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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6월
평점 :
2024년을 여는 첫 책.
시지프 신화는 이방인을 읽는 참고서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방인을 읽으면서 아리송했던 부분들이 시지프 신화에서는 길고 아리송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이 풀어져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독립생활을 시작하면서, 죽음과 삶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습관적으로 고민해본 끝에 내린 결론과 시지프신화에서의 결론이 유사해 아주 흥미롭다고 하겠다. 아니 생각해보면 신이 죽은 사회에서 현대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정적이지 않나 싶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한번뿐인 이 삶 뿐이고 이 삶을 자의적으로 끝내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본인이 삶을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하나뿐인 삶에 충실하는 것밖에 더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작년 말 이방인을 읽고 나서 다 해버렸기에 같은 말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해한 비유와 설명이 가득한 시지프신화 였지만 그렇기에 군데군데 이해가 가는 부분이 등장할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사막과도 같은 척박한 사유의 공간에서 부조리를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그 부조리를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인간. 그래, 그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다.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2년 전에... 그때 내가 내린 결론도 비슷하다. 비슷하게 고독을 끌어안고 공허에 서 있는 것. 공허에 서서 현재 삶에 충실하는 것. 앞으로 마주할 삶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도 그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삶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의 경중을 가릴 수 없을때, 나는 곧잘 죽음을 떠올린다. 삶만큼이나 너무나 당연한 존재, 항상 우리의 곁에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때면, 종종 나를 옭아매는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자유로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삶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서글픈 느낌을 자아낸다. 콕 집어낼 수 없는 이 느낌은 꼭 이 거대한 우주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는 결국 혼자고, 나를 포함한 이 세계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죽는 날까지 이런 서글픈 행복을 끌어안고 갈 것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 밖의,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다음 일이다. 그런 것은 장난이다. 우선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니체가 주장했듯이, 철학자가 존경받으려면 마땅히 자신의 주장을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대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답에 결정적인 행동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머릿속에서 분명해지도록 하려면 그것들을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 P15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몸짓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첫째 이유가 습관이다. 고의적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습관의 우스꽝스러운 면, 살아야 할 깊은 이유의 결여, 법석을 떨어 가며 살아가는 일상의 어처구니없는 면 그리고 고통의 무용함을 본능적으로라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 P19
모든 위대한 행동, 모든 위대한 사상은 그 시작이 하찮다. 위대한 작품은 흔히 어느 길모퉁이를 돌다가 혹은 어느 식당의 회전문을 지나가다가 착상한 것이다. 부조리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략)
무대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이 끝날 때 느껴지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 P29
사실 그가 느끼는 것은 오직 그것,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죄뿐이다. 그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스스로에 요구하는 바는 오직 자신이 아는 것만 가지고 살고, 실재하는 것으로써 자족하고, 확실치 않은 것이라면 아무것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그에게 응수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가 상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확실성이다. 즉 그는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한지 알고 싶은 것이다. - P82
자살은 그것 나름의 방식으로 부조리를 해소해 버린다.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부조리가 지탱되려면 부조리 자체가 해소되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인 동시에 죽음의 거부라는 점에서 자살에서 벗어난다. 부조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생각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현기증 나는 추락의 막다른 벼랑 끝에서 어쩔 수 없이 바라보게 되는 저 한 가닥의 구두끈이다. 자살자의 반대, 그것은 다름 아닌 사형수다. - P84
이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편협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을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인간적 오만이 펼쳐 보이는 그 광경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다. - P85
부조리는 인간의 극단적인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귀결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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