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주의의 압력과 거리를 두는 방식의 대안적인 실천은 시간이 다소 걸리겠지만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노동시간 단축 방법론 가운데 하나다. - P248
과노동을 저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모리오카 고지는 개인, 노동조합, 기업, 법제도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선 법제도를 어떻게 개선할까? ① 8시간제를 무력화시키는 36협정을 페지하고 1일 잔업시간의 상한을 원칙적으로 새롭게 설정한다. ② 연차휴가의 완전 사용을 장려하고 연속 휴가 제도를 도입한다. ③ 영업 시간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설정해 무제한 연장을 제한한다. - P249
기업은 무엇을 해야 할까? ① 노동자의 일-생활 균형에 유의한다. ② 업무량에 따른 인원 계획을 책정하고 적절한 인원을 배치함으로써 항시적 잔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 ③ 서비스 잔업과 휴일노동을 지양한다. ④ 과중노동에 따른 건강 문제를 방지하는 데 힘쓴다. ⑤ 국제노동기준을 준수한다. - P250
노예는 여가/시간 없는 사람을 뜻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빌려 시간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이야기한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의 저자 더글러스 러미스 에 파르면, 과로+성과체제에 속한 우리 대부분은 노예의 범주에 들 것이다. 그는 주위 사물들에 귀 기울이게 하고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존귀한 일인지를 깨닫게 하는 물적 토대로서의 시간, 여가, 관상contemplation을 강조한다. - P270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은 사회에 여가, 자유시간이 있어야 한다. 여가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 의논을 하고 합의를 하고 정치에 참가하는 데 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한 틈이 없으면 정치는 불가능하다. 여가가 있어야 정치를 하고 문화를 만들고 예술을 만들고, 철학을 한다. ……노동시간 이외의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로운 공공영역을 만드는 것이 가능 하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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