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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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와 함께한다는 것.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하다가, 오웬과 마일라가 떠올라 저렇게 제목을 적었다. 책을 덮고 난 지금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은 주인공보다는 마일라이다. 태린과 파로딘은... 좀 받아들이기 힘들었달까. 무엇보다 자꾸만 파로딘의 묘사에서 중년의 날카롭고 피곤하지만 나른한 인상의 '남성'이 자꾸만 떠올라서... 


결론적으로 몹시도 참신한 소재였으나 내용의 결이 나와는 잘 맞지 않아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동안 김초엽 작품에 끌렸던 이유는 소재의 남다름도 있었지만 작품 내에서의 여성 캐릭터의 활용이 여타 작품과는 다른 양상을 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안에서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인간으로 존재하고, 행동하고, 삶을 헤쳐나간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캐릭터 사이의 미묘한 기류는 입을 틀어막고 떨리는 가슴으로 책장을 넘기게 하는 주요 동력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여성캐릭터 간의 에로스적 감정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오히려 흥미가 식어버렸달까. 게다가 둘이 같은 성별이었기에 망정이지 파로딘이 남자였다면 그들의 관계를 굉장히 불편하게 느꼈을 거란 확신 또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소재 자체는 항상 그러하듯이 놀랍다. 이렇게 방대하고 구체적인 세계관을 책 한권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차라리 책의 분량을 늘리고, 서사를 조금 다르게 풀어나갔으면 어땠을까. 한편으로는 범람화된 세계를 창조해내면서 작가가 느꼈을 즐거움과 황홀함이 짐작되기도 하니, 책 하나로 뻗어나가는 생각의 가지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작품 자체에 그렇게 몰입하지 못해서 쓸 말이 많이 남진 않는다. 읽고 나서도 후기를 적는 데까지 시간이 꽤나 걸려버려, 태린의 여정의 끝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허탈함도 흐릿한 윤곽만 남긴 채 날아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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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인간실격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120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소영 옮김 / 미르북컴퍼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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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한 인간의 기만적 붕괴



부족한 것 없는 유복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요조가 자신의 기민하고 유약한 자아를 건사하지 못하고 끝내 파멸로 굴러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덧붙여야 할까. 사실 초반에 나는 주인공의 감정적 묘사가 너무 극적이다 못해 너무 과해 작가가 이러한 성격의 인간상을 조롱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주인공은 그야말로 타인이 보내는 눈빛 하나에도 뜨끔하고 전전긍긍해하며 자기만의 소설을 지어내는 여리디여린, 너무나 조심스럽고 유약한 인간이다. 단단하지 못한 인간의 자아는 어떻게 물리적 풍요로움을 거슬러 스스로를 붕괴시키는가.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사실, 옛날에 쓰인 책들을 읽다보면 아무리 명작으로 꼽는 책이어도 현대의 감성으로는 쉬이 받아들이기 힘든 작품들이 많다. 아마 인간실격도 그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명작의 반열에 오르게 된 데에는 뭔가 거창해보이는 저 제목이 한몫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미약한 자아를 올바로 세우지 못하고 대중에 표류하며 피해의식에 의식을 지배당한 사람들 상당수의 호응도 한 몫 했겠지. 굳이 추려보자면 몇 가지 울림을 줄 듯한 문장도 있긴 하였으나 그리 길게 감상을 쓸 것이 못되긴 한다. 


풍요는 인간에게 독이 되는가. 

주인공 요조의 인간에 대한 두려움, 삶에 대한 우울과 고통은 어쩌면 그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느끼지 않았을 것들인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종류의 우울과 고통을 느꼈을 테지만 그것은 주로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한 것이었을 테고, 지금처럼 회피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모든 것의 결정에 남의 기준을 우선시하는, 그러면서 스스로 고통받는 그런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꼬일 대로 꼬여 고통받는 인간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가끔 난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 인간이 성장하기 위한 것은 어느정도의 결핍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요조라는 인물은 이러한 내 생각의 방증이 아닐까 싶다.


책에서 계속되는 요조의 여성편력과 이중잣대, 그리고 오히려 불쌍한 것은 희생된 여성들이라는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니 하지 않겠다. 


