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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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모든 것이 영원할 것이라 속삭이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마저도 결코 오지 않을 그 무엇인가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착각.

 

그렇다. 그래서 어느 순간 죽음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린 소스라치게 놀라고,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거쳐 몰아치는 후회의 파도에 잠식된다. 

 

사실, 30살이 넘어선 어느 순간부터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죽음이다. 잠자다가 죽는 삶. 고통없이 내쉬는 숨결 한번에 떠나는 삶. 무엇보다도 이루기 어려운 것,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신의 영역에 있는 그 끝이, 사실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내 소망이다. 

 

책에서 보부아르는 말한다. 어머니와 자신은 삶을 사랑했다고.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라고. 

퇴근길에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는 누구일까? 아마도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아닐까? 괴로움과 우울, 힘듦에 허덕이는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만큼은 죽음은 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고. 구원까진 아니더라도 일종의 휴식 처럼 다가오진 않을까 하고 말이다.

 

책 말미에서 보부아르가 했던 말처럼, 죽음은 우리 모두가 거쳐가야 하는 것이지만 혼자서 겪어내야 한다는 점이 무섭고 또한 두렵다. 인생의 어느 부분, 내가 죽음을 마주할 때 이런 두려운 감정을 포용할 수 있기를 그로인해 죽음이 나를 덮쳐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몸이 혐오스러움과 신성함이라는 이중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 즉 금기에 해당한다는 점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불쾌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엄마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이는 걸 태평스럽게 승낙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더 불쾌하게 했다. 엄마가 평생 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금지 사항이나 지시 사항을 벗어던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엄마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벗어던진 결과 엄마의 몸은 한낱 몸뚱이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고, 그결과 시체와 다를 바 없어져 버린 셈이었다. - P26

마구 만지고 마음대로 다루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내맡겨진, 의지할 데라곤 하나없는 가련한 몸뚱이. 거기에서 생명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관성적인 상태로만 연장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엄마를 살아 있는 존재로 여겨 왔던 나는 언젠가, 그것도 얼마 안 가서 곧 엄마가 죽는걸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엄마의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시간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라고 말했을 때, 그건 내가 했던 다른 수많은 말처럼 빈말에 붙과했다. 그런 내가 이번에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산송장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 P26

그런데 또 다른 모순적인 측면 중 하나로 엄마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기는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엄만 감언이설에 우쭐하곤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교태를 부리면서 대답하곤 했다. 아버지의 친구들 중 한 명에게서 "프랑수아즈 드 보부아르 님께, 당신의 인생에 경의를 표하며"라는 헌사가 적힌, 자비로 출간한 책 한 권을 받았을 때는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애매모호한 헌사였는데도 말이다. 경의를 표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존재감 없이 살아 온 덕분에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P50

게다가 엄마는 내가 신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나의 의견을 존중했다. 마찬가지로 동생과 리오넬의 의견까지도 존중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자신이 "바보"처럼 비춰질까 봐 걱정했다. 그래서 머릿속을 계속해서 모호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면서 절대로 놀라는 법 없이 모든 말에 "응, 응" 하고 대답 하곤 했다. 엄마가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갖추게 된 것은 말년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희로애락 속에서 인생의 가장 거친 풍파를 겪어야 했던 시절의 임마에게는 자기 삶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의견도, 생각도, 언어도 없는 상태였다. 엄마가 질겁하면서 불안해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 P58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 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 P58

심지어 죽음이 이기고 있을 때조차도 가증스러운 기만이 벌어지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가 자기 곁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녀와는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을 타고난 나는 내막을 알아차렸다. 엄마가 아무도 없는 저편에서 홀로 애쓰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낫고자 하는 집념, 인내심, 용기,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엄마는 기만 당하고 있었다. 엄마가 겪는 고통 중 그 무엇 하나도 보상받지 못할 테니 말이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나한테 좋은 거니까.

나는 절망적으로 내가 저지른 잘못을 감내하고 있었다. 비록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내 탓이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없는 잘못을. - P80

그말에 나는 다시 화가 난 척했다.

"엄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서 있는 거예요. 제가 있어서 걱정되신다면 저는 갈게요."
"아니다, 아니야."

엄마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부당하게 차가운 태도로 엄마를 대하고 나니 내 마음 역시 좋지 않았다. 진실이 엄마를 짓누르고 있던 그 순간, 그래서 말로나마 그로부터 벗어나는 게 필요했을 그 순간, 우리는 엄마에게 침묵할 것을 강요했던 셈이다. 불안한 내색을 감추길, 가급적 의구심을 드러내지 말길 엄마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일평생 그래 왔듯, 여전히 엄마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느낌과 자신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달리 선택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 P94

나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지금 여기에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배, 부스럼, 거기서 나오는 고름, 푸르스름한 피부색,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등 엄마는 몸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기란 불가능했고,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머리가 뒤로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거울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위독한 상태에 놓인 자신의 얼굴을 보는 건 엄마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우리가 늘어놓는 거짓말에 둘러싸여 회복될 거라는 간절한 희망을 가득 안고서는, 썩어 가는 육신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진 상태로 가만히 누워 몽상에만 잠겨 있었다. 나는 귀찮기만 할 뿐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들을 엄마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 P109

"이제 이 약은 안 드셔도 돼요."
"먹는 게 더 나을 텐데" 라고 말하면서 엄마는 석회 색깔의 물약을 삼켰다. 하지만 먹는 걸 힘들어했다.

"애쓰지 마세요,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만 드세요."
"그러냐?"라며 엄마는 약그릇을 살피면서 망설였다. - P109

"의사들 말로는 촛불이 꺼지듯이 돌아가셨대.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동생은 흐느끼며 말했다. 간병인이 답했다.

"하지만 보호자분, 제가 보증하건대 어머니께서는 아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어요." - P127

사실 엄마는 비교적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나를 바보같은 사람들에게 말겨 놓지 마라.

이렇게 호소할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는 처지에 놓인 모든 사람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무심한 의사들과 과로에 지친 간호사에 의해 좌우되는 일개 환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느낄 때 그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공포가 엄습할 때 이마에 손을 없어 줄 이 하나 없을 때, 고통이 휘몰아칠 때 고통을 달래 주는 이가 아무도 없을 때, 죽음의 정적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이라도 늘어놓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때 그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말이다. - P137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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