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랜드 - 여자들만의 나라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5
샬롯 퍼킨스 길먼 지음, 황유진 옮김 / 아고라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미지를 상상하기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 겪어보지 않은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지능을 가진 생명체의 특권 아닐까?

이것은 가히 우리 존재의 의의를 확정짓는 것, 더 나아가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19세기 미국 작가인 샬롯 퍼킨스 길먼의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소설로, 세 명의 미국 남자가 여자들만 사는 나라 '허랜드'에 들어가 겪게 되는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내용 전개는 사건 위주라기 보다는 '허랜드'라는 국가에 대한 도감 내지는 백과사전 느낌이다. 중반부터는 아예 장 제목이 '관계', '종교와 결혼'으로 되어 있어 설명하고자 하는 소재가 제목으로 들어가 있다.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허랜드가 너무나도 완벽한 유토피아로 묘사되어 있는 부분이 조금 아쉽지만, 여자를 강인하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그려낸 점이 아주 고무적이었다. 사실 우리가 사회에서 강요받는 여성성은 남성성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하고 난 후에 피지배자의 특질을 여성성이라는 범주에 몰아넣은 것인데, 그러한 지점을 소설에서 명확히 지적하는 부분이 아주 통쾌하고 즐거웠다.

 

사실 여성성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언제쯤이면 사람들이 인지하게 될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여성성을 연기하면서도 참 굴욕적인 순간이 많았지만, 가장 나를 비참하게 하는 순간은 여성성을 연기하는 것이 더 이상 나에게 굴욕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였다. 이미 피지배층의 특질을 구현하는데 익숙해져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그 참담함이란!


명확히 차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피곤하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 우리 여성 동지들이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을 가진 우리들은, 차별이 짓누르는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유쾌한 글을 남겨가며 동시대와, 아직 만나보지 못한 후대의 동지들과 연대하고 함께 나아간다. 그 효과가 바로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 


아직도 차별은 사방에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만연히 존재하기에, '허랜드'와 같은 책들은 정말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세계, 여자가 인간의 기본 값으로 인정되는 세계에서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은 샬롯 퍼킨스 길먼과 같은 뛰어난 작가들의 묘사 끝에서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본다.


강인하고 건강한 여자들이 인간의 기본 형태로 인정되고, 모든 여성이 자매애로 연대하며 사랑하는 사회... 마치 유니콘과 같은 이 사회, 아니 이 사회와 조금이라도 닮은 사회를 내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을까? 책으 읽다보면 일전에 보았던 미국의 모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처음엔 성별로 팀을 나눠 남자 여자로 게임을 진행했더니 여자 팀이 매우 압도적으로 남자 팀을 이겼다. 프로그램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다보니, 제작진은 여자 팀에 남자를 섞어 넣는 방향으로 룰을 바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 참가자들은 여자들끼리 있었을 때의 그 결속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아주 놀라운 사회실험이 아닐 수 없다. 쓸데없는 남자 한 명의 존재가 이렇게나 파괴적이라는 것을 이것만큼 잘 보여주는 예시도 없을 것이다. 


자매애는 평가절하당하고, 여자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끊임없는 중상모략 속에서 서로는 서로의 적이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주입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성차별이나 성폭력 등, 여자라는 이유로 여자가 위해를 입은 사건에서 결국 피해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압도적으로 우리 여자들인 경우가 많다.


나는 제발 우리 여자들이 단결하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잊고 있던 강인한 정신을 스스로 깨치고 건강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회에 바로서길 바란다. 

잊혔던 자매애를 깨치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연대가 되는 사회가 오길 정말 절실히 바란다.



남자를 수호자, 보호자로 여기는 관습은 자취를 감췄다. 이 건장한 여자들의 경우 두려워할 남자가 존재하지 않으니 보호받을 필요가 없었고 그들의 안전한 나라에는 야생동물도 없었다. - P103

그들이 새로이 개척해야 했던 종교는 수많은 신과 여신 들이 등장하는 옛 그리스 종교와 상당히 비슷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과 약탈의 신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었고 점차 모신에만 전적으로 중점을 두게 됐다. 일종의 모신 범신론이 형성된 것이다. - P106

"왜 이렇게 우리를 가두어놓는 겁니까?"
"이렇게 젊은 여자들이 많은데 여러분이 자유롭게 다니는 건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들은 테리는 무척 기뻐했다. 그 대답은 그도 미루어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으나 그는 짐짓 내색하지 않으며 다시 물었다. "왜 걱정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신사들인걸요."
그녀는 다시 한 번 미소를 짓고 반문했다. "신사들은 늘 안전할까요?"
"우리 중 누군가가 이곳의 젊은 여자를 해치기라도 할 거란 말입니까?" 그는 ‘우리‘란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얼른 대답했다. "어머. 아니에요. 그 반대의 위험을 말한 거에요. 우리나라 여자들이 여러분을 다치게 할까 봐요. 혹시라도 여러분이 여자 하나를 다치게 하면 백만 명의 어머니를 상대해야만 할 테니까요." - P117

