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리마스터판) - 2017년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정세랑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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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라는 수많은 퍼즐이 얽혀 이루는 세상


피프티 피플은 50명(엄밀히 말하자면 51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낸 소설이다. 각 장마다 해당 장의 이름을 하고 있는 이의 간략한 삶의 단편을 풀어내는데, 그렇게 한명 두명 읽다 보면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이들이 얽혀 이루어낸 사회가 눈에 보이게 되는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사실 한 서너장 읽었을때는 호흡이 너무 짧고 이어지는 느낌이 나지 않아 중단할까 싶었는데 중반부쯤 이르니 어느새 소설에 젖어들어 각자의 인생을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다.


인물들의 격렬하고도 처절한 삶에 비해 이를 풀어내는 소설의 어조는 건조하고 잔잔하기 짝이 없어서 그 극명한 대비가 모종의 서글픔을 자아낸다고 하겠다. 


삶은 슬픈것이지만 우리 모두는 그것을 꾸역꾸역 살아낸다. 살아내면서, 드물게 발견한 희망과 행복의 조각으로 눈물의 바다를 건너내는 것이다. 슬픈 이가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슬픈 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치있는 면모라고 하고 싶다.

지지는 주변에 자신의 성적 지향을 일부러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서 숨긴 적도 없었다. 누구든 물어보면 대답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묻지 않아서,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는 조용함이 좋아서 그냥 있었다. - P411

"그것보다는 늘 지고 있다는 느낌이 어렵습니다."
모든 곳이 어찌나 엉망인지, 엉망진창인지, 그 진창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잦게 좌절되는지, 노력은 닿지 않는지, 한계를 마주치는지, 실망하는지, 느리고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지 현재는 토로하며 물었다. 압축이 쉽지 않았다. - P468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 P469

"물론 자꾸 잊을 겁니다. 가끔 끔찍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 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좋게 소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 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또 던질 겁니다. 소 선생이 던질 수 없는 거리까지.
(...)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지요. 당사자니까, 끄트머리에 서 있으니까. 그래도 오만해지지 맙시다. 아무리 절어도 그다음 세대는 옵니다. 어차피 우리는 다 징검다리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는 데까지만 하면 돼요. 후회 없이." - P470

(새로 쓴 작가의 말 중)
어디에 계시거나 마땅히 누려야 할 안전 속에 계시길 바랍니다. 단단한 곳에 함께 서서야 그 다음이 있다는 걸 이 이야기를 처음 썼을 때처럼 믿고 있습니다. - P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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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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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한 시대를 찬란하게 살아내기


여성과 여성의 유대에는 어딘가 잔잔한 처절함이 있다.


심시선이라는 여성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 소설은 조용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무어라고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나 확실히 남성주류의 글들에선 볼 수 없는 영민한 통찰력과 서글픔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대개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할머니'도 한때는 젊고 방황하는 영혼이었음을, 힘겨운 노력 끝에 꺾이지 않고 살아남은 이라는 것을 그려낸 부분이 장마다 등장해 벌써 고루해져버린 나의 인식을 흔들어 버렸달까.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아닌 심시선 여사는 이미 3대째를 내려온 이들에게 '할머니'라고 불리우나 그는 '할머니'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할머니이지만 동시대를 뚜렷히 앞서가던 사고방식을 보여주던 그. 자식이나 손주만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대개의 가부장제 하의 할머니의 모습을 넘어서서 그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투철하게 자신의 삶을 일궈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인물로부터 뻗어나간 가계또한 범상치 않아서, 심시선의 후손(?)들은 소설말미에 다같이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안 티츠 My small perky Hawaiian tits'를 보러간다.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해당 작품의 심시선의 젊은날의 나신을 담아낸 회화이기 때문이다. 작품성이든 뭐든 떠나 젊은 날의 할머니의 나신을 그려낸 작품을 본다는 것. 그러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불경과 패륜의 느낌을 자아내는 이 문장은 실제로 소설에서 이루어지며 가족들은 해당 작품 안에서 젊은날 할머니의 눈빛을 읽어낸다. 비록 그 작품이 할머니의 인생을 고단하게 만든 쓰레기같은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극중 독일의 유명 화가)가 남긴 것이었지만 말이다.