인터넷 댓글에서 그런말을 본 적이 있다. 하나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가 흘리는 눈물보다 10개 중 9개를 가진 부자가, 1개를 가지지 못해 흘리는 눈물이 더 진실되고 처절하다는 말. 요조를 보면 그런 느낌이 난다. 모든 것을 가진, 풍요로움 속에 서 있는 인간은 그래서 고상할 수 있고 그래서 고뇌할 수 있다. 그에게는 먹고산다는 일상의 일차원적인 욕구가 충족되므로, '삶'이라는 좀더 고차원적이어 보이는 무언가를 고상하게 논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화려하게 차려진 진수성찬 앞에서 자살을 논했다는 어느 철학자의 이야기에서처럼 우습고, 기만적이다. 그래, 기민한 인간의 기만적인 삶의 붕괴. 그것이 이 소설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아마 다케이치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악마의 예언이었음을 저는 훗날 깨닫게 됩니다. 제가 누구에게 반하건 누가 제게 반하건, 이 반한다는 말은 너무도 천박하고, 분별없고, 그야말로 자아도취적인 느낌이라 제아무리 ‘엄숙한‘자리라도 그 자리에서 이 말 한 마디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면 순식간에 우울의 사원이 무너지고 그저 밋밋한 폐허가 되어 버릴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자꾸 내게 반해서 오는 괴로움‘같은 속된 표현이 아니라, ‘사랑받는 불안‘같은 식의 문학적인 표현을 쓰면 또 우울의 사원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참 묘한 노릇입니다. - P33

"요조, 네가 날 도와줄 거지? 그렇지? 이런 집 따위, 같이 나가 버리는 게 나아. 도와줘, 도와줘, 응?"
아네사는 그렇게 격한 말을 내뱉고는 다시 울었습니다. 저야 여자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는 게 처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네사 누나의 과격한 말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그 진부하고 알맹이 없는 내용에 김빠진 기분으로 가만히 이부자리에서 나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감을 깎은 다음 한 조각을 아네사 누나에게 건네줬습니다. 그러자 아네사 누나는 흐느껴 울면서 그 감을 먹고서 말했습니다.
"뭐 좀 재미있는 책 없어? 빌려 줘." - P37

저는 넙치의 집을 나와 신주쿠까지 걸어가서 품고 있던 책을 팔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역시막막해졌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지만 ‘우정‘이라는 것은 한 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습니다. 호리키처럼 노는 친구는 별개로 치더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제게 그저 고통만 줄 뿐이고, 그 고통을 덜어 보겠다고 열심히 광대 짓을 하다 보면 도리어 기진맥진 녹초가 됩니다. 결국 몇 되지도 않는 지인들의 얼굴을, 그들과 비슷하게 닮은 얼굴조차도 오다가다 마주치면 심장이 철렁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불쾌한 전율에 휩싸이는 형편인 걸 보면, 저는 남들이 저를 좋아해 준다는 건 알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하기는 세상 사람들 역시 진정한 ‘사랑‘의 능력이 있는지 큰 의문이긴 합니다.) - P91

"그나저나 네 여성 편력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는 세상이 용납 못 해."
세상이라니 어떤 세상을 말하는 걸까요. 인간의 복수형을 말하는 걸까요. 대체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단 말인지. 어쨌거나 강하고 모질고 무서운 곳이라고만 생각하며 지금껏 살아온 그 세상인데, 호리키의 말을 듣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가 말하는 세상이란 건, 널 말하는 거 아니야?‘ - P104

하지만 그때 이후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다.‘라는 철학 비슷한 것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이란 한 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기 시작한 뒤부터 저는 이전까지보다는 그나마 조금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즈코의 말을 빌리자면 저는 조금 떼쟁이가 되었고, 흠칫흠칫 겁도 먹지 않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호리키의 말을 빌리자면 이상하게 인심이 박해졌답니다. 또 시게코의 말을 빌리자면 시게코를 그다지 귀여워해 주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 P105

세상. 저도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기 시작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개인과 개인 간의 싸움이며, 당장 그 자리에서만의 싸움이며, 게다가 그 자리에서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다.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노예도 노예 나름의 비굴한 보복을 한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그 자리에서 벌어지는 한판 승부에 기댈 밖에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의 명분을 부르짖고는 있지만 노력의 목표는 반드시 개인, 개인을 뛰어넘어 다시 또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환영에 겁먹고 벌벌 떨던 데서 조금은 해방되어 예전만큼 끝없이 눈치보는 일 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적당히 뻔뻔하게 처신하는 기술을 몸에 익힌 것입니다. - P110

"아니야, 이제 필요 없어."
정말 드문 일이었습니다. 누가 권하는 것을 거부한 일은 그때까지 제 인생에서 그때가 유일했습니다. 제 불행은 거부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 것을 거부하면 상대의 마음에나 제 마음에나 영원히 메울 수 없는 커다란 골이 생길 것 같은 공포심에 떨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반미치광이가 되어 그토록 원하던 모르핀을 아주 자연스럽게 거부했습니다. 요시코의, 말하자면 ‘신(神)과도 같은 무지‘에 감동받았던 걸까요. 저는 그 순간, 이미 중독에서 벗어났는지도 모릅니다. - P150

