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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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참한 시대를 찬란하게 살아내기


여성과 여성의 유대에는 어딘가 잔잔한 처절함이 있다.


심시선이라는 여성으로부터 뻗어져 나온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 소설은 조용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무어라고 결론을 내리기 어려우나 확실히 남성주류의 글들에선 볼 수 없는 영민한 통찰력과 서글픔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대개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할머니'도 한때는 젊고 방황하는 영혼이었음을, 힘겨운 노력 끝에 꺾이지 않고 살아남은 이라는 것을 그려낸 부분이 장마다 등장해 벌써 고루해져버린 나의 인식을 흔들어 버렸달까.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아닌 심시선 여사는 이미 3대째를 내려온 이들에게 '할머니'라고 불리우나 그는 '할머니'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할머니이지만 동시대를 뚜렷히 앞서가던 사고방식을 보여주던 그. 자식이나 손주만을 바라보며 늙어가는 대개의 가부장제 하의 할머니의 모습을 넘어서서 그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투철하게 자신의 삶을 일궈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인물로부터 뻗어나간 가계또한 범상치 않아서, 심시선의 후손(?)들은 소설말미에 다같이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안 티츠 My small perky Hawaiian tits'를 보러간다.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해당 작품의 심시선의 젊은날의 나신을 담아낸 회화이기 때문이다. 작품성이든 뭐든 떠나 젊은 날의 할머니의 나신을 그려낸 작품을 본다는 것. 그러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불경과 패륜의 느낌을 자아내는 이 문장은 실제로 소설에서 이루어지며 가족들은 해당 작품 안에서 젊은날 할머니의 눈빛을 읽어낸다. 비록 그 작품이 할머니의 인생을 고단하게 만든 쓰레기같은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극중 독일의 유명 화가)가 남긴 것이었지만 말이다.


본 소설의 또다른 가치는 새로운 모계 가족 모델의 제시에 있다. 이것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가족의 구성 부터가 모계중심적이며 각 가족구성원이 수행하는 역할 또한 현 사회의 지배적인 가부장제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가족은 추진력있는 첫째딸 명혜의 진두지휘 하에 이루어지며 딸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들은 각자의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삶을 그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경처럼 등장하는 사위나 아들은 주인공보다는 조력자의 모습에 가깝다. 작가는 주로 잔잔하게 그리고 드물게 또렷하게 가부장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드러내며 소설을 그려가는데 그런 모습들이 신선하면서도 서글픈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그려내는 가족의 모습이 쉬워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모습임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완전히 내취향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읽는 동안 재밌었고 잔잔한 울림이 있었다.

제목인 '시선으로부터'에는 우리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냈음을 담아내는 중의적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혼자서 생각해본다.


심시선: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 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 렌즈요?
심시선: 아무리 똑똑해서 날고 긴다 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우리가 보는 것을 못 봐요. 대화는 친구들이랑 합니다. 이해도 친구들이랑 합니다. - P20

"아무거나 집어서 좀 읽어."
난정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동의할 만한 사람들과 밤새 책 이야기나 하고 싶었다. - P72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 - P269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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