이곳의 종교는 탐구 정신을 지닌 이곳의 신도들에게 이성적인 근간, 즉 그들 사이에서 선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크나큰 ‘사랑이 신‘이란 개념을 제시해주었다. 또한 영혼이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었고 더불어 늘 갈망하는 최대의 목적 의식을 주었다. 사랑받고 이해받고 있다는 축복의 느낌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명료하고 간단하며 이성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 P200

상상할 수 있는 지구상의 온갖 민족들의 결혼을 떠올려보면 여자의 피부가 검든, 붉든, 노랗든, 갈색이든, 희든, 여자가 무지하든 교육을 받았든, 순종적이든 반항적이든 상관 없이 인류 역사가 정립한 결혼 전통이 그녀 뒤에 버티고 서 있다. 이러한 전통이 여자를 남자에 종속시킨다. 남자는 자기 삶의 방식을 고수하고, 여자는 남편과 그의 일에 적응해간다. 국적의 경우에도, 이상하고 간교한 속임수로 여자는 자신이 태어난 곳, 사는 곳과 상관 없이 자동적으로 남편의 국적을 따르게 된다. - P209

테리가 몹시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이 여자들, 우리를 보며 생각하는 거라고는 부성애가 다야! 부성애! 남자는 오매불망 아버지가 되기만을 바라는 존재인 줄 안다니까."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폭넓고, 깊고, 풍부한 모성애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남성의 가치를 부성애로만 받아들였다. - P213

알다시피 미국에서는 여자를 가능한 남자와 다르게, 여성스럽게 만들어놓고 남자들은 남자들만의 세계를 구축해서 그 속에 살아간다. 그러다 극도의 남성성에 질릴 때면 기쁜 마음으로 여성성의 세계를 찾는다. 여자들은 최대한 여성스럽게 만들어놓음으로써 언제든 우리가 여성스러운 매력을 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허랜드의 분위기는 결코 유혹적이지 않았다. 늘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곳의 여자들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인습적인 본능과 민족적 전통 때문에 엘라도어에게 여성스러운 반응을 얻기를 원하곤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서 멀어짐으로써 그녀를 더 갈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늘 여성적이지 않은 모습을 하고는 나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실 웃긴 일이었다. - P222

나는 뜨겁게 열망하는 ‘이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그녀는 고의적으로 내 의식 속에 ‘사실‘을 끼워놓았다. 내가 차분하게 즐긴 ‘사실‘은 실질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앨므로스 라이트 같은 남자 부류가 왜 여자들이 직업 능력을 개발해가는 것에 분개했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직업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여성스러움을 가리고 배제시키는 일이라, 성적 이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 P222

엘라도어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그녀와 나는 여자에 대해 좋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우리 남자들은 마음속으로 대부분의 여자들이 많은 한계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의 실용적인 능력을 존중하면서도 남자들이 그 능력을 남용해 가치를 떨어뜨린다. 여자들이 교묘하게 강요받는 선행을 행할 때 우리 남자들은 그녀들을 존중하지만 그 선함이 별볼일 없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아내들을 가장 편안한 하인으로 만들고 평생을 우리에게 매여 우리가 주는 대로 임금을 받으며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하고, 정성을 쏟아 우리 남자들 요구에 맞추도록 한다. 여자들이 어머니에게서 파생된 이러한 모든 역할을 해내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이 있을 곳인 가정에서, 여자들이 봉사해야 할 일들을 세세하게 명시한 조세핀 다스캠이 솜씨 있게 기술한 역할들을 수행하며 사는 여자만이 진정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 P240

이곳 허랜드 여자들은 우리가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매우 높이 우러러보면서 사랑해야 할 여자들이었다. 그녀들은 애완동물도, 하인도 아니었고, 소심하거나 경험이 없지도, 약하지도 않았다.
남성 우월 의식-타고난 숭배자인 제프는 애초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고, 테리는 영영 이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을 떨쳐버리고 나니 여자를 우러러보며 사랑하는 것이 아주 기분 좋은 일임을 깨닫게 됐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역사시대 이전의 희미한 옛 의식이 샘솟는 것 같은 묘한 느낌, 이곳 여자들이 옳다는 느낌, 여자를 우러러보는 게 옳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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