‘폐인‘이란 아무래도 희극 명사인 모양입니다. 잠을 자겠다고 설사약을 먹고, 그나마도 그 설사약 이름이 헤노모틴이라니. 지금 저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세상에서 딱 하나 진리 같다고 느낀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저는 올해 스물일곱이 됩니다. 흰머리가 부쩍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이 넘은 나이로 봅니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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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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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을 여는 첫 책. 

시지프 신화는 이방인을 읽는 참고서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방인을 읽으면서 아리송했던 부분들이 시지프 신화에서는 길고 아리송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이 풀어져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독립생활을 시작하면서, 죽음과 삶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습관적으로 고민해본 끝에 내린 결론과 시지프신화에서의 결론이 유사해 아주 흥미롭다고 하겠다. 아니 생각해보면 신이 죽은 사회에서 현대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정적이지 않나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한번뿐인 이 삶 뿐이고 이 삶을 자의적으로 끝내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본인이 삶을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하나뿐인 삶에 충실하는 것밖에 더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작년 말 이방인을 읽고 나서 다 해버렸기에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해한 비유와 설명이 가득한 시지프신화 였지만 그렇기에 군데군데 이해가 가는 부분이 등장할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사막과도 같은 척박한 사유의 공간에서 부조리를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그 부조리를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인간. 그래, 그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다.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2년 전에... 그때 내가 내린 결론도 비슷하다. 비슷하게 고독을 끌어안고 공허에 서 있는 것. 공허에 서서 현재 삶에 충실하는 것. 앞으로 마주할 삶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도 그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삶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의 경중을 가릴 수 없을때, 나는 곧잘 죽음을 떠올린다. 삶만큼이나 너무나 당연한 존재, 항상 우리의 곁에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면, 종종 나를 옭아매는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삶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서글픈 느낌을 자아낸다. 콕 집어낼 수 없는 이 느낌은 꼭 이 거대한 우주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는 결국 혼자고, 나를 포함한 이 세계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는 날까지 이런 서글픈 행복을 끌어안고 갈 것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의,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음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우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니체가 주장했듯이, 철학자가 존경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머릿속에서 분명해지도록 하려면 그것들을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 P15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몸짓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첫째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 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을 본능적으로라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 P19

모든 위대한 행동, 모든 위대한 사상은 그 시작이 하찮다. 위대한 작품은 흔히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혹은 어느 식당의 회전문을 지나가다가 착상한 것이다. 부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략)

무대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이 끝날 때 느껴지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 P29

사실 그가 느끼는 것은 오직 그것,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죄뿐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스스로에 요구하는 바는 오직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살고, 실재하는 것으로써 자족하고, 확실치 않은 것이라면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그에게 응수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가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확실성이다. 즉 그는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 것이다. - P82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 버린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려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 나는 추락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자살자의 반대, 그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다. - P84

이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편협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을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인간적 오만이 펼쳐 보이는 그 광경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다. - P85

부조리는 인간의 극단적인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귀결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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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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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추로 완성되는 삶이라는 행복



 글쎄. 뭐랄까. 책의 절반가량이 역자의 작품해설이었는데 차라리 작품해설을 읽기 전에 감상을 써 두었으면 좀더 작품 자체에 대한 진솔한 감상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작품해설을 읽음으로써 책의 어느 부분은 좀더 납득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여간 이 책은 시작부터가 아주 무미건조하고 강렬한데 1부내내 지속되는,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일상에 지쳐 스스로에게조차 무관심한 뫼르소의 태도는 아주 인상적이다 못해 충격적이다. 하지만 한발 물러서 돌아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현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그는 나의 모습일지도. 사실 그의 모습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현실에 존재하는 죽음을 인지한 사람의 시각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관념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현존하는 죽음. 나에게 닥치는 죽음. 지금 숨쉬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위태롭게 평화로운 일상을 언제든지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죽음 말이다. 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은 빛을 바래고, 어떠한 것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차이는 묵살당해 버린다. 어짜피 내가 죽는다면, 지금이든 언제든 그 무엇을 한들, 아니면 하지 않는 들 무슨 소용이랴? 나의 죽음이라는 유일하고도 확고부동한 불변의 진실 앞에서는 삶의 모든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이러한 연고로 1부에서의 뫼르소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마저도 그는 이방인처럼 군다. 오히려 삶의 추상적인 의미따윈 생각하지 않으므로 뫼르소를 움직이는 동력은 순간의 즐거움(전차를 향해 달리기, 마리 만나기 등)이다.