본 소설의 또다른 가치는 새로운 모계 가족 모델의 제시에 있다. 이것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가족의 구성 부터가 모계중심적이며 각 가족구성원이 수행하는 역할 또한 현 사회의 지배적인 가부장제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가족은 추진력있는 첫째딸 명혜의 진두지휘 하에 이루어지며 딸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들은 각자의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삶을 그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경처럼 등장하는 사위나 아들은 주인공보다는 조력자의 모습에 가깝다. 작가는 주로 잔잔하게 그리고 드물게 또렷하게 가부장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소설을 그려가는데 그런 모습들이 신선하면서도 서글픈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이 쉬워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모습임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완전히 내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읽는 동안 재밌었고 잔잔한 울림이 있었다.

제목인 '시선으로부터'에는 우리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냈음을 담아내는 중의적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혼자서 생각해본다.


심시선: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 렌즈요?
심시선: 아무리 똑똑해서 날고 긴다 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을 못 봐요.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 P20

"아무거나 집어서 좀 읽어."
난정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 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 P72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 P269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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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랜드 - 여자들만의 나라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5
샬롯 퍼킨스 길먼 지음, 황유진 옮김 / 아고라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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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를 상상하기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 겪어보지 않은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특권 아닐까?

이것은 가히 우리 존재의 의의를 확정짓는 것, 더 나아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19세기 미국 작가인 샬롯 퍼킨스 길먼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로, 세 명의 미국 남자가 여자들만 사는 나라 '허랜드'에 들어가 겪게 되는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내용 전개는 사건 위주라기 보다는 '허랜드'라는 국가에 대한 도감 내지는 백과사전 느낌이다. 중반부터는 아예 장 제목이 '관계', '종교와 결혼'으로 되어 있어 설명하고자 하는 소재가 제목으로 들어가 있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허랜드가 너무나도 완벽한 유토피아로 묘사되어 있는 부분이 조금 아쉽지만, 여자를 강인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그려낸 점이 아주 고무적이었다. 사실 우리가 사회에서 강요받는 여성성은 남성성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고 난 후에 피지배자의 특질을 여성성이라는 범주에 몰아넣은 것인데, 그러한 지점을 소설에서 명확히 지적하는 부분이 아주 통쾌하고 즐거웠다.

 

사실 여성성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언제쯤이면 사람들이 인지하게 될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여성성을 연기하면서도 참 굴욕적인 순간이 많았지만, 가장 나를 비참하게 하는 순간은 여성성을 연기하는 것이 더 이상 나에게 굴욕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이미 피지배층의 특질을 구현하는데 익숙해져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그 참담함이란!


명확히 차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피곤하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 여성 동지들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을 가진 우리들은, 차별이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유쾌한 글을 남겨가며 동시대와, 아직 만나보지 못한 후대의 동지들과 연대하고 함께 나아간다. 그 효과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 


아직도 차별은 사방에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만연히 존재하기에, '허랜드'와 같은 책들은 정말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 여자가 인간의 기본 값으로 인정되는 세계에서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은 샬롯 퍼킨스 길먼과 같은 뛰어난 작가들의 묘사 끝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본다.


강인하고 건강한 여자들이 인간의 기본 형태로 인정되고, 모든 여성이 자매애로 연대하며 사랑하는 사회... 마치 유니콘과 같은 이 사회, 아니 이 사회와 조금이라도 닮은 사회를 내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책으 읽다보면 일전에 보았던 미국의 모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처음엔 성별로 팀을 나눠 남자 여자로 게임을 진행했더니 여자 팀이 매우 압도적으로 남자 팀을 이겼다. 프로그램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다보니, 제작진은 여자 팀에 남자를 섞어 넣는 방향으로 룰을 바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 참가자들은 여자들끼리 있었을 때의 그 결속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아주 놀라운 사회실험이 아닐 수 없다. 쓸데없는 남자 한 명의 존재가 이렇게나 파괴적이라는 것을 이것만큼 잘 보여주는 예시도 없을 것이다. 


자매애는 평가절하당하고, 여자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끊임없는 중상모략 속에서 서로는 서로의 적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주입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성차별이나 성폭력 등, 여자라는 이유로 여자가 위해를 입은 사건에서 결국 피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압도적으로 우리 여자들인 경우가 많다.


나는 제발 우리 여자들이 단결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잊고 있던 강인한 정신을 스스로 깨치고 건강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회에 바로서길 바란다. 

잊혔던 자매애를 깨치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연대가 되는 사회가 오길 정말 절실히 바란다.



남자를 수호자, 보호자로 여기는 관습은 자취를 감췄다. 이 건장한 여자들의 경우 두려워할 남자가 존재하지 않으니 보호받을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안전한 나라에는 야생동물도 없었다. - P103

그들이 새로이 개척해야 했던 종교는 수많은 신과 여신 들이 등장하는 옛 그리스 종교와 상당히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과 약탈의 신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었고 점차 모신에만 전적으로 중점을 두게 됐다. 일종의 모신 범신론이 형성된 것이다. - P106

"왜 이렇게 우리를 가두어놓는 겁니까?"
"이렇게 젊은 여자들이 많은데 여러분이 자유롭게 다니는 건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테리는 무척 기뻐했다. 그 대답은 그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으나 그는 짐짓 내색하지 않으며 다시 물었다. "왜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신사들인걸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짓고 반문했다. "신사들은 늘 안전할까요?"
"우리 중 누군가가 이곳의 젊은 여자를 해치기라도 할 거란 말입니까?" 그는 ‘우리‘란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어머. 아니에요. 그 반대의 위험을 말한 거에요. 우리나라 여자들이 여러분을 다치게 할까 봐요. 혹시라도 여러분이 여자 하나를 다치게 하면 백만 명의 어머니를 상대해야만 할 테니까요." - P117

이곳의 종교는 탐구 정신을 지닌 이곳의 신도들에게 이성적인 근간, 즉 그들 사이에서 선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크나큰 ‘사랑이 신‘이란 개념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영혼이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더불어 늘 갈망하는 최대의 목적 의식을 주었다. 사랑받고 이해받고 있다는 축복의 느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명료하고 간단하며 이성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 P200

상상할 수 있는 지구상의 온갖 민족들의 결혼을 떠올려보면 여자의 피부가 검든, 붉든, 노랗든, 갈색이든, 희든, 여자가 무지하든 교육을 받았든, 순종적이든 반항적이든 상관 없이 인류 역사가 정립한 결혼 전통이 그녀 뒤에 버티고 서 있다. 이러한 전통이 여자를 남자에 종속시킨다. 남자는 자기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여자는 남편과 그의 일에 적응해간다. 국적의 경우에도, 이상하고 간교한 속임수로 여자는 자신이 태어난 곳, 사는 곳과 상관 없이 자동적으로 남편의 국적을 따르게 된다. - P209

테리가 몹시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여자들, 우리를 보며 생각하는 거라고는 부성애가 다야! 부성애! 남자는 오매불망 아버지가 되기만을 바라는 존재인 줄 안다니까."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폭넓고, 깊고, 풍부한 모성애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남성의 가치를 부성애로만 받아들였다. - P213

알다시피 미국에서는 여자를 가능한 남자와 다르게, 여성스럽게 만들어놓고 남자들은 남자들만의 세계를 구축해서 그 속에 살아간다. 그러다 극도의 남성성에 질릴 때면 기쁜 마음으로 여성성의 세계를 찾는다. 여자들은 최대한 여성스럽게 만들어놓음으로써 언제든 우리가 여성스러운 매력을 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허랜드의 분위기는 결코 유혹적이지 않았다. 늘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곳의 여자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인습적인 본능과 민족적 전통 때문에 엘라도어에게 여성스러운 반응을 얻기를 원하곤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서 멀어짐으로써 그녀를 더 갈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늘 여성적이지 않은 모습을 하고는 나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실 웃긴 일이었다. - P222

나는 뜨겁게 열망하는 ‘이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그녀는 고의적으로 내 의식 속에 ‘사실‘을 끼워놓았다. 내가 차분하게 즐긴 ‘사실‘은 실질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앨므로스 라이트 같은 남자 부류가 왜 여자들이 직업 능력을 개발해가는 것에 분개했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직업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여성스러움을 가리고 배제시키는 일이라, 성적 이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 P222