 하지만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삶까지 무력하게 살아야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우리는 어짜피 태어났고, 어쨌든 죽을거고, 그리고 그 사이 공백을 살아내야 한다. 아니 사실, 우리가 죽는다는 실로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삶은 이전보다 더 풍요로울 수 있다. 더 살아낼 가치가 있는 무엇인가가 될 수 있다. 실로 낮에 빛나는 촛불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촛불이 더 밝게 타오르듯이, 죽음이라는 뿌리를 깊고 무겁게 드리우고 나서야 실로 살아있는 순간이 기쁨으로 타오르지 않을까?

1부내내 무관심함으로 일관하던 뫼르소 또한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죽음이라는 두껍고 육중한 무게를 깨닫고 나서야 본인이 매 순간 행복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삶의 막바지에서도 미래를 꿈꾸었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다.






 책의 뒷부분 작품해설란에 보면 이 책은 또한 현실 재판등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이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사실상 2부에서 당사자인 뫼르소는 제3자마냥 배제된 채 재판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자인 김화영씨가 작품해설란에 잘 적어두었으니 내가 동일 내용을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여하튼, 파리로 떠나기 전에 프랑스 작가의 책을 한권 읽어보고자 한 선택이었는데 가슴 절절하게 울리는 내용은 없었으나 죽음과 삶을 둘러싼 무미건조함과 행복에의 깨달음이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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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살
이태제 지음 / 북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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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하는 폭력에 잠식당한 인간, 그리고 디스토피아


처음 책을 접한 것은 몇 개월 전이었나 알라딘 홈페이지에서였는데, 책 표지를 보자마자 너무 흥미로워 보여서 이 책은 꼭 읽어야지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스포당하는 걸 별로 안좋아해서 책이든 영화든 아주 최소한의 정보만 가지고 읽기(보기)시작하는데 푸른 살도 마찬가지로 '푸른 살의 창궐로 인해 범죄가 사라진 지구, 인류는 정말 도덕적으로 진화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소개 문장(?)정도만 보고 흥미롭겠다고 판단했었다. 


결론은 그래도 꽤 재미있다. 작가님의 데뷔작이라고 하니 부분부분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의 거친 부분이 보이나 소재도 흥미롭고 부분부분 장면이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연상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작가의 말을 보니 처음 작품의 1/3을 들어냈다고 하는데 다시금 여백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달까. 소설을 읽으면서도 너무 인물의 내면이나 기타 여러가지 상황에 대해 설명이 너무 많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이미 한차례 덜어낸 후라고 하니... 한편으론 작품은 작가가 쓴 것이지만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은 후부터는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닌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을 쓰는 인고의 시간동안 작가는 본인이 안내하는 길로 독자가 작품을 즐기길 바랐겠지만 그것은 마치 자식이 본인의 뜻대로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 만큼이나 어려운 것 아닐까. n년동안 몇 개의 팬픽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독자가 샛길로 빠져나가 자신만의 상상력을 구축할 여지를 없애버린 글은 읽는 이의 흥미를 급격하게 하락시키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독자가 혹시라도 궁금할까봐, 아니면 길을 벗어날까 봐 빼곡히 적어넣은 작가의 설명이 때론 글 자체를 읽기 피곤하게 만든다. 마치 사람이 빼곡한 관광지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책 내용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흥미로운 소재이기도 하고 넷플릭스 영화화를 한다면 꽤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다. 다만 결말이 조금 아쉬운데 아이버스터가 갑자기 참회하고 본인의 목적을 전면수정하여 누나의 뜻에 따르는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편으로 길게 인물의 서사를 따라갔으면 납득이 수월하였으려나? 어쨌든 이 한권의 책으로 아이버스터라는 인물을 접한 나에겐 여전히 너무 결말이 허무하지 않았나 싶다. 차라리 초반부터 불행한 복선을 잔잔하게 깔아놓고 마지막에 전 인류를 터뜨리는 방법으로 결말이 났어도 괜찮지 않나 싶다. 그러고 나서 에필로그에 그 대재앙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결말을 맺었으면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몇 년 후가 될지 모르겠지만 후속작품의 여지도 있고 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쨌든 재밌는 책이고, 소재만으로도 여러가지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어서 좋았다. 



드레스덴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상대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듯이.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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