엘라도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그녀와 나는 여자에 대해 좋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우리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대부분의 여자들이 많은 한계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의 실용적인 능력을 존중하면서도 남자들이 그 능력을 남용해 가치를 떨어뜨린다. 여자들이 교묘하게 강요받는 선행을 행할 때 우리 남자들은 그녀들을 존중하지만 그 선함이 별볼일 없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아내들을 가장 편안한 하인으로 만들고 평생을 우리에게 매여 우리가 주는 대로 임금을 받으며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하고, 정성을 쏟아 우리 남자들 요구에 맞추도록 한다. 여자들이 어머니에게서 파생된 이러한 모든 역할을 해내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이 있을 곳인 가정에서, 여자들이 봉사해야 할 일들을 세세하게 명시한 조세핀 다스캠이 솜씨 있게 기술한 역할들을 수행하며 사는 여자만이 진정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 P240

이곳 허랜드 여자들은 우리가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매우 높이 우러러보면서 사랑해야 할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애완동물도, 하인도 아니었고, 소심하거나 경험이 없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남성 우월 의식-타고난 숭배자인 제프는 애초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고, 테리는 영영 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을 떨쳐버리고 나니 여자를 우러러보며 사랑하는 것이 아주 기분 좋은 일임을 깨닫게 됐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역사시대 이전의 희미한 옛 의식이 샘솟는 것 같은 묘한 느낌, 이곳 여자들이 옳다는 느낌, 여자를 우러러보는 게 옳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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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깨주의의 탄생 - 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보리 인문학 3
김희교 지음 / 보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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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함부로 말하는 중국, 아무도 말하지 않는 중국


왜 추천했는지 알것 같은 책. 차별이 만연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중국에 대한 너무나도 편향된 시각에 매몰되어 그것의 치우쳐져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살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이 책은 목차부터 굉장히 흥미로운데 특히나 '10부 한국 언론의 짱깨주의적 보도 테크닉'을 훑어보면 제목만으로도 얼마나 우리가 언론에 놀아났는지 눈에 보여 머쓱한 웃음이 터져나온다. 유일한 단점을 꼽자면 두껍고 무겁다는 것 ... 흥미로운 목차와는 별개로 많은 내용이 담겨있다보니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을 뿐더러 일단 기본적으로 600페이지가 넘어갈 정도로 양이 많고 방대하다. 한번 슥 읽고 넘어갈 책이 아니어서 평소보다 인용이 많지만 이것도 거르고 거른 것이라는 것. 사실 마지막에 가서는 지구력이 달려서 한장 한장 읽는 게 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올해 꼭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책을 꼽겠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몰아치는 삶 속에서 문득 고개를 들고 질문할 힘을 기른다는 것이다. 쏟아지는 정보와 프레임의 홍수 속에서 무차별적인 수용적 자세를 살짝 비틀어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 그런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책 아닐까 싶다.

키신저 협약은 구소련을 견제하고자 하는 정치권 전략이기도 했지만 전 지구를 단일 시장으로 묶어 미국 금융자본의 이익률을 제고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경제적 세계전략 중 하나였다. 중국은 국가 간 분업체계에 적합한 저임금 노동력과, 거대한 시장을 가지고 있어 미국 경제에 새로운 성장 동력음 제공해 줄 것으로 판단되었다. 닉슨은 "우리는 중국이 국제사회 밖에서 공상을 키우고, 미움을 품고, 이웃 국가들을 위협하도록 영원히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 작 은 지구 위에 10억 명이나 되는 잠재적 유용한 사람들이 분노의 고립상태 속에서 살아갈 공간은 없다"고 외치며 중국을 그들의 체제 내로 끌어들였다.
키신저 협약에 가장 빨리 반응한 것은 누구보다도 중국시장이 필요했던 일본이었다. 1972년 일본은 중일수교를 체결했다. 미중수교보다 7년이나 빨랐다. - P51

한중수교는 중일수교가 이루어진 지 약 20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졌다. 분단체제가 만든 반공주의가 키신저 시스템에 늦게 탑승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동아시아에서 키신저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샌프란시스코체제와 더불어 전후체제의 두 축이 완성되었다. - P51

키신저 시스템은 미국에게는 경제 위기에 처한 샌프란시스코체제 의 보완재였고, 중국에게는 문화대혁명 이후 난관에 봉착한 자립경제의 위기를 헤쳐 나갈 출구 중 하나였다. 일본과 한국에게는 거대한 중국시장과 저렴한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북한에게는 한국, 일본과 상대적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위기의 시대가 되었다. - P52

칭크는 그렇게 탄생했다. 짱깨주의를 영어로 번역한다면 ‘칭키즘(Chinkism)‘에 가깝다. 자본의 문제를 중국의 문제로 돌리고, 인종주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짱깨주의와 칭키즘은 차이가 있다. 짱깨주의는 ‘칭키즘‘에는 없는 신식민주의적 식민성이 들어 있다. 짱깨주의에는 민족이나 국가의 이익과 상관없는 종주국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복종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짱깨주의를 ‘반중감정‘이나 ‘혐중정서‘라고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뿐만 아니라 대항담론조차 형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식민의 언어 사용이다. 반중감정은 새롭게 부상하는 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여느 국가에서 볼 수 있다. 막연한 경계심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섞인 막연한 심리상태를 뜻한다. 혐중정서는 극대화된 반중감정의 일종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짱깨주의는 배타적 민족주의 정서뿐만 아니라 신식민주의적 유사인종주의가 들어 있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다. - P102

자본 앞에 국가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국의 론스타‘라고 부르지 않았다. 론스타가 미국회사라는 것을 알려면 인터넷에서도 검색을 몇 번 거쳐야 한다. 자본은 국적이 없는데 중국 자본에는 꼭 국가 이름을 붙인다. 그러려면 중국 정부는 중국의 자본을 완벽하게 통제한 다는 가설이 성립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피케티는 반성해야 한다. 그는 중국의 사적 자본이 70%에 달하고 그들은 이미 중국 정부의 통제선을 넘고 있으며, 앞으로 통제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본다. 《한겨레》도 유달리 중국 자본에만 국적을 붙인다. 부채의 덫이라는 프레임을 사용할 때 《한겨레》는 중국이 사적 자본을 완전하게 통제하는 국가라는 가정을 동원했다. 그러나 《한겨레》는 평소에 중국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에 완전히 장악당한 국가처럼 보도한다. - P200

신식민주의 권력이 여전히 강고하게 작동하는 한반도에서 과도한 유럽식 보편인권을 적용하여 중국을 바라보는 것은 진보적 결과를 이끌어 낼 가능성이 결코 높지 않다. 김누리 교수가 중국의 북한병합설에 동조하는 한 그가 한국의 중국 담론에서 할 수 있는 진보적 역할은 거의 없다. 한반도를 병합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와 할 수 있는 일은 싸우는 것이 전부이다. 신식민주의체제를 넘어서는 평화체제를 논할 수도 없다. 영토와 주권까지 병합하려는 중국보다 신식민주의를 운영하는 미국이 더 나은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동아시아는 중국의 조공책봉체제가 작동하는 시대가 아니라 미국의 신식민주의체제가 작동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지금 너도 나도 죽은 제갈공명과 싸우는 데 진심이다. 중국의 북한병합설도 그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상상된 중국‘과 싸우느라 신식민주의체제에 무관심하거나 방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 P213

이런 논지들의 주장은 한 가지 예측일 뿐이고 중국이 세계의 모델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한 가지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불분명한 미래의 일이라는 점이다. 설령 중국몽이 팽창주의 성격을 지닌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구현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
지금 중국의 외교적 지향을 평가하려면 중화도 아니고 패권도 아닌 전혀 다른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이 중화패권이라는 조악한 개념을 사용하여 중국의 행보를 설명하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중국을 북한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악의 축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전쟁에 동원하려는 공포 마케팅이다. 중국몽은 그런 공포를 자극하는 좋은 소재이다. - P230

실익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냉전체제로의 회귀가 국익이라는 경제적 이해관계로 따질 수 없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주권과 생존권, 그리고 삶의 질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해 한국의 보수언론이 미국 편에 서라고 주창한 시기에 SCMP는 "한국에서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재평가하고 한국이 군대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촉발"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의 관점이 아니라 한국의 관점에 서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바라보면 ‘미국 편에 서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미국이 언제든지 돌아설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대비해야 한다. 우리의 생존권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우리의 생존권을 지키는 것은 미국이 아니라 우리의 주권이다.
문정인 세종문제연구소 소장은 "미국도 중국도, 그 어느 쪽도 당장은 우리 입장을 보면서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데, 한국 보수언론들이 미국 편을 들라고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다. - P244

미국 환경단체 ‘198가지 방법‘이 지적한 대로 전 지구의 환경문제에 중국을 악마화시켜 대처하는 일은 실질적인 해결책을 만드는 데는 아무 도음이 되지 않는다. ‘중국발 미세먼지‘는 중국을 악마로 만들어 놓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무산시키고 문제를 험오로 대체하여 문제를 덮는다. 자본의 문제를 외부화하는 최상의 프레임이다. - P265

한국 언론은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을 가릴 것이 없이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난 관점으로 보도하는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마크 셀던이 "새로운 지역적, 지구적 관점과 아래로부터의 관점을 바탕으로 현대의 갈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겠다며 만든 《아시아-태평양 저널: 재팬 포커스(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나 그가 추천하는 《아시아타임즈》,《글로벌포스트》뿐만 아니라 지넷(Z-net), 트루스아웃(Truthout), 커먼드림스(Common Dreams), 카운터펀치(Counterpunch), 트루스딕(Truthdig), 워인콘텍스트(War in Context), 위키리크스(Wikileaks), 허핑턴포스트(The Huffington Post)와 같은 대안언론을 인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 P327

대안언론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입장과 관점에서 보도하는 언론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다. 24시간 영어로 방송하는 CCTV뿐만 아니라 CGTN, 알자지라, 러시아투데이, 텔레수르 들은 거의 참고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의 CIA와 연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소리(VOA, Voice of America), 자유라디오아시아(RFA, Radio Free Asia) 같은 매체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많다.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나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처럼 서구적 프레임에 선 단체의 입장도 여과 없이 보도한다. 한국 언론보도는 김성해 교수가 주장하듯 ‘정보 주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행정부, 군부, 싱크탱크, 학자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한국의 공론에 참여하고, 그들의 권위는 한국 언론이 높여 준다. 중국만 한정해서 살퍼보더라도 한국의 언론은 미국의 ‘중국 때리기‘ 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 P327

그러나 《환추스바오》의 이런 성향을 고려하더라도 한국 언론은 《환추스바오》의 목소리를 편집해서 활용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 언론에 인용되는 《환추스바오》의 목소리는 지나칠 만큼 늘 분노해 있고, 누군가를 공격하며, 거칠게 말하며, 틀에 박힌 언어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날마다 《환추스바오》를 구독해 보면 《환추스바오》는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다른 보도들이 많이 있고, 늘 공격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코로나19 때도 한국 언론이 《환추스바오》에 비난을 퍼부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환추스바오》는 "한국 힘 내"라는 응원 메시지를 신문에 실었다. - P338

신기하리만치 한국 진보진영에서 중국공산당을 바라보는 눈은 냉전시대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비판의 틀도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대의제가 곧 민주주의라는 형식적 민주주의 논리에 빠져 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란 자본주의와 민주의 타협이다. 대의제가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곧바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제도 속에는 늘 자본의 논리와 지배 엘리트들의 권력이 작동한다. 자본가나 지배 엘리트의 권력이 대의제를 장악할 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마이클 샌델이 쓴 책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는 엘리트와 엘리트주의가 장악한 대의제가 어떻게 비민주주의적으로 바뀌는가를 말하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자본의 대변인이 어떻게 대의제 민주주의를 붕괴시켜 나가는지를 보여 준다. - P423

중국의 일당제가 비민주주의라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유럽중심주의적 판단이다. 물론 일당제가 더 나은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니다. 둘 다 결과적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진보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중국은 지금 일당제 내에서도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논의의 핵심은 결과적 민주주의에 있다. 결과적으로 더 나은 민주주의를 낳을 수 있다면 일당제든 다당제든 상관없다. 지식계 내부에서는 어떤 정당 형태가 중국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가장 유리할지 논쟁이 한창이다. - P424

《시사인》의 김동인 기자는 2019년 2월 초 <대림동 고시원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이라는 르포 기사를 썼다. 학술적으로는 조선족 문제를 둘러싼 한국의 짱깨주의 문제를 지적해 온 논문이 몇 편 있지만 기자가 기사로 우리 안의 짱깨주의와 싸움을 벌인 것은 처음 보았다. 이 기사는 한국의 진보가 중국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이었다. - P429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는 미국의 IT 전문 인터넷 신문인 지디넷(ZDNet)의 한국지사이다. 이 매체는 다른 신문과 매우 다른 중국 보도 방식을 가졌다. 우선 《뉴욕타임스》나 SCMP식의 해설 기사가 거의 없다. 단순한 사실 보도를 중심으로 기사를 내보낸다. 해외 언론을 거의 베껴 보도하는 이른바 ‘복붙‘ 기사도 많지 않다. 스스로 어젠다를 찾고 취재하여 기사를 쓴다. 지금 한국의 언론 지형에서 볼 때 위와 같은 기사 작성의 기본 원칙만 지키더라도 상당히 좋은 기사가 나올 것이다. - P432

현재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는 대략 네 가지 층위의 민주로 구성되는 다면적 민주이다. 다면적 민주의 제1층위는 보편적 가치 층위이다. 국가와 인종을 넘어서 구현되어야 할 인간의 보편가치 영역이다. 두 번째는 주권의 층위이다. 국민국가 시대의 보편인권은 대개 국가 단위로 구현된다. 국가는 주권이라는 권력을 행사하며 보편권리를 보호하는 한편 국가 간의 폭력이나 구조적인 적폐를 청산해야 할 임무를 가진다. 세 번째 층위는 국가 간 체제의 층위이다. 대개 세계는 각각 다른 수준의 국가 권력과 다양한 주권의 형태를 가진 국가들이 양국 또는 지역으로 체제를 결성하여 국가 간 체제를 구성한다. - P462

UN과 같은 국제 규범 기구일 수도 있고, 식민지 시기 인도-영국처럼 지배 -피지배 관계일 수도 있고, 미일 동맹이나 한미동맹처럼 수직적 동맹체제일 수도 있고, 아세안이나 역내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처럼 다자협력체이거나 EU처럼 다자주의적 관계일 수도 있다. 네 번째는 글로벌 체제 층위이다.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자본주의체제의 영역이다. 부등가 교환 체계하의 노동 문제, 자본과 국가의 관계 문제, 글로벌 분업체계하의 환경문제 들이 이 영역의 문제에 속한다. - P462

자유주의 보편가치가 전유되면 모든 가치가 등질화된다. 보편가치 우선주의의 전유가 일어나면 일상의 가치와 주권의 문제, 국가 간 체제 의 문제, 글로벌 보편가치의 문제가 평면으로 나열되어 등질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키신저 시스템에서 한국은 내부의 정치 민주화에 너무 빨리 축배를 든 채 보편가치의 극대화에 치중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손흥민이 넣은 한 골이 한미군사훈련과 등질화된다. 조국 자녀의 표창장 문제가 이재용 삼성회장의 뇌물보다 더 큰 죄가 될 수도 있다.
등질화된 자유주의 보편가치가 중국에 적용될 때 발생하는 가장 대표적인 문제는 유럽중심주의 경향을 띤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는 로베르토 웅거가 개념화한 ‘제도적 물신숭배‘이다. ‘대의민주제, 시장경제, 자유로운 시민사회‘와 같은 틀을 구축하면 민주가 완성된다고 보는 제도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탈식민주의 싸움은 미뇰로의 주장대로 ‘보편성의 신화‘를 깨부수는 데서 시작 해야 한다. - P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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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 이야기장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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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적이면서도 가볍고 과감하면서도 재미있는 소설.

아니 무엇보다 너무 재밌다. 재밌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제목에서 짐작가다 시피 이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가부장제를 살짝 비틀어 父가 있어야 할 자리에 女, 즉 딸을 집어 넣어 전개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사실, 주인공 이슬아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문득 이 책이 이렇게 재미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만약 아들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 형태였다면 ? 재미있지 않다. 아니, 우린 너무 아들만을 숭배하고 쩔쩔매는 가족 형태를 익숙히 봐 왔다. 그것은 차기 가부장을 떠받드는 형태로 가부장제 그자체이며 예로부터 끊임없이 무한히 숨막히게 반복되고 있는 그것이다. 만약 母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족 형태였다면? 이건 좀 재미있어 보인다. 가족 내 위계서열 2위 내지는 3위(아들이 있을 경우 아들에게 2위 자리를 내어주므로)인 어머니가 위계의 정점에 서 있는 형태 또한 사회질서의 전복으로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이야기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면 딸은 가족의 위계서열에서 대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딸을 권력의 최정점에 놓아두고 전개되는 이 소설이 그저 가족의 일상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과감하고 전복적이며 독자들은 자꾸만 통쾌함을 느끼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딸이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녀장 이슬아는 자신의 모부 복희와 웅이를 직원으로 고용한다. 직장모드 일 때 그들은 서로 존대한다. 아주 낯설고 신선하면서도 재미있는 부분은 父인 웅이가 슬아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사용하는 부분이다.



그는 딸을 존경한다. 



딸을 존경하는 아빠. 30년이 넘는 평생 가부장제에 뇌가 절여진 나에게 아주 낯선 문장이다. '아내를 존경하는 남편' 보다 더 과감하고 낯설고 조금은 불경한 느낌도 주는 문장이다. 하지만 더욱이 그래서 한편으론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다. 나도 존경받을 수 있다는, 그동안 나 스스로조차 자신에게 제대로 된 존중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듯한 충격을 준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이 새로운 가족 형태는 오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 자꾸만 어딘가에 실존 할 것만 같다. 거짓인 걸 알면서도, 사실을 쓴 것만 같다. 꼭 마술적 리얼리즘 같다. 또 한편으론 가부장제와 가녀장의 차이점을 직시하게 한다. 가부장제에는 뚜렷한 위계질서와 그를 유지하기 위한 억압과 피지배가 존재하지만 가녀장은 아니다. 쓰는 언어의 형태부터가 다르다. 가녀장제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대한다. 물론 그 사이에 위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호 존중과 배려로 유지된다. 가녀장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호존중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 더 나아가 자연으로까지 확장된다. 그들은 식당 종업원을 존중하며 육식을 지양한다.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복회는 음식을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 슬아는 복희의 재능을 사서 누린다. 복희는 가장 잘하는 일로 돈을 번다. - P40

한 고생이 끝나면 다음 고생이 있는 생이었다. 어떻게 자라야겠다고 다짐할 새도 없이 자라버리는 시간이었다.
고단한 생로병사 속에서 태어나고 만난 당신들. 내 엄마를 낳은 당신들. 해가 지면 져녁상을 차리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당신들. 계속해서 서로를 살리는 당신들.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명력이 그들에게서 엄마를 거쳐 나에게로 흘러왔다.
알 수 없는 이 흐름을 나는 그저 사랑의 무한반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들이 나의 수호신들 중 하나였음을 이제는 알겠다. 기쁨 곁에 따르는 공포와, 절망 옆에 깃드는 희망 사이에서 계속되는 사랑을 존자씨와 병찬씨를 통해 본다 - P108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겼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 P109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만오천 원을 천오백 원으로... ..."
공식적으로 띨띨이가 된 슬아가 회한 속에서 스티커를 붙이며 변명한다.
"같은 책을 계속해서 편집하다보면 뭐가 뭔지 모르게 돼... ...눈이 낡아서... ..." - P169

웅이가 잠자코 들으며 못을 박는다. 그는 문득 호시절을 지나고 있음을 느낀다. 딸에겐 젊음과 능력이 따르고 자신에겐 체력과 연륜이 따르는 이 시절. 별다른 슬픔 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이 시절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영원할 리 없다. 딸과 함께 흘러온 삼십 년이 웅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찰나 같은 과거와 도통 모르겠는 미래를 생각하다가 웅이가 입을 연다.

"남자를 만날 거면, "

나사를 조이며 덧붙인다.

"너를 존경할 줄 아는 애를 만나." - P279

그렇게 말해놓고 웅이는 생각에 잠긴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자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웅이가 알기로 여자를 존경할 줄 아는 남자는 잘 없다. 웅이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다. 웅이는 불현듯 지난 동창회를 떠올린다.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내가 다 맞춰준다는 말 같은 게 아니었다.
슬아가 대꾸한다.

"보통은 나보고 존경하라고 하던데, 남자를요."
"너는 누구든 잘 존경하잖아."

웅이는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표현한다. 실은 내가 너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 P279

밤이 깊어간다. 서로가 서로의 수호신임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들은 종교의 근처를 배회